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이보그가 되다
김초엽.김원영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고2 때였나. 서로 인사는 주고받지만 단둘이 밥을 같이 먹는다거나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는, 그러니까 한마디로 ‘같은 반 친구‘와 수원역에 같이 있었다. 왜 그때 그 친구와 수원역에서 같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들어 그 친구가 뱉었던 말이 기억나곤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요구하는 건 잘못되었다. 이기적이다. AK백화점 맞은편 유동량이 많은 도로 위에서 장애인들은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저상시내버스를 보급하겠다고 했던 수원시장에게 약속을 이행하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나는 직관적으로 친구의 주장에 반감을 느꼈으나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정의감의 발로에 가까웠을 것 같다) 소수(자)의 특수한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순간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리의 편에 서지 못하고 당파성에 매몰되어 버릴 거라는 두려움에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랬다. 이길 수 있는 토론, 적어도 토론의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선에서 정답을 확실하게 내놓을 수 있는 상황이라는 확신이 들 때 논쟁에 참전했다. 토론과 논쟁이 ‘이기고 지는‘ 싸움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입장의 논리를 경합시킴으로써 더 나은 문제해결이나 생각을 도출해내는 협력적 상생적 과정임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도 생산적인 토론을 해볼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다들 쇼펜하우어의 논쟁에서 이기는 38가지 방법을 체득했는지 상대방에게 꼽을 주고 모욕감을 줘서 할 말이 없게 만들거나 혹은 속에 천불을 지르는 데 도사여서 토론을 이어갈 수 없었다. 사실 두려웠다. 이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 악에 받쳐 감정이 앞서는 말을 뱉게 될까 봐, 관조적으로 이성적 사유를 할 수 있게 만드는 대상과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져 숙고할 틈 없이 지지 않기 위해 말을 이어나가는 상황에 놓이게 될까 봐. 내게 토론은 언제부터인가 수치심과 쪽팔림, 빡침으로 점철된 극도로 감정적인 활동이 되어 있었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준다고 판단되면 부당하다는 딱지를 붙여버리는 반정치적, 아니 탈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이들을 볼 때면 과거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이미 기존 사회의 질서에서 밀려나 동등하고 정의로운 대우를 받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목소리를 내고 행동을 취하는 것에 대해 기존 사회 질서에 부합하게끔 온건함과 무해함의 잣대를 들이대는 게 얼마나 기득권만이 휘두를 수 있는 특권적 행동인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평평하고 단일하고 균질적인 땅, 현실에 실재하는 차이와 차별이 지워진 상상적 공간에서만 능력에 따른 차등적 대우, 기회의 평등을 통한 공정한 경쟁의 정의론이 성립할 수 있다. 반대로 차이와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포괄하여 동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디자인할라치면 기계적이고 납작한 공정의 논리보다 복잡하고 아름다운 정치적 상상력과 논리가 발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를 테면 마사 누스바움이 칭했던 ‘시적 정의‘ 같은 것.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 문장이 사실을 기술하는 기술적descriptive 수사가 아니라 실현되어야 할 이상을 제시하는 규범적normative 수사임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이 규범, 혹은 진실로부터 거의 모든 인문학적 논의가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지 않았다면,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존엄성 테제를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차별에 반대해 정의를 추구해야 할 이유가 없고, 타자를 소외시키고 착취하는 폭력에 반대할 근거도 힘을 잃을 것이다. 살짝이라도 디테일하게 들어가면 인간과 시민의 구분(발리바르, 아렌트 등 거대한 정치철학자들이 씨름했던 문제이기도 한), 자유와 평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느냐 하는 고민(‘소유권‘을 중심으로 하는 시장경제-자유주의적 자유에 대한 비판이 숱하게 이뤄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학력/학벌과 부동산 등을 통해 표출되는 민심에서 엿보는 한국적 자유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해 답하기가 쉽지 않다), 서로의 자유와 평등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일 때(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자유가 서로 맞부딪치는 상황) ...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간‘‘자유‘‘평등‘의 개념은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사회에서 서구-백인-이성애자-남성-시스젠더 등 정상성의 규범에 맞춰 특수하게 적용된다.
이성과 합리, 객관과 보편의 자리를 자임해온 ‘남성‘의 젠더는 곧 근대성의 젠더에 다름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학술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숱하게 비판해온 로고스중심주의, 서구의 이분법적 사유 틀을 그대로 답습하여 여성혐오를 발화하고 수행하는 광경을 일상적으로 목격하며 온라인상에 매개된 정보의 차원이 아니라 내 생활세계에서 직접적으로 현전하는 실감의 차원에서 여성혐오의 현실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사실상 파시즘에 가까울 정도의 비관용성, 비타협성, 폭력성, 집단주의적 성격을 내장하고 있어서 파시즘을 다시 읽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평소 문학과 영화, 밈에 대한 흥미로운 글을 쓰는 인친이 가끔이지만 꾸준히 파시즘 서적을 포스팅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든다).
이성의 합리적 사용을 바탕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예측하여 인간이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만들어온 근대성의 역사에서 장애는 무엇이었을까. 장애학은 더 이상 장애가 정상성에서 뭔가가 결여되거나 손실된 마이너스의 상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구성된(규정된) 거라고 구성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적 실재로서 장애를 바라보게끔 한다. 이는 장애가 실체 없이 언어로 규정된 개념에 불과하다는 게 아니라 정상과 비정상의 범주, 장애 여부를 판별하는 척도로서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기능과 능력이란 게 자의적으로,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뜻이다. 일단 장애의 존재론-인식론의 기본 전제를 짚고 넘어갔으니 다음으로 주목해야 할 대상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장애인이란 존재일 텐데 <사이보그가 되다>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과학기술과 결합한 인간의 경험과 정체성, 과학기술이 장애인과 어떻게 연결되고 결합해야 하는지를 논하는 책이다.
다만 우리는 과학기술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살아가고, (...) 인간인지 아닌지를 매일 아침 고민하지는 않지만 ‘온전한 인간‘인지 아닌지, ‘동등한 인간‘인지 아닌지를 고민한 시간은 제법 길었다. 그렇기에 이 책에서 우리는 사이보그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의 경험과 자기 정체성을 반추해보면서, 장애에 관한 주된 과학기술 담론이 얼마간 어떤 존재들을 더 소외시키거나 그저 소비한다는 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자 했다.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포함해 불완전하고 취약하다고 여겨지는 존재들의 연대와 의존을 모색하는 미래의 과학기술은 무엇일지, 그 기술은 누구의 주도로, 누구를 위해서 개발되고 보급되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해보았다. (11-12)
사이보그라는 상징은 현실과 동떨어진 SF 이미지일 뿐이며 장애인은 자신과 확실하게 변별되는 타자라고 인식 혹은 오해에 대해 김초엽이 쓴 이 구절을 제시하고 싶다. ˝그 미래는 언젠가 노화하고 취약해지고 병들고 의존하게 될 모든 사람이 마주할 미래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어떤 시기에는 정상성의 범주에서 밀려난 존재가 된다. 단지 그것을 상상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그래서 나는 장애인 사이보그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기술과 취약함, 기술과 의존, 기술과 소외를 살피는 것이 결국 모든 이들의 문제이기도 하다고 말하고 싶다. 독립적이고 유능한 이상적 인간과 달리, 현실의 우리는 누구도 취약함에서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40)
이렇게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학이란 인식론적 무기를 통해 기술과 인간의 관계에서 파생된 문제들을 예리하게 묘파하여 ‘모든 이들의 문제‘로 문제의식의 지평을 확장하면서도 현실에서 소외되고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이란 사회적 소수자가 어떻게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궁구한다.
현실에서 기계와 결합한 존재란 아이언 맨 슈트를 입고 하늘을 날거나 온갖 화려한 차종으로 변신하는 모빌리티를 타는 존재가 아니라, 낡은 철제 수동 휠체어를 탄 이들, 오래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배터리가 방전될까 걱정하는 이들, 3일에 한 번씩 신장 투석기에 접속하고 4시간씩 혈액의 노페물을 걸러주느라 스케줄 조정에 곤란을 겪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사이보그가 되어서‘ 스스로를 온전한 존재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언젠가 도래할 첨단의 기계와 결합하거나 기계 없이도 ‘정상적인 몸‘이 될 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일상에서 사용하는 기계들과 더 안전하고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 ˝나는 휠체어만 탔을 뿐(탔음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똑같은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대신, ˝나는 휠체어를 탔고 그 점에서 당신과 같지 않지만, 우리는 동등하다˝라고 말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63)
다시 이동권 투쟁을 하고 있는,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서 인정받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현장으로 되돌아가본다. 이는 10여 년 전, 장애 정의를 사유할 수 없었던 ‘장애맹‘의 독자가 언어를 갖지 못해 투쟁의 현실로부터 소외되고, 차별의 언어에 대항하지 못해 위축되었던 장소이자 현재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분명한 장소(104-105)‘이다. 이 현장에서 투쟁하고 있는 이들이 올리는 포스팅을 지켜보며, 장애권리운동의 현장을 보도하는 뉴스를 보며 저렇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걸 택하겠다는 발언을 들으며 내가 서 있는 자리를 발로 밟아본다. 어디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이 땅의 지반은 무엇을 근거로 하고 있는 대지인지를 자문해본다. 무능의 낙인을 가슴 깊이 두려워 효능감과 성과에 몰입하게 되는 세상에서 내 능력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지, ‘나‘라는 독자적인 개체 단위(허구적 상상에 가깝기도 한)에 귀속되지 않는, 그러니까 언제나 관계망에서만 발현되는 능력으로 어디를 연결하고 누구/무엇과 연립할지 생각해본다.
장애인 인권운동가 김도현은 장애인운동의 목표란 자립이 아니라 연립을 기본적인 삶의 조건으로서 지향하는 것이라면서, 이때 자기결정권(자율성)이란 ˝여러 주체들이 상호 의존적 관계 속에서 서로의 의견과 판단을 소통하고 조율해가며 실현할 수밖에 없는 권리˝임을 강조한다. 나는 연립이라는 삶의 조건을, 지금 여기를 사는 사람들의 협력과 연대, 연결을 넘어 언제 등장할지 모르는 ‘타자‘와도 잇닿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자는 나를 돕는 활동지원사이고, 안내견이고, 휠체어이며, 보청기이고, 오토박스이고, 청테이프이고, 친구들이며, 관객이고, 독자들이다.
(...) 도무지 생각지 못했던 어떤 세계과 정체성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이 ‘타자‘들은 확고하다고 믿었던 지식과 기술, 사상, 정치적 신념과 지혜의 매끄러운 질서에 오류로서 등장한다. 돌봄의 공동체는 그런 오류를 배제하고, 몰아세우고, 깔끔히 치료하고 쓸어버리는 대신 오류가 열어둔 이음새 사이에서 새로운 탐사를 시작한다. 타자를 돕고, 타자로서 돕고, 타자를 돕는 일을 도우며, 미래-타자의 출현에 열린 지식과 기술은 어떤 얼굴일까.(304-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