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아마도 - 김연수 여행 산문집
김연수 지음 / 컬처그라퍼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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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행 에세이가 땡겼다. 때마침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언젠가, 아마도>가 병영도서관에 꽂혀 있어서 읽기 시작했다. <여행할 권리>였는지 다른 책이었는지 헷갈리는데 제주도 올레길을 걷다가 휴식차 들렀던 카페에서 재밌게 읽은 적이 있어서 안심하게 선택했다. <언젠가, 아마도>는 여행잡지에 연재한 쪽글을 모아놓은 형식이다 보니 그때 읽었던 책에 비해 한 꼭지의 분량이 적어 아쉬웠다. 대서사시-대하드라마까진 아니더라도 드라마, 영화 한 편 정도의 스케일과 길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릴스 수준이었다. 하지만 짧은 분량에서도 독자의 마음을 건드리거나 생각을 자극하는 포인트를 뽑아내는 프로작가 김연수의 탁월한 솜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 이 양반은 프로여행가였다.



부대에 여행 잡지 트래비가 들어왔다. 태국 방콕, 일본 훗카이도, 샌프란시스코, 튀르키예, 정원을 감상하기 좋은 국내 카페, ‘먹는 것에 진심인‘ 걸로 평가받는 호텔의 뷔페와 디저트, 국내 섬여행 등을 다룬 권호였는데 재밌게 읽었다. 예전에도 들어온 적이 있었을 것 같은데 다른 권호도 없는지 찾아봐야겠다. 읽다 보니 전역 이후 배낭여행의 행선지를 이탈리아에서 다른 곳으로 돌릴 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때 당시의 심정과 기분, 욕망에 따라 여행지의 성격이 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 섬에서 혼자 삼시세끼를 찍고 싶어질 수도 있고, 유럽 대신 동남아에서 좀 여유 있고 풍족하게 여행을 하고 싶어질 수도 있고...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어쨌든 여행 텍스트를 좀 더 읽고 싶어졌다. 여행 에세이 추천해주세요 ~~(문인이 쓴 여행 에세이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곽재구의 포구기행이나 김훈의 자전거 여행 같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아쉬움은 남지 않게>



스페인의 그라나다에 머물 때였다. 거기서 나는 망명 작가 놀이를 하면서 지냈다.

(...) 길바닥에는 사각형 돌이 깔려 있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차와 차와 개와, 그리고 이슬람군과 십자군과... 또 뭐가 있을까. 아무튼 그 길로 다녔을 법한 모든 것이 지나간 덕분인지 불빛을 받은 돌바닥은 유리처럼 매끄럽게 반짝였다. 밤의 골목은 차도르를 입은 소녀의 두 눈동자처럼 무척이나 매혹적이었다. 알바이신 언덕에는 그런 골목이 흔했다. 구불구불 끝없이 이어지는 길인지라 반짝임에 이끌려 무심결에 발을 들이고선 끝까지 가보지 못하고 중간에 되돌아나오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라나다에 머무는 동안 그렇게 되돌아나온 골목이 얼마나 많은지! 거리를 헤매다가 지친 몸으로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푸치노를 주문한다. 카푸치노 한 잔이면 충분하다. (...) 고개만 들면 거기에 밤의 알람브라 궁전이 있으니까. 내게도 이루고 싶은 꿈이 몇 개 있었는데, 그곳에 앉아서 불 밝힌 알람브라를 올려다보는 건 꼭 그 꿈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내가 머무는 동안 알람브라 궁전이 야간 개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평생 하렘에서 인생을 보낸 이슬람 군주처럼 보름을 탕진했고, 떠날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밤의 알람브라 궁전에 들어가보지 못한 채 그라나다를 떠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저 멀찌감치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만 보면서, 마치 궁전과 후궁을 남겨둔 채 허겁지겁 도망치는 군주처럼, 마드리드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중에 다시 와서 밤의 알람브라 궁전을 꼭 봐야지, 하는 초등학생 같은 다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을. 다시 왔을 때 나는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닐 테니까.

(29-31)



<사막조차 피로 물드는 시대의 도피처>



오래전부터 혼자서 썼다 지웠다 하는 소설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2차 진주성 전투에 관한 부분이 있다. 성이 함락되고 살육이 모두 끝난 뒤, 죽은 자들 사이에서 한 소년이 일어나 6만여 명이 살해된 풍경을 보는 장면이 있는데, 그게 도대체 어떤 느낌일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소설을 썼다 지웠다 할 수밖에. 이 부분에서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진주성을 앞으로 또 몇 번이나 더 가게 될는지.

이미 한 번 이상 본 전시물들이라고 생각하고 박물관을 둘러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남긴 시가 눈에 띈다. 본 기억이 나지 않아 들여다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몸이여, 오사카의 화려했던 일도 꿈 속의 꿈이런가.‘ 분한 마음이 남아서 6만여 명이나 죽이면서 살아온 한평생이라면 여한이 없노라고 말할 것이지, 꿈 속의 꿈이었다니. 그나마 교훈 하나를 남기고 그는 죽었다. 모든 억울한 백골들이 웃으면서 하는 말, 결국 그도 죽었다는 것.

(...) 오히려 나는 몸이 죽는 게 어떤 느낌일지는 알 것 같다. 서른아홉 살에 나는 사막을 처음 봤다. ˝이런 게 사막이구나˝하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사실은 그런 게 아니었다. ‘사막‘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실재가 내 눈을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뭐라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뭔가‘가 내 눈앞에 있었다.

혼자서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어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들어가니 어디를 바라봐도 풍경이 똑같아서 차라리 어떤 풍경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곳이 나왔다. 거기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말하자면 내가 살던 세계가 사라진 듯한 느낌이랄까. 그 느낌은 많은 것을 깨닫게 했다. 감각의 대상이 사라지는 것과 감각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구분하지 못하리라는 것. 그러므로 육신이 죽을 때, 꿈에서 깨어나는 것처럼 한순간 이 세상은 사라지리라는 것.

사막이란 그런 곳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미리 죽음을 경험해 육신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자아를 버리려는 은수자들은 자발적으로 사막을 찾아갔다.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둔황에서 터키 중부까지 그들의 흔적인 석굴 유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거기서 그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죽어서야 알게 된 진실을 살아서 경험했으리라. 그래서 그런 은수자 중 한 사람은 이런 말을 남긴 것이다.



(...) 악은 결코 다른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라. (7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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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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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2 때였나. 서로 인사는 주고받지만 단둘이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같은 반 친구‘와 수원역에 같이 있었다. 왜 그때 그 친구와 수원역에서 같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들어 그 친구가 뱉었던 말이 기억나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건 잘못되었다. 이기적이다. AK백화점 맞은편 유동량이 많은 도로 위에서 장애인들은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저상시내버스를 보급하겠다고 했던 수원시장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직관적으로 친구의 주장에 반감을 느꼈으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로에 가까웠을 것 같다) 소수(자)의 특수한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순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당파성에 매몰되어 버릴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랬다. 이길 수 있는 토론, 적어도 토론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선에서 정답을 확실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확신이 들 때 논쟁에 참전했다. 토론과 논쟁이 ‘이기고 지는‘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의 논리를 경합시킴으로써 더 나은 문제해결이나 생각을 도출해내는 협력적 상생적 과정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생산적인 토론을 해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들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체득했는지 상대방에게 꼽을 주고 모욕감을 줘서 할 말이 없게 만들거나 혹은 속에 천불을 지르는 데 도사여서 토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사실 두려웠다.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악에 받쳐 감정이 앞서는 말을 뱉게 될까 봐, 관조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대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숙고할 틈 없이 지지 않기 위해 말을 이어나가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내게 토론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심과 쪽팔림, 빡침으로 점철된 극도로 감정적인 활동이 되어 있었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고 판단되면 부당하다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반정치적, 아니 탈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이미 기존 사회의 질서에서 밀려나 동등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해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하게끔 온건함과 무해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얼마나 기득권만이 휘두를 수 있는 특권적 행동인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평평하고 단일하고 균질적인 땅, 현실에 실재하는 차이와 차별이 지워진 상상적 공간에서만 능력에 따른 차등적 대우, 기회의 평등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정의론이 성립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와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포괄하여 동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디자인할라치면 기계적이고 납작한 공정의 논리보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정치적 상상력과 논리가 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마사 누스바움이 칭했던 ‘시적 정의‘ 같은 것.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문장이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descriptive 수사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제시하는 규범적normative 수사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규범, 혹은 진실로부터 거의 모든 인문학적 논의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존엄성 테제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차별에 반대해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고, 타자를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폭력에 반대할 근거도 힘을 잃을 것이다. 살짝이라도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인간과 시민의 구분(발리바르, 아렌트 등 거대한 정치철학자들이 씨름했던 문제이기도 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고민(‘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비판이 숱하게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력/학벌과 부동산 등을 통해 표출되는 민심에서 엿보는 한국적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자유와 평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때(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자유가 서로 맞부딪치는 상황) ...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자유‘‘평등‘의 개념은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사회에서 서구-백인-이성애자-남성-시스젠더 등 정상성의 규범에 맞춰 특수하게 적용된다.

이성과 합리, 객관과 보편의 자리를 자임해온 ‘남성‘의 젠더는 곧 근대성의 젠더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학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숱하게 비판해온 로고스중심주의,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 틀을 그대로 답습하여 여성혐오를 발화하고 수행하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온라인상에 매개된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내 생활세계에서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실감의 차원에서 여성혐오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용성, 비타협성, 폭력성, 집단주의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어서 파시즘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평소 문학과 영화, 밈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인친이 가끔이지만 꾸준히 파시즘 서적을 포스팅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성의 합리적 사용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예측하여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온 근대성의 역사에서 장애는 무엇이었을까. 장애학은 더 이상 장애가 정상성에서 뭔가가 결여되거나 손실된 마이너스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규정된) 거라고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적 실재로서 장애를 바라보게끔 한다. 이는 장애가 실체 없이 언어로 규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 장애 여부를 판별하는 척도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이란 게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일단 장애의 존재론-인식론의 기본 전제를 짚고 넘어갔으니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대상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장애인이란 존재일 텐데 <사이보그가 되다>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과학기술과 결합한 인간의 경험과 정체성, 과학기술이 장애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책이다.


다만 우리는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고, (...) 인간인지 아닌지를 매일 아침 고민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 ‘동등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고민한 시간은 제법 길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우리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을 반추해보면서,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 불완전하고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연대와 의존을 모색하는 미래의 과학기술은 무엇일지, 그 기술은 누구의 주도로,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았다. (11-12)

사이보그라는 상징은 현실과 동떨어진 SF 이미지일 뿐이며 장애인은 자신과 확실하게 변별되는 타자라고 인식 혹은 오해에 대해 김초엽이 쓴 이 구절을 제시하고 싶다. ˝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0)

이렇게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학이란 인식론적 무기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예리하게 묘파하여 ‘모든 이들의 문제‘로 문제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면서도 현실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이란 사회적 소수자가 어떻게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궁구한다.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페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63)

다시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있는,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현장으로 되돌아가본다. 이는 10여 년 전, 장애 정의를 사유할 수 없었던 ‘장애맹‘의 독자가 언어를 갖지 못해 투쟁의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차별의 언어에 대항하지 못해 위축되었던 장소이자 현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분명한 장소(104-105)‘이다. 이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이 올리는 포스팅을 지켜보며, 장애권리운동의 현장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하겠다는 발언을 들으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발로 밟아본다. 어디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땅의 지반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대지인지를 자문해본다. 무능의 낙인을 가슴 깊이 두려워 효능감과 성과에 몰입하게 되는 세상에서 내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나‘라는 독자적인 개체 단위(허구적 상상에 가깝기도 한)에 귀속되지 않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망에서만 발현되는 능력으로 어디를 연결하고 누구/무엇과 연립할지 생각해본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과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304-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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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 딴 세상 사람의 이 세상 이야기
배명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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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 작가입니다], 배명훈, 문학과지성사, 2022

전쟁이 발발했다고 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했다고 했다. 처음 그 소식을 접한 장소는 군대의 행정반이었다. 2022년 2월 22일 2시 22분 22초, 얼마 전 sns에 유행했던 짤이 떠올랐다. 2022년이란 시간대가 굉장히 낯설게 다가왔다. 자국의 이익을 중시하며 ‘강한 국가‘를 표방하는 나라의 전쟁광 지도자가 일방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었던 거구나 여전히. ‘지정학적 요충지‘라는 말이 수없이 들으며 자라온 세대인 만큼 가장 큰 위협세력인 북한 이외에도 러시아와 중국의 군사적 팽창이 실질적인 위협으로 다가올 수 있음을 처음으로 생각해봤다. 만약에, 정말 만에 하나 전쟁이 일어난다면 현역 군인으로서 바로 참전하게 될 텐데 어이없게도 어디선가 전쟁이 일어나면 군대와 함께 이동하다는 게 제일 안전하다는 말이 떠올라 기가 찼다. 인간의 생존 본능이란... 징그러운 거구나. 월급을 쪼개 유엔난민기구에 후원하고, 각종 매체에 게재된 우크라이나 침략 사태의 원인과 배경을 분석한 칼럼을 읽으며 착잡하고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군사력의 우위 혹은 힘의 균형terror of balance을 통한 전쟁의 억지, 방어 전술을 기본으로 삼는 한국군에서 군대의 일원으로 전쟁의 억지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의 보람을 느끼면서도 전쟁이 일어나면 불가피하게 자국민의 보호 및 전쟁의 승리를 위해 전투를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게 다가왔다(이런 서글픔은 군인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모든 전쟁이 거의 정당한 명분 없이 일어나긴 하지만 러시아의 일방적인 침략전쟁을 두고 국제사회가 일제히 규탄하고,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거라 예상했으나 이는 너무 순진한 생각이었다. 전쟁은 고도로 정치화된 활동이라고 했던가. 서방국의 섣부른 참전이 세계대전으로 비화할 위험성을 갖고 있을 뿐더러 뭣보다 각 국가는 결국 자국의 이익이란 패를 한 손에 움켜쥐고 테이블 앞에 착석하고 있었다. 초국적 보편적 평화와 인권의 가치를 염원하는 시민들니 전 세계에서 반전 시위를 이어가는 모습을 보며 뭉클하면서도 민간인에 대한 학살과 성폭력이 자행되었다는 범죄 소식에 처연해졌다.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귀환, 난민에 대한 차별과 배제, 소수인종에 대한 혐오/증오 범죄, ‘극단의 세기‘ 20세기를 지배했던 거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종언을 구했는지 몰라도 그 시대에 해결되지 못한 문제와 모순들이 좀 더 세련된 외피를 두르고 회귀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과 한 사람의 충돌과는 꽤 다른 국가와 국가의 무력 충돌, 세계와 세계의 충돌을 어떻게 바라보면 좋을지 고민하던 차에 SF 작가 배명훈의 에세이를 만났다. 자신이 SF를 쓰는 이유를 ˝국제정치학 소설을 쓰면 SF가 되기 때문˝([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이라고 답하는 국제정치학도 SF작가를. 그는 SF와 국제정치학이 얼마나 친연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또 자신의 사회‘과학‘적 SF 세계관에서 SF가 국제정치학적 사고실험을 풀어내기에 얼마나 유용한 도구인지를 역설한다.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국제정치학의 질문을 풀어가는 것이 제 목적이고요.?소설에서는 현실에서보다 질문을 자유롭게 던지게 되죠.˝([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

약간의 스포를 하자면 [SF 작가입니다]는 앞에 (나는 국제정치학 공부한)를 괄호 친 거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국제정치학이 자주 등장하며(한국작가들이 주로 국문학과를 비롯한 어문 계열 전공자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 정도로 자신이 적을 둔 학문을 적극적으로 언급하고 설명한 사례를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청소년 독자 중 한 명은 혹해서 국제정치학과에 지원했을 거라 예상될 정도로 국제정치학이란 학문, 그리고 이 학과의 세계를 흥미롭게 그려낸다. 국제정치학과에서 한국근대소설을 읽는 대학원 수업이 있다는 사실은 국문학도로서 거의 충격적이었다..!(국문학 대학원에는 국제정치학 수업이 없지만 트랜스내셔널 인문학, 탈식민주의, 비교문학은 사실상 국제정치학이나 다름 없다고 위안을 삼아본다. 식민지 근대성, 동아시아 담론,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 정도면 ㅇㅈ?)

그런 면에서 배명훈 작가는 일반적인 SF 작가의 이미지와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감이 있다. 자연과학을 전공했거나 자연과학적 지식이 해박해 작품에 구축된 세계의 과학적 설정이 엄밀하고 논리적인 하드 SF류를 쓰는 과학자st의 SF작가... 배명훈 작가의 설명을 들어 보니 이런 통념은 실제로 SF계에 통용되고 있는 편향이 반영된 결과인 듯하다.

물론 SF 영역에도 편향이 있기는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SF의 장에는 천문학과 물리학을 맨 위에 두는 특유의 위계질서가 있다. 중세의 신학만큼 절대적인 지위는 아니라 해도 사회과학적 추론이 맨 먼저 관심을 받을 여건은 아니다. (...) 그래도 나는 내 일을 계속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지식을 교과서 안에 박제해두지 않고, 본질이라 여겨지는 부분을 잡아채서 내가 창조한 세계에 놓여 있는 재료로 다시 조립하는 일을. 그것이 내가 하는 SF다. (69)

그런데 생각해보면 외계생명체, 보다 정확히는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지구상에서 조우했다고 했을 때 문제가 되는 지점은 주권과 영토이다. 그러니까 이는 지극히 근대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이방인/외국인이든 외계인이든 자국의 영토를 지배하고 있는 주권의 자장 안에 포섭됐을 때 고깃덩어리(외계인은 -신체가 있다면- 신체를 이루는 물질의 구성 요소가 단백질 위주가 아닐 가능성도 크지만)가 아니라 ‘시민‘이란 정치적 권리를 지닌 주체로 인정받을 수 있다.

SF영화 [디스트릭트 9]을 보면 (기억의 회상에 의존해 글을 쓸 예정이라 사실 관계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감안해주시면 좋겠다) 외계인들이 갑자기 남아공 어딘가에 불시착했을 때(왜 미국이 아니라 남아공이냐 하면 감독이 남아공 출신이기 때문이다. 영화라는 세계는 보통 이런 식인 경우가 많다), 일단 이들을 난민 캠프 같은 곳을 조성해 수용한다. 그리고 정부의 수뇌부가 모여 이 외계인의 법적/정치적 지위와 권리에 대한 논쟁을 이어간다. E.T 같은 외계인 친구 하나만 지구에 왔다면 다락방을 지니고 있는 미국 가정집에서 부모님 몰래몰래 외계인과 함께 사는 게 가능하겠지만 (아파트가 지배적인 주거구조인 한국에서는 이마저도 불가능에 가깝다) 집단으로 함께 오면 주거지를 마련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문제가 된다. ‘내 집 마련‘의 열망이 엄청나게 강하고, 공공주택의 입주권을 따내기도 엄청나게 힘든 한국에서는 시민들이 외계인 수용에 대해 굉장히 날 선 입장을 보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하여간 물리적으로 점유할 공간을 마련한다 하더라도 이방인에게 법적으로 정치 공동체에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문제는 또 다른 차원이다. 복잡하고 난해한 문제다. 국가적 차원, 대내적 차원에서 극적으로 합의를 도출해냈다 하더라도 국제정치 사회의 승인 혹은 간섭이라는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미국이 판단했을 때 자국에 불이익을 미칠 위험성이 큰 존재로 판단한다면... 중국은? 세 사람만 모여도 점심 메뉴 하나 결정하기가 어려운데 국운이 걸려 있는 국제정치적 사안을 논의하려면 무려 6자 회담의 산을 넘어야 하는 게 한반도의 실정이다. 한국-미국-일본 의 자유주의 진영과 북한-중국-러시아의 사회주의 진영... 이건 마치 민초파와 반민초파의 대립을 연상시키는... 각설하고

(스포 있음 !!!)

드니 빌뇌브의 [컨택트](Arrival)도 겉으로 보면 언어학의 사피어-워프 가설과 고전 역학의 해밀턴의 원리(최소 작용 원리)가 적용된 과학적 텍스트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말 부분에서 국제정치학적 부분이 중요한 텍스트이다. 자신과 외교적, 군사적 노선을 취하고 있는(이에 대해 중국에 대한 편향적 시각을 드러냈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다른 세계를 설득해내는 과정 - 외계인들이 알려준 헵타포드어를 이해해 시간을 비선형적으로 파악해 미래를 기억할 수 있게 되면서 -이 결말 부분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다. 설득의 기술이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가족 치트키‘라는 점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 외계인의 외계어라는 절대적 타자성 앞에 끝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루이스의 학자로서 성실하고 용기 있는 태도,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딸의 죽음이란 미래를 내다봤지만 그녀를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마저도 감내하게 하는 만남의 축복을 선택하는 엄마의 사랑의 깊이. 한평생에 걸쳐 있는 어머니의 도저한 사랑을 한 순간의 선택에 응축시켜 느낄 수 있게끔 했다는 점에서 전율스런 감동이 전해졌던 게 아닌가 싶다.

하여튼 외계인이 지구에 오면 그를 친구로 봐야 할지, 적으로 봐야 할지 고민하게 되고, 이 타자에 대한 환대라는 윤리적, 정치적 질문에 서로 다른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지닌 이들끼리 함께 답을 도출해내야 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다. 난관과 난항이 예상되는 상황인데 바로 그런 점에서 SF의 상상력은 빛을 발할 수 있다. SF는 인물이 아닌 세계를 창조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이 세계의 초기 조건을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문명이 어떤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는지 관찰하기 용이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마치 빅뱅 직후 초기 우주의 상태를 파악함으로써, 우주의 기본적인 셋팅 값을 역추산함으로써 현재 우주를 이해하려는 시도처럼 세계를 부숴 말랑말랑한 반죽 상태로 만들어 다른 모양으로 빚어보면 알 수 있다. 세계의 특정한 조건이 현재 우리를 어떤 식으로 결정지었는지 - 그걸 비교해볼 수 있는 거울 역할을 해주는 SF 소설을 우리가 획득함에 따라.

SF의 상상은 그런 것이다. (...) SF에서 가치 있는 상상이란 다른 것과 동떨어진 재미있는 발상이 아니라, 삶과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통합적 상상을 말한다.(82)

SF 작가에게는 바로 이런 감각이 필요하다. 다른 행성에 세워진 국가는 어떻게 묘사하면 좋을까? 우선 우리가 아는 국가 개념에서 2020년 지구라는 특수한 환경으로부터 비롯된 요소를 떨어내고, 보다 본질적인 내용울 추출한다. 그다음 새로운 행성의 특수한 환경에 이 핵심 요소를 대입한다. 그런 방법이 현실적이다. (...) SF 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막스 베버의 책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독서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 자연스럽게 적용하는 말랑말랑한 상상력이다. (62-63)

창작자들은 아직 아무도 언어로 포착해내지 못한 변화의 실마리에 이름을 부여하고 가중치를 주어 돋보이게 한 다음, 자기 창작물과 동시대 사회에 대입해보곤 한다.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80)

이런 예술적 상상력, 과학적 상상력이 소위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시도하는 순문학의 예술적 상상력과 다른 지점일 것이다. 이제껏 하위장르, 주변부의 매니악한 장르로 머물러 있었던 SF가 주류로 부상하며 저변을 확장하고 있는 만큼 ‘과학‘과 ‘상상력‘의 경계가 널리 확장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식 지평의 확장˝이란 개념이 SF 비평에서 중요한 개념이라 얼핏 들은 적이 있다. 특수한 정체성과 표지를 깃발 삼아 대립하고 반목하고 배제하는 증오와 혐오가 빈번해진 시대에 경계를 뛰어넘는 확장의 상상력이 우리를 여태껏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줄 것이라 믿는다.

끝으로 국제정치학에서 중요한 주제인 전쟁에 대한 배명훈 작가의 인터뷰 내용으로 끝을 맺고자 한다.

˝전쟁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전혀 안 좋아해요. 그냥 전쟁이라는 게 존재할 뿐이에요. 이걸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잖아요.?전쟁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평화를 실현할 수는 없어요.˝([우리는 SF를 좋아해 #5] 은하 제국은 왜 안 돼?)

전쟁을 연구하는 반전주의자. 당신이었군요, 배명훈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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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수학이 필요한 순간 +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 - 전2권
김민형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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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이 필요한 순간], [다시, 수학이 필요한 순간]을 읽었다(저자의 친절한 제안대로 수식 부분은 폴짝 건너뛰고...). 과학 책을 한 권 두 권 읽다 보니 수학 책을 읽고 싶었고, [파토의 과학하고 앉아 있네](아마 카오스 재단에서 주관한 강연 시리즈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에서 들은 수학자 김민형의 강의가 좋았기에 병영도서관에서 책을 발견하자마자 자리로 데려왔다. 훈련소 시절에 읽은 [뉴턴의 아틀리에]에서 유지원 선생님은 일반적으로 대수로 푸는 문제를 기하로 치환시켜 푼다고 했다. 머릿속에 기하학적 형태들을 그려놓고 문제를 푸는 방식을 그의 고등학교 수학선생님은 풀이 과정은 남들과 다르지만 답이 성립한다고, 정답에 이르는 또 다른 올바른 길임을 확인(인정)해줬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유지원 선생님처럼 기하학적으로 수학을 사유했다고 한다. 대수학은 데카르트의 좌표계 발명이란 혁명적 기여를 토대로 발전할 수 있었다고. 고도로 추상적인 수학과 그렇지 않은 수학(정확히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리적이고 구체화된 형태를 갖는 수학??) 등 수학도 ‘소문자 수학들‘이 존재하는 듯 보였다



책의 부제는 각각 인간은 얼마나 깊게 생각할 수 있는가, 질문은 어떻게 세상을 움직이는가 이다. 그렇다고 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내적 평정을 찾고 싶을 때 어려운 수학문제를 풀면 차분해지는 사람이 있다고. 수포자였지만 내게도 그런 경험이 한 번 있었다. 중1 때 조금 어려운 수학문제집 숙제를 주말에 혼자서 하는 상황이었다. 초반에 쉬운 문제들을 해치우고나자 좀 더 난이도 있는 문제에 막혀 (아마도) 답지를 보고 베끼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다. 그때 유혹을 견디고 생각에 몰두하자 문제를 풀어낼 수 있었고, 그 잔잔한 쾌감과 성취감의 기세를 몰아 2-3시간 만에 숙제를 끝마칠 수 있었다. 그 이후에 어려운 문제를 만나면 진득하게 붙들고 늘어지지 않/못했던 적이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한 문제를 풀더라도 원리를 온전히 이해하고, 수학적으로 생각하는 연습의 축적이 본질적인 실력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더러 한 문제에 막혀 시간을 ‘허비‘하느니 다른 문제나 과목을 공부하는 게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조급함과 불안함 때문에 제대로 공부를 못 했구나 새삼 자각하게 된다.



이런 경험이 보편적인지 몰라도 한국의 수학교육을 비판하는 단골 레퍼토리는 수학이 아닌 산수를 시킨다, 수학의 근본적인 원리를 이해하고 수학적 사고력을 키워줘야 하는데 문제를 빨리 푸는 기계, 질문하기보다 정답을 빠르게 산출하는 데 혈안이 된 ‘질문하지 않는 학생‘을 키운다는 것이다. 창의성을 요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부합하는 인재를 길러내기 위해 ~~ ... 하지만 김민형에 따르면 공식을 외우고, 계산을 해서 문제를 많이 풀어보는 수학교육/학습의 방법론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유럽의 학생들은 계산은 계산기에 맡기고 어쩌구하는 얘기와 달리 공식을 외우고 계산을 하는 학습을 통해 자연스럽게 앎을 체득할 수 있다고. 교육자마다 이견이 있을 수 있는 사안이지만 교육방법론보다도 교육/입시 제도 등 외부의 복잡한 맥락을 고려해야 하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아무튼 자연과학 계열은 수학, 인문사회 계열은 언어 가 기초 공사를 담당하는 영역 이라고 하니 일단은 언어 공부를,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수학 공부를 조금씩 해볼까 한다. 꾸준히 오래오래. 깊게 생각하기 위해, 정확한 질문을 잘 던지기 위해. 틀리지 않기 위해, 아니 틀리더라도 과정에서 배우는 법을 익히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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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돌로지 - 아이돌+팬덤+산업의 변신
류진희 외 기획 / 빨간소금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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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예스24 서평단 자격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이돌 음악 많이 듣니? 군대에 가면 아이돌 음악에 전문가가 돼서 나온다고 하던데. 근데 딱 시기가 제대하기 전까지에 멈춰 있고. [프로듀스 101]을 팬덤의 문화현상으로 분석한 학위논문을 쓴 친구가 내게 물었다. 응, 많이 보지(케이팝은 단순히 하나의 음악 장르가 아니라 시각문화다/126). 자대배치 받은 이후에는 다들 스마트폰을 끼고 사니까 좀 덜한데 훈련소에서 IPTV로 뮤비를 많이 봤어. 에스파, 레드 벨벳, 트와이스, 스테이씨, 스우파 등등. 트와이스는 다 알더라. 내 또래부터 21, 22살 얘들도 다 좋아하더라고. 한 번은 주말에 다 같이 트와이스 히트곡 메들리를 틀어놓고 [cheer up]이랑 [likey] 군무를 췄다니까 !

친구가 남돌의 전문가여서 그랬는지 몰라도 우리의 아이돌 얘기는 더 이상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에 아이돌 음악을 잘 듣지 않는 남성들, 하지만 군대에서 한시적으로 아이돌 음악이란 장르에 전문가/덕후가 되는 현상. 그랬다. 그동안 내가 군대에서 만난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발라드를 듣는 사람과 힙합을 듣는 사람. 발라드의 외연을 넓혀 해외 POP 장르까지 포함시킬 수 있긴 하지만 전통의 강호(?) 발라드와 2010년대 이후 한국에서 청년 세대를 대표하는 하위문화의 장르로 우뚝 선 신흥 강호 힙합의 우세는 명약관화했다(한 번은 재즈 음악을 틀었다가 누가 이런 이상한 음악을 틀었냐고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듣기 좋은 음악이자 따라 부르기 위한 노래 장르로서의 발라드, 스트릿 문화의 주요 항이자 청춘의 분노와 우울, 꿈(자수성가, 영앤리치?)을 대변하는 가사와 감각적인 비트의 힙합.

발라드 음악을 좋아하는 한 친구를 보면 ‘듣기 좋은 음악‘으로 발라드 취향이 공고해서 그런지 아이돌 음악을 왜 듣는지 모르겠다고 의구심을 내비친 적이 있다. 꽤 오래 전부터 아이돌 음악에 해외의 유명 프로듀서가 참여해왔고, 다양한 장르를 섞기도 하고 굉장히 복잡하고 어려운 화성구조를 사용하기도 하는 등 음악성의 수준이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이돌 음악은 음악성이 떨어지고 ‘눈요기‘를 위한 쇼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이 강하다는 편견이 잔존해 있는 듯하다.

음악성에 대한 폄하도 문제지만 사실 이 ‘눈요기‘에 대해 이전과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가 논의했던 여성에 대한 성적 대상화의 응시는 아이돌을 ‘소비‘하는 주요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적 대상화에 대한 비판이 자칫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 그리고 아이돌의 주체성을 지우는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어 주의할 필요가 있다. 내 주변에 아이돌 덕후를 보면 다른 무엇보다 비주얼/얼굴의 우선성을 강조하는데(‘얼굴을 파먹기 위해 덕질한다‘) 오히려 이 얼굴성이 추동하는 정동적 관계를 생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독법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얼굴을 위시로 신체를 포획하여 자본친화적 미의 규범에 예속되게 만드는 자기규율의 테크놀로지가 작동하는 사회에서 신체와 자기의 관계를 어떻게 재구축할 수 있을까. 몸에 대한 주권의 회복, 아니 몸들의 배치 속에서 타자와 자유롭고 인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몸의 회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하여 타인의 얼굴을 있는 그대로 보는 일, 그리고 읽는 일(우리는 얼굴에서 피부 상태나 관리된 표면이 아닌 감정과 생각의 기미를 읽어내는 능력을 얼마나 가지고 있을까)에서 코드화된 욕망의 발현에서 벗어나 ‘벌거벗은‘ 얼굴을 마주할 수 있을까. 눈을 마주치고 상대방의 얼굴을 다정하게 들여다보는 일. 얼굴에 새겨진 고유한 시간성을 감각하고 체득하는 일. 얼굴에 대한 질문을 앞으로 이어가보고 싶다.

한편 아이돌을 음악으로만 한정해 논의하기에 그 세계가 너무 다채롭고 풍부해서 아깝다는 생각이 앞선다. 아이돌은 ‘시각문화‘(패션과 ‘얼굴성‘의 비주얼, 역동적인 군무, 뮤직비디오와 직캠, 멤버별 영상 등 다양한 하위장르의 영상물로 구성된)이자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서사이기도 하다. 그룹의 서사 및 멤버 개개인의 서사, 소속사에서 제공하는 시놉시스 격의 설정 아래 뮤직비디오 등을 통해 팬들이 아이돌의 세계관과 서사를 추리하고 상상하고 보충하고 재구성하는 식으로 상호텍스트적 실천이 이뤄진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이 설명을 들은 상태에서 아이돌 음악을 접하니까 색다른 재미를 느꼈던 경험이 있다. 에스파의 ‘Next level‘을 보고 나니 이 독특한 컨셉과 세계관이 궁금해져서 전작 ‘black mamba‘을 찾아보는 것으로 에스파 디깅을 시작했던 것이다. 신곡이 나오면 스트리밍 한 번 하는 것으로 끝나곤 했던 아이돌에 대한 향유를 텍스트, 서사, 이미지, 퍼포먼스의 차원으로 다각화시키는 지평의 확장 - 여기에 내가 사랑하는 아티스트를 양육하고 성장시키고 성공시키고 싶다는 팬덤의 일원이 되는 차원까지 나아가지 않았지만 적어도 사람들이 아이돌을 향유하는 방식이 남고와 군대에서 접한 또래 남성동성사회의 그것보다 훨씬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페미돌로지]를 비롯해 학술장에서 이뤄진 아이돌에 대한 논의를 살짝이나마 접해봤다. 일단 너무 중요한 문화 현상이자 개념이 되어버린 팬덤. 팬덤이라는 새로운 집단적 정체성, 일단 아이돌 세계에 국한해본다면 아이돌 가수와 소속사와 더불어 아이돌 시장에 내놓을 상품/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문화 기획자이자 실질적으로 시장에서 생명력을 구가하게 하는 소비자인 존재. 비판이론의 전통에서라면 이들이 후기 자본주의의 물신적 상품에 현혹돼 현실의 모순을 은폐하고 있는 문화상품에 종속된 우매한 대중의 형상으로 포착될 가능성이 높지만 ‘현실‘에서 이들은 다양한 정치집회/시위현장에서 팬덤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결집해 집단행동을 보여준 새로운 정치적 주체이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집회의 시작은 이화여대에서 시작되었고, 이 학생들이 용기를 내 불의에 대항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어준 노래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였다. 비단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 소수자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위에서 k-pop이 울려퍼졌다. 이렇듯 k-pop은 어느 시점부터 소수자들의 놀이터, 축제현장이 되었다고 한다([페미돌로지]에 수록된 글들 중엔 해외 언론이 만들어낸 이미지와 달리 k-pop의 가부장적 남성성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고, k-pop이 트랜스퍼시픽 콘텐츠의 상품으로 국제화되는 과정에서 시장의 수요를 영리하게 반영한 부분을 지적한다).

이런 팬덤의 정치는 정치의 팬덤화 현상을 기해 더욱 중요도가 높아졌다. 정치의 팬덤화는 ‘노사모‘ 열풍을 이끌어냈던 고 노무현 대통령 시절부터 지지난 대선 당시에 ‘나꼼수‘ 열풍,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제도권의 정당정치에 기대지 않고 이념과 당파를 막론하고 포퓰리즘의 문법으로 급부상한 정치인들의 활약을 떠올리게 된다. 대개 이민자, 난민, 여성, 소수인종, 성적 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동력으로 삼은 극우 포퓰리즘이 현실정치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낳았지만... 앞으로도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직접민주주의의 집단행동은 팬덤과 유사한 형식을 취할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중시하는 이슈(이를 테면 동물권)를 선도적으로 이끄는 정치인이나 인플루언서와의 직접적인 교류(후원 등등) 및 결집과 같은 식으로 말이다.

이렇듯 당대의 정치와 미학, 경제와 기술이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장소로서 k-pop 장을 이끌어가는 행위자인 팬덤은 종래의 저항적 주체의 모델, 주체화의 형식으로 논의되어 온 민중, 시민과 또 다른 성격-소비자 정체성을 강하게 띠고 집단주의적이면서 정동의 공동체로 흥미로운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페미돌로지]는 이런 팬덤이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내면화한 능력주의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입각한 아이돌과 팬덤 내부에 대한 규율과 억압(성공이란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신념 아래 행해지는 단속. 지불한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교환을 요구하는 소비자 정체성의 발현, 지불능력과 같은 진정한 팬의 규범에 따라 위계를 분할하는 문화. ‘배제를 통한 단결‘)에서 벗어나 아이돌과 함께 변화를 꿈꾸는 팬은 가능한지 묻는다. 내게 이 질문을 일차적으로 당신이 아이돌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한다면 그를 우상의 아우라를 지닌 아이돌뿐 아니라 정동 노동을 수행하는 노동자,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청년으로 바라봐줄 수 있는지 묻는 것처럼 들린다. 아이돌이니까, 팬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감내해야 한다고 자연화된 규율을 비판에 부쳐 아이돌의 인격을 착취하지 않고 팬들의 애정을 소진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지속가능한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지 묻는 것처럼 들린다(나는 결국 이런 질문이 문화예술계 종사자/프리랜서들에게 너는 하고 싶은 일 하고 있으니까 낮은 경제적 대우와 사회적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는 욕망의 평등주의-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욕망을 유예하고 포기한 보상하는 심리-와 맞닿아 있다고 본다).

한편 어느 저자가 밝혔듯 남덕에 대한 논의가 거의 포함돼 있지 않아 아쉬웠다.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인증한 멤버가 포함된 아이돌 그룹의 CD를 부수는 인증샷을 남겼다고 하는, 여성혐오의 대표자로 고착된 이미지(이런 이미지가 과잉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소위 ‘이대남‘의 징후적인 면모를 노출시키는 사건이었기에 본문에 제시된 비판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에서 벗어나 k-pop 댄스를 커버하고 수행하고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미끄러져 ‘퀴어한‘ 남성성을 실천하는 다양한 사례들(본문의 6장 ‘동아시아 베어 남성 댄스 팀의 걸그룹 커버댄스‘가 이를 다루고 있다)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팬덤문화 이외에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장으로서 팬픽(최근 논란이 되었던 알페스를 비롯해 학문장에서도 굉장히 핫한 소재...), k-pop계의 ‘게임 체인저‘라 할 수 있는 BTS - 방탄 유니버스에 대한 논의, 버닝썬 사태가 몇몇 연예인의 일탈이 아니라 개발독재 시기 젠더화된 성별 분업에 따른 노동/여성에 대한 착취를 기반으로 성장한 기업이 아이돌 승리의 얼굴성을 기반으로 여성들을 끌어모아 수익성을 보장한 모델로서 ‘살아 있는 시체‘로서 여성에 대한 죽음정치적 폭력의 구조 속에서 발생한 사건임을 밝히는 페미니스트 정치경제학의 논의 등 개인적으로 공부가 많이 되었던 독서경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연습생의 혹독한 트레이닝 체계를 거쳐 데뷔를 하고, 말 그대로 무한경쟁의 수레바퀴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서사를 써내려가는 케이팝 아티스트. 그들의 탄생과 데뷔, 성장과 반목의 과정을 지켜보며 응원하고 덕질을 하는 팬. 서로에게 있어 서로 없어선 안 될 존재인, 하지만 일반적인 이성애 중심주의의 독점적 연애와 사랑과 또 다른 형태의 사랑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책. 십대 청소년과 또래에게 감수성의 형성부터 정치적 입장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아이돌이 건강하게 자신의 재능을 펼쳐나갈 수 있길, 팬이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게 되길, 그렇게 사랑의 피드백 루프가 오래오래 이어지고 널리널리 확산되길 응원한다.

레드벨벳, 오마이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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