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 트리플 8
최진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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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학창시절로 되돌아가길 원하는 사람인가요, 그렇지 않은 사람인가요.

아마 친구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재밌었고 소중하지만 입시경쟁을 한 번 더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의견이 많을 거라 예상된다. 굳이 되돌아간다는 가정할 것 없이 그 시절이 좋았는지 그렇지 않았는지 바꿔 물어보면 어떨까. 아마 힘들었지만 좋았다, 재밌었다는 답변이 다수 의견이지 않을까 싶다. 회고의 대상-현재에 몸을 단단히 고정해두고 되돌아본 학창시절은 강렬하게 노스탤지어를 자극한다. 정서적 보정(미화)이 크게 가미된 결과일 텐데 이는 학창시절 겪은 진한 우정의 여운이 남아 있어서다. 감정의 호오를 떠나 농도와 강도의 차원에서 극점을 찍은 탓에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이다.

'힘들었지만 좋았던/재밌었던 시절'로 요약되는 감상은 야근/특근/과로에 해당하는 공부량에서 오는 피로와 입시 스트레스, 고민을 비슷한 입장에서 함께 나눌 수 있는 친구들로부터 비롯된다. 사회에 촘촘히 구획된 위계질서와 차별이 덜 했고, 계산하거나 가면을 쓰지 않더라도 편하고 자유롭게 인간 대 인간으로 친교 관계를 맺을 수 있었던 공동체였다고 학교를 기억하는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 억압과 폭력 속에서 방향성이 비슷한 목표의식을 공유하며 시험, 입시 같은 의례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깊은 유대감과 동질감을 공유하게 된다. 부모/교사와 신뢰하는 관계를 형성하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 솔직한 소통을 나누기 힘들고(자식과 눈높이를 맞추고 대화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모가 드물기도 하고, 자식 입장에서 자신에게 큰 기대와 투자를 하는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걱정 끼쳐드리지 않으려고 하기에), 현실이 가하는 압박의 강도에 비해 스트레스를 분출할 수 있는 창구가 너무도 제한적이기에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친구에게 진심이 되는 것이다.

'친구에 살고, 친구에 죽는' 뜨겁고 끈적한 우정의 세계는 최은영의 소설이 보여주는 것처럼 평온하고 평화롭기보다 처절하고 절박하다(김혜리). 누군가의 마음을 얻기 위해, 그/녀에게 대체불가능한 존재가 되기 위해, 관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규정하고 정의내리기 위해... '친구'라는 느슨하고 헐렁한 범주 내부에 다채롭고 복잡하게 존재하는 우정의 스펙트럼에서 특정한 좌표에 안착하기 위해, 특정한 방향으로 위치를 이동시키고자 투쟁한다. 소심하고, 욕망을 유예하고 포기하는 데 익숙했던 나는 주로 서운함과 외로움을 견디는 방식으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내게 개인사를 들려준 여성들은 '우정에 진심인' 이들이 많았다. 한 친구는 상대방에게 따지고, 난리 치고, 싸우는 과정을 겪으면서 서로를 1순위의 절친으로 꼽는 사이가 되었다고 했다. 뜨겁고 끈적한 감정이 한몸에 뒤엉켜 있는 마음끼리 온몸으로 부딪친 끝에 '우리'를 완성한 것이었다. 이렇게 처절하고 절박한, 그래서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드라마(혹은 비극적이고 처연한)가 풍부한 우정의 세계(그리고 퀴어한 관계적 욕망의 세계)가 과소하게 재현되는 이유는 이성애 중심주의 및 이를 제도화하는 사회문화적 관습, 규범이 강했던 탓이다.

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9월호>에서 최은영 소설가는 연애 관계만 하더라도 관계가 제도화된 측면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아무래도 연애가 이성애 정상가족을 형성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인 결혼으로 가기 이전 단계로서 받아들여져서다. 이에 반해 친구 관계는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애정을 바탕으로 감정과 욕망이 그 사람 자체를 향하는 측면이 강하다. 성애화된 존재나 성적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 본연의 모습으로 인간관계를 맺는 것이다. 상대방의 호감과 마음을 얻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닌 마음을 드러내보이고 건넨다. 상대방과 심적으로 가까워지기 위해 내 마음을 한 걸음씩 내딛는다. '나'라는 사람만 놓고 상대방의 세계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부탁하고, '상대방'이란 사람만 놓고 내 세계에 (어느 지점까지) 받아들일지 판단한다. 우정은 그런 점에서 진검승부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각자의 검을 맞대 승부를 겨루는... 검의 자리에 취향, 성격, 가치관(세계관), 유머 감각, 정체성 등 여러 가지가 들어갈 수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전학 오고 나서 처음 사귄 친구에게 각별한 감정이 꽤 오래 갔다. 5학년부터 반이 달라지고,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지 않아 함께 한 시간 자체는 적었지만 오랜만에 우연히 만나면 정말 반가웠다. 얼굴을 보자마자 2-3년씩 공백을 무색하게끔 친밀감이 들게 하는 친구였다. 명절에만 만나는 친척처럼, 방학 캠프에서만 만나는 친구처럼 각자의 궤도를 돌다가 중학교 고등학교 한 번씩 짧게나마 '예전처럼' 지내곤 했다. 중학생 때 우연히 재회한 친구를 자주 보고 싶어 집에서 먼 거리에 있는 학원을 옮겼지만 (기존에 다녔던 학원이 불만족스러운 상태기도 했던 것 같다) 정작 레벨 테스트 결과 친구보다 낮은 클래스에 배정되고, 얼마 안 가 친구가 학원을 옮겨 낭패를 본 적이 있다. 그래도 밤거리를 걸으며 대화했던 기억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학원을 옮긴 보람이 없지 않다. 고등학생 때 우연한 재회는 아마 길거리에서 이뤄졌던 것 같다. 친구는 이사를 했다며 자기 방으로 날 초대했고, 옥탑방 같이 분리 독립된 방에 전기장판이 깔려 있고, 어쿠스틱 기타가 한쪽에 서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친구와 친하게 지내던 그룹(내 초등학교 동창이기도 했던)과 당구장, 노래방 같이 남자 얘들이 놀러가는 곳을 몇 번 따라다니다 교류가 단절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글을 쓰는 도중에 떠오른 사실은 이 친구가 나랑 놀기 위해 집 앞에서 기다린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여태껏 기다리는 입장, 집에 바래다주는 입장에 주로 서 있었다 보니 날 기다려줬던 친구가 있었음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초등학생들도 대부분 핸드폰을 소지하고 있기 때문에 사전예고, 연락 없이 놀자고 집에 찾아오는 일이 거의 사라졌을 것 같다. 놀자고 내 이름을 부르던 친구의 목소리가 창문 밖에서 들려왔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여중과 남녀공학 고등학교에서 폭력에 노출되었던 최은영 소설가는 김혜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학창시절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밝힌 적이 있다(오디오 매거진 <조용한 생활> 9월호). 자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던 고등학생 최은영은 읽고 썼기 때문에 상태가 더 나쁜 인간이 되지 않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게 대학에 들어가 문학을 전공하고 여성주의 교지를 만들며 글 쓰는 법을 배웠던 최은영은 대학생 박민정 (소설가)에게 한번씩 책을 보내주고, 소식을 전해줬다고 한다. 민정아, 지금 허수경 시인은 독일에 계시대. 민정아, 지금 최승자 시인이 많이 아프시대(박민정 산문집 <잊지 않음>). 같은 지역에 산 적도, 같은 학교를 다닌 적도, 같이 일해본 적도 없지만 21년 동안 알고 지낸 귀한 인연의 시작은 인터넷 카페였다. 자신과 비슷한 목표를 가지고 있는 '총명한 사람'을 사귀는 행운이 최은영 소설가에게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먼 훗날 동료소설가가 되어 친구의 산문집에 추천사를 실을 수 있는 인연은 귀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밖에 없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세계에서 괴물이 되지 않은 채로, 끝끝내 인간인 채로 건너기에 혈혈단신, '일인칭 단수'는 역부족이다. 자신의 고통을 상대화할 수 있게 하는 지평의 확장과 시점의 전환, 사랑의 태도는 타인/타자와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타자를 만나는 상황은 친구, 연인을 사귀는 우정/사랑의 공간이지 않나 싶다. "성장이란 단어보다 생존이란 단어에 익숙해진 지금 십대들의 '일주일'의 표정"을 담은 최진영 소설집 <일주일>을 읽고 나서 떠올린 질문은 조금 역설적이게도 우정이었다. 생존경쟁에 내몰려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는 상황이 '우정의 위기', 우정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사회구조로부터 배태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서부터 십대 청소년의 생존을 고민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표제작 <일주일>은 한국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 노동의 위계적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 겪는 부조리를 증언하고 비판하는 사회고발적 성격이 있지만 내게는 추리소설로 읽혔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요일의 표정이 틀렸을 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소설, 어느 날 문득 재생된 일요일의 감정 - 배신당했다고 생각했고 화가 났(13)던 그날의 감정이 "배신감이 아닌 지도 모른다"(49)고 진실의 자리가 공석으로 바뀌는 소설. 눈에 보이는 사실의 이면을 처음 발견했을 때, '나'는 아직 자신이 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여름방학의 특정한 시기에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떠난다는 걸, 여름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았을 뿐이다. '나' 또한 당연히 여름휴가를 떠날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귀뜸조차 해주지 않은 친구들에게 느낀 배신감은 정당한 감정이었다. 수없이 비밀을 만들어내고 공유하고, 잘못/일탈을 저지르던 절친한 사이였으니까, '우리'가 함께일 때 일어난 사고는 '우리의 잘못'이었고, '누구의 잘못'이란 없었(17)을 만큼 일심동체였으니까. 그런데 친구들과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을 시작한 '나'에게 세상은 자꾸 분리된 형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여름 휴가를 떠나는 사람과 소식을 전해듣지 못하고 홀로 기다리는 사람. 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과 그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 일요일을 자기가 하고 싶은대로 보낼 수 있는 사람과 안전 점검을 제대로 받았는지 확인되지 않는 기계 앞에 홀로 서 있는 사람. 같은 땅 위에 발 붙이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꾸 '저기'에 있고, 자신은 '여기'에 있다. 갈라진 마음의 틈새에서 비어져나오는 기억들을 단서 삼아 추적한 끝에 마주한 진실은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맞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나'가 속한 세계는 잘못되었다. 일을 했지만 회사는 임금을 지불하지 않고, 임금 체불 문제에 대해 교사는 취업률이 떨어지면 학교에 피해가 발생한다고 부조리를 감내하라고 타이르는 세계. 2인 1조의 작업규칙을 무시하고 홀로 안전 점검이 제대로 완료되었는지 알 수 없는 기계로 작업하지만 사고가 나면 책임은 오롯이 개인에게로 되돌아오는 세계였다. 기성 사회의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잘못이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기에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자문한 끝에 '나'가 찾은 원인은 자기 자신이었다. 정확히는 자신의 믿음. "사람의 삶이란 가치 있고 소중하다고 믿"고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말이다. 모든 사람의 삶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은 아니라고, 아니 모든 사람의 삶을 가치 있고 소중하게 대하는 사회가 아님을 누구도 먼저 알려주지 않았지만 몰랐던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이다. '나'는 "일해서 번 돈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것"(45)이 꿈이었고, "일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믿었"(45)던 청소년이었다. 저축을 하고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고 싶고, 차를 사서 친구들을 태우고 여행을 가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남들보다 일찍 일을 시작한 청소년 노동자였다. 그런데 일은 하면 할수록 자신을 하찮은 존재로 만들었고, 어른들은 일을 일찍 시작한 자신을 실패자로 바라봤다. 청소년, 노동자, 일, 돈, 꿈 - 익숙한 단어들을 한 문장으로 엮자 단어의 행간에서 낯선 의미가 솟아난 것처럼.

<일요일>은 잘못된 세계를 만들어놓은 기성 사회의 시스템과 편견에 분노 어린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당사자가 겪는 모순이 단순히 사회경제적 차원에 머물러 있지 않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노동자이지만 노동자-현장실습생으로 그의 정체성이 모두 설명되지 않음을, 그가 어떤 꿈을 품고 자기 삶의 서사를 만들어왔는지 보여준다. 그 서사가 계획한 대로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현실의 벽에 가로막힌 상황에서 이어진 회상을, 이를 재해석하는 자아의 고투를 조명한다. 친구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어느 노동자의 죽음을 개인의 탓으로 돌린 적이 있었던 '나'는 이제 자신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까. 세상에 기만당해 감정의 진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날들을 통과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사건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을까. '나'가 자기 삶의 서사에 대한 편집권을 회복해 자기 뜻대로 꿈을 꿀 수 있었으면 한다. 자신의 뜻대로 살기 힘든 세상이라지만 사소해보이는 행복이나마 정확하게 정의내리고 추구할 수 있다면 조금이나마 존엄이 지켜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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