지난 5년 간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페미니즘 운동이 가져온 변화는 (인)문학을 공부하는 20대 학생인 내게 공부대상인 문학 장의 전반적인 기조와 분위기부터 인간관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총체적인 영향을 미쳤다. 불과 몇 년 전에 흠모했던 작가와 작품 들이 다르게 읽혔고, 마르크스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어린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생애를 꼼꼼히 검토하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눈치 보고, 망설이고, 부끄럽고, 소외감이 들었던 지난 날을 위로해준 반면 페미니즘은 남성동성 사회에서 느꼈던 불편함과 괴로움을 설명해주기도 했지만 체제의 수혜자이자 가해자로서 내 치부를 아프게 찌르곤 했다. 처음 내가 페미니즘에 별다른 거부감 없이 입문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진보와 해방의 학문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보편적인 지식이자 교양으로서 페미니즘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으나 현실의 디테일한 이슈에 대한 입장을 세우고, 나와 다른 의견을 지닌 상대방과 대화/토론을 할라치면 곧잘 난관에 봉착했다. 되돌아보면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든 '상황적'이든 지식을 생산하는 학문의 영역과 정치-운동의 영역, 일상의 영역은 각기 다른 층위와 맥락을 지니고 있고, 이를 섬세하게 매개하지 않고 일대일로 대응시키는 식으로 환원주의적 해석을 가하면 모순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규범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이 곧 대안적 남성성의 정립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었고, 일상의 다양한 맥락에서 여전히 규범적 남성성을 요구받거나 자발적으로 수행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리고 또래 남성들과 얘기할 때면 내 포지션은 페미니즘 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었고,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친구들(대부분 여성)과 얘기할 때면 친구들의 의견이 과격하거나 급진적이라 느껴질 때가 꽤 있었다. 재밌는 지점은 전자의 상황에서 나는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며 논리적으로 상대방을 설득하는 언술을 구사할 수 있었던 반면 후자의 상황에서 나는 감정적으로 혼란스러운 상태가 돼서 내면에서 조용하게 홀로 논쟁을 이어가거나 고민에 빠지곤 했다. 특히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 여성혐오적 사고방식을 기저에 깔고 있는 언행, 동성애자-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스스로 혐오나 차별이라고 생각/인정하지 않는. '보고 싶지 않은 욕구')를 대학원 밖에서 만난 남성들이 드러냈을 때 이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면 좋을지 당황스러웠다. 나 또한 그런 종류의 문제들을 크고 작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존재만 발언권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말할 자격이 부족하다고 느껴서, 말에 책임을 질 자신이 없어서 말을 삼켰다. 결과적으로 말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기도 하고, 장문의 카톡으로 상세하게 설명해서 상대방에게 손절당하기도 했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성 이슈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의 차이, 그동안 암묵적으로 묵인되거나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던 관습이 문제화되면서 많은 연인들이 갈라섰던 것처럼.
[페미니즘 리포트]는 이렇게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약 5년 동안 지금까지의 세상이 누군가의 불편함과 고통, 희생을 통해 유지돼온 평화였는지 묻기 시작한 여성들이 어떻게 사회를 바꿨는지 최전선에서 현장을 기록해온 기자들의 보고서이다. 탈코르셋 운동, 디지털 성범죄, 여성 노동, 소수자 차별금지 크게 네 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다.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을 때도 느꼈지만 간결하고 명확한 문체 덕분에 경쾌한 독서를 할 수 있었다.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전달되었고, 각 챕터 말미에 기자님들이 쓴 산문에서 자연인-시민으로서 고민과 기자로서 직업정신-문제의식이 교차하고 합쳐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여성 혐오, 성적 대상화, 시선 강간, 꾸밈 노동, 유리 천장, 핑크 택스, 감정노동, 가스라이팅, 페미사이드, 성인지 감수성 같은 말들이 더 이상 대중에게 낯설지 않게 됐다(개인적으로 핑크 택스는 이 책에서 처음 접했다). 개념-지식은 구성된 현실을 또렷하게 지시하고, 현실을 다르게 구성하는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기존 사회질서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었는지 마치 빛의 굴절원리를 깨달은 것처럼 익숙한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안주인'과 '바깥 양반'이란 말이 차별적인 인식에 기초한 표현인지 안다(필요하면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시작된 유구한 서양철학의 여성혐오 전통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다). 더 이상 예술가의 데뷔작을 '처녀작'이라 부르지 않는다. 페미니즘의 새로운 물결이 불러온 인식과 감수성의 변화는 규범적 여성성에 종속돼왔던 자신의 몸을 주체적 차원에서 바라보고 사용하자고 하는 탈코르셋 운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가해자의 편에 서서 법적 판결을 내려온 사법 시스템을 바꿔 누군가의 인생을 파괴시키는 범죄 기록물을 야동이란 이름으로 생산, 유통, 소비해온 범죄자-공모자들에게 조금이나마 합당한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여성인권에 대한 의식과 감수성은 사회적 약자를 향한 공감과 연대, 사회적 상상력으로 이어져 동물을 비롯한 비인간존재, 성 소수자(LGBT), 장애인, 생태 이슈로 연결, 확장하기도 한다. 본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든 종류의 차별에 반대하고 모두가 인간적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사람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고. 각자 가지고 있는 페미니즘/페미니스트의 정의는 다를 수 있겠지만 기성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에 부치는 주변부의 목소리로부터 세상은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해왔다. 역사의 진보는 나선형을 그리며 진행된다는 말을 상기해본다면 4부에 배치된 차별금지법안이 아직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다음 리포트에서 차별금지법안 통과가 2020년대 가장 빛나는 성과 중 하나로 기록될 거라 믿는다.
본문에 소개된 일화 하나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페미니즘 글쓰기 모임에서 한 남성은 기자님에게 여자친구와의 대화에서 벽에 가로막히는 순간이 있다며 이 장벽을 뛰어넘고자 수업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동기를 밝혔다고 한다. 서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선을 긋는 순간 오해와 불화에서 오는 불편함과 답답함이 쉽게 대상화된 인식-편견의 재생산과 혐오로 이어진다. 한쪽에서 '알고 싶지 않은 마음', 무지를 향한 열정이 들끓고 있지만 다른 쪽에서 타자를 이해하고자 번역의 모험을 감행하는 마음이 있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내 사람'을 넘어 모든 사람, 비인간존재를 포괄한 '지구생활자'의 모든 친구들에게 사랑이 퍼져나갈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