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작아진 세상과 관련된 새로운 경험에서 긴밀한 역할을 하는 것은 ‘트리스테 포스트 이테룸(Triste post iterum)’, 여행이 끝난 뒤의 슬픔, 그러니까 우리가 먼 길을 떠나 강렬한 체험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올 때 맛보는 슬픔이다. 여행이 특권이나 저주였던 시절에서 진일보하여 일종의 짜릿한 모험으로 여겨지는 오늘날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결코 도달하지 못했을 경계선에 이르렀다고, 아니면 과거에는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체험을 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막상 여행 가방을 현관에 내려놓는 순간,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이게 다인가? 바로 이것이었나? 내가 바란 게 이것이었을까?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2

또한 우리는 지구상 거의 모든 거주민이 여섯 명 건너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며(예컨대 나는 누군가를 아는데 그 누군가는 또 누군가를 알고, 또 그 누군가는 다른 또 누군가를 아는데 그 다른 또 누군가는 X를 아는 식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약 70세대가 탄생되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5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우리가 오감으로 느끼는 세상은 작아졌다. 한편으로 우주에서 인간이 촬영한 사진 속 지구의 풍경은 숨 막힐 만큼 아찔하고 감동적이다. 심연 속에 매달려 있는 조그만 청록빛 구체.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행성으로서의 우리 위치를 유한하고 한정적인 것으로, 그리고 부서지기 쉽고 파괴되기 쉬운 것으로 보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6

세계의 축소 및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네트워크의 연결과 보편화된 원격 감시 체계에 의해 더욱 강렬해진다. 그렇다, 우리는 이미 파놉티콘5)에 갇혀 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노출되고, 관찰되고, 분석된다.
유한하다는 느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것을 하찮게 여기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대상들만이 그 놀라운 미지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우리의 관심과 열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7

오늘날 누군가가 무한성과 교감하고 싶다면 네트워크에 접속하면 된다. ‘세상이 너무 크고 많다.’라는 압도적인 느낌은 우리에게 일종의 자제력과 포기를 가르쳐 준다. — 나는 그저 나의 길을 갈 뿐이다.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온갖 호기심의 대상들을 무시하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불타는 소돔에서 탈출 중인 롯과 같은 처지이지만 호기심 많은 그의 아내와 달리 절대 뒤돌아보지 않을 굳건한 의지가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오늘날 모니터 앞에서 마비라도 된 것처럼 꼼짝도 못 하는 네티즌의 습관을 가리켜 ‘롯의 아내 증후군’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이것은 거의 ‘긴장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증후군은 특히 팬데믹 시기에 경고를 무시한 채,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거기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백만의 십 대 청소년들과 인셀6)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정보를 검색하다 보면 나는 종종 거대한 데이터의 바닷속을 유영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런데 그 데이터들은 이미 스스로 형성되고 스스로 논평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정보 검색 활동을 ‘서핑’이라는 동사로 맨 처음 표현한 사람은 천재임에 틀림없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8

결국 파동은 나름의 방식에 의해 존재를 불가사의한 무력감으로 인도하며 ‘운명’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우리의 망각으로부터 끄집어낸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운명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타인에게 의존하는 네트워크로서의 운명, 생물학적 의미뿐 아니라 문화적 의미에서 전승되는 행동 패턴으로서의 운명이다. 그 결과 우리 정체성에 관한 활발하고도 발전적인 토론이 벌어지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무한성은 ‘호모 콘수멘스(homo consumens)’, 즉 ‘소비하는 인간’의 세계로 침투하기 시작했는데 그 세계는 『천일야화』 속의 ‘참깨’를 연상시켰다. 우리는 "열려라, 참깨!"라고 외쳤고, 주문은 이루어졌다! 문이 열렸고, 각종 서비스와 다양한 상품, 다채로운 패턴과 디자인, 품종, 변형, 유행, 패션, 트렌드가 난무하면서 우리를 압도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무한성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재생산하며 확산되고 있지만 우리 인간에게 그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느낌을 제공하기 위해 취약하고 보잘것없는 검색 엔진 도구를 전면에 내세웠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나와 같은 세대는 그러한 엔진을 다루는 데 특히 문제가 많다. 결핍과 부족의 시대에 성장했으므로 우리 중 대다수는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혹은 ‘인플레이션에 대처하려고’ 뭔가를 자꾸 비축해 두려는 본능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내 남편은 신문을 계속 모으고 스크랩하면서, 동시에 노아의 사명감으로 종이책을 보관하기 위해 서재의 책꽂이를 만든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유기체 간의 공생과 상호 연결이 진화와 종의 탄생을 촉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린 마굴리스8)의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현대의 다양한 연구 결과에 이르기까지 생물학과 의학이 이루어 낸 발견 덕분에 우리 인간은 개별적 존재가 아닌 집단적 존재이며, 단일체가 아니라 다양한 유기체의 공화국, 즉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일종의 군주제와 같은 구조를 가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당신의 몸은 당신만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인간의 몸에서 인간 세포는 43퍼센트에 불과하다." 대중적인 언론 매체의 헤드라인에 실렸던 이 문장은 아마도 수많은 사람에게 불안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아무리 자주 몸을 씻는다 해도 우리 몸은 박테리아나 곰팡이, 바이러스, 고세균9) 같은 ‘이웃들’의 무리로 뒤덮여 있다. 그중 대부분은 우리 내장 속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서식한다. 현재 창궐하는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은 공포 영화 속에서나 등장할 법한 끔찍한 이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덕분에 우리는 인간 몸속에서 대량의 바이러스가 공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3

‘존재 속에 내던져진’ 단일 개체, 모나드10)적인 인간, ‘창조의 왕관’을 쓴 채 동물과 식물의 왕국에서 군림하듯 우뚝 서 있는 모습. 우리의 상상력,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우리 자신의 인식을 지배하는 대표적인 인간의 이미지는 바로 이것이었다. 거울을 보면서 우리는 세상과 동떨어진 고독하면서도 비극적인 존재, 자아 성찰에 능하고 생각할 줄 아는 정복자의 모습을 찾곤 했다. 그럴 때 거울 속에는 백인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고, 우리는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인간’이라는 단어가 자랑스럽게 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날 나는 이 멋진 호모 사피엔스가 내 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단지 43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머지는 항생제나 살충제로 얼마든지 손쉽게 죽일 수 있었던 하찮은 피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4

자신의 복합성과 다른 생물들에 대한 의존성을 깨닫고, 나아가 스스로가 생물학적으로 ‘다(多)생물체’임을 인식하게 되면서 우리는 유기론적 관점에 근거해 우리 사고에 ‘무리’, ‘공생’, ‘협력’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4

우리는 더 이상 ‘비온트(biont, 생리적 개체)’가 아니라 ‘홀로비온트(holobiont)’,13) 즉 전 생명체다. 다시 말해 서로 공생하는 다양한 유기체의 결합물인 것이다. 복합성, 다중성, 다양성, 상호 작용, 메타 공생 — 이러한 키워드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5

복합성에 기반한 이 새로운 관점은 세상을 계층에 따라 정렬된 통합체로 보지 않고, 그 안에 내포된 다중성과 다양성, 그리고 느슨한 유기적 네트워크 구조에 주목한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관점 덕분에 우리가 처음으로 자신을 복합적이면서 각양각색인 유기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생리적 개체나 미생물총14)의 존재에 눈을 뜨기 시작했으며, 그것들이 우리 육체와 정신, 나아가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총체적 결합물에 놀라울 정도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6

2020년, 이상하기 짝이 없는 여름을 지내고 있는 오늘, 우리는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전혀 모르고 있다. 전문가들조차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그들은 난기류 때문에 더 이상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고 변명하는 기상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0

플라마리옹의 목각화는 카이로스(kairos)적인 순간을 보여 주고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카이로스가 다가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메타노이아(metanoia), 즉 기나긴 과정이 아니라 순간의 결정이 만들어 내는 중대한 전환점을 놓치게 된다. 그리스의 전통에 따르면 시간을 정의하는 건 ‘크로노스’로 알려진 거대한 단선적 흐름이 아니라 카이로스다. 그것은 특별한 시간, 모든 것을 바꾸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미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나에게 카이로스는 기벽의 신, 즉 괴상함의 신이다. 여기서 ‘괴상함’이란 ‘중심적’ 관점을 과감히 포기하는 탈중심주의, 익숙한 사고방식이나 뻔한 행동 반경을 벗어나려는 경향, 고질적인 의식이나 사고방식, 안정적인 세계관에 부합하는 공동체적 관습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5

내게 문학이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직조하는 끊임없는 과정이다. 상호 간의 영향과 연결이라는 통합적 관점으로 세상을 조망하는 에너지가 문학만큼 강력한 장르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능한 한 폭넓게 이해된다는 점에서 문학은 본질적으로 ‘네트워크’와 유사하다. 네트워크 덕분에 하나의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개체 사이에 광범위한 교감과 연결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학은 정교하고 특별한 인간의 소통 수단이며, 그 수단은 명확하면서 동시에 총체적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8

하지만 좀 더 넓은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타인의 시각, 그리고 개인의 고유한 정신을 통해 여과된 세계관을 이해하게 해 주는 ‘참깨’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구비 문학을 필두로 문학은 아이디어를 만들고, 관점을 설정하며,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 정신에 깊숙이 스며들어 그 형태를 완성한다. 문학은 철학의 모체이기도 하다.(플라톤의 『향연』이 뛰어난 문학 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문학으로부터 철학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8

‘인류세’21)라는 용어가 통용되기 시작한 건 이제 겨우 삼십 년 남짓이지만 이 용어 덕분에 우리는 우리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두 개의 그리스어 단어인 ‘안트로포스(ánthropōs, 사람)’와 ‘카이노스(kainós, 새로운)’가 결합한 이 단어는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연과 환경의 기능에 인간이 얼마나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지를 드러낸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9

오그노즈야(폴란드어 ognozja, 영어 ognosia, 프랑스어 ognosie)는 내러티브 지향적인 초현실적 인지 과정으로 대상과 상태, 현상을 반영하며, 그것들을 보다 고차원적인 상호 의존적 의미로 배열하려는 시도.[참조]→ 충만함. 전체성. [구어]내러티브 자체는 물론이고 그 일부나 세부 항목에서도 질서를 발견하여 종합적인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능력을 말한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0

‘서양인의 여행’이라는 19세기 패러다임은 현대 사회의 관광업에 의해 산업화되고 대중화되었다. 오늘날 필리어스 포그25)와 인디아나 존스의 계승자들은 십이 일 동안 대형 버스로 멕시코를 둘러보다 흉물스러운 호텔과 외딴 해수욕장이 즐비한, 지금껏 내가 본 가장 혐오스러운 장소인 칸쿤에서 여정을 끝마치는 여행자들이다. 아니면 터키의 ‘올인클루시브(all-inclusive)’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며 거기서 불과 수백 미터 떨어진 바닷가에 난민의 시체가 던져지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는 휴양객들이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부터 나는 ‘사인칭 서술자’의 입장에서 나 자신과 나의 글을 들여다보는 방식을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종류의 자아 성찰은 심리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심리학은 여전히 내게 친숙한 학문 분야이며, 내가 세상을 해독할 때 사용하는 첫 번째 언어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에 수록된 텍스트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5

이 글을 시작하며 나는 프랑스의 천문학자 카미유 플라마리옹이 1888년 출간한 책에 수록된 유명한 목각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다. 이 작품은 세상의 경계선에 다다른 한 방랑자가 지구의 영역 밖으로 머리를 내민 채 너무나도 조화로운 우주의 질서를 바라보며 감탄을 금치 못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어릴 때부터 나는 매번 내 앞에 새로운 의미를 펼쳐 보이는 이 놀랍도록 은유적인 이미지에 경탄하곤 했다. 이 이미지는 지금껏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인간의 모습, 즉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스케치한 「비트루비안 맨」1)에 등장하는 정지 상태의 의기양양한 인간,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었다.

-알라딘 eBook <다정한 서술자>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말은 결혼은 제도로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 제도의 유지를 위해 사랑은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결혼은 사랑이 전혀 관여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밖에 관여하지 않는 분야이다. 전혀 다른 층위에 있는 둘을 섞어 인과관계로 연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4

그의 아버지는 그가 중학생일 때 집을 나갔다. 아버지가 집을 떠나던 날의 기억이 파편적인 이미지들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굳은 얼굴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 하지만 잘되지 않아서 아버지의 얼굴은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무슨 말인가가 담긴 눈으로 아버지는 그를 오래 쳐다보았다. 아버지가 그의 손을 쥐었을 때 파르르 떨리는 느낌이 전해졌다. 떨고 있는 손이 아버지의 것인지 자기 것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떨어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처럼 자기가 떨어야 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으므로 그는 그 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 그는 불편함을 털어내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고, 그래도 불편이 털어내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살그머니 손을 빼냈다. 아버지는 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떨어질 수 있었다. "지금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한참 만에 나온 아버지의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니면 그랬던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지 모른다. "언젠가 아버지를 이해하는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 말을 남기고 트렁크를 끌고 가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남아 있다. 아버지는 매우 빠른 걸음으로 대문을 빠져나갔다. 흡사 달아나는 것 같았다고 그의 기억은 말한다. 그런데도 어쩐 일인지 그 모습에 쓸쓸함이 여운처럼 남아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달아나는 사람의 쓸쓸함이라니.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9

이 모순의 문장은 기억에 스며 있는 욕망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한 남자가 트렁크를 들고 대문을 나섰다. 이것이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의 내용이다. ‘달아나는 것 같았다’와 ‘쓸쓸함’은 그 이미지에 덧붙여진 것이다. 그것들은 행위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목격한 자, 더 나아가 그것을 진술하는 자의 심상에 새겨진 인상이다. 기억하는 자의 욕망이 행위자의 행위를 해석하고 있다. 말하자면 형배의 기억은 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은 마음과 이해하지 않으려는 마음 사이에서 타협의 곡예를 벌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79

사랑은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강요하지 않는데도 강요받는 것이다. 강요하는 이는 없고 강요받는 이만 있다. 사랑한다는 말은 발화(發話)된다. 누구도 사랑한다는 말을 발화할 수는 없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93

그가 그 말을 할 때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조교가 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녀가 쿡 소리를 내며 웃기 전에 준호는 이미 그녀를 보았다. 그 방에 들어서는 순간 소박하고 은은한 향기를 맡았는데, 그것이 그 방의 주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파악했었다. 실제로 그 방에 그런 향의 꽃이 놓여 있거나 그런 향의 향수가 뿌려져 있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그녀의 용모를 소박하고 은은한 향기로 파악했다고 하는 편이 아마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방에는 꽃이 없었고, 나중에 확인한 것이지만, 그녀는 어떤 향수도 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가 내뿜는 향기에 끌렸다는 것이 이 상황에 맞는 진술이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09

선택은 언제나 배제를 전제한다. 배제를 통하지 않고 선택하는 건 불가능하다. 선택이 곧 배제의 방법이다. 배제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은 아니지만 선택하기 위해서는 배제가 불가피하다. - <사랑의 생애>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5648740 - P11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상의 공간, 혹은 의미와 지시의 공간이 시적 공간이 되는 순간은 일상의 공간, 의미의 공간이 옷을 입기 시작하는 순간일 것입니다. 시가 일어서게 될 때 거기 이미지와 일상의 공간 사이에는 묘한 변화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이미지에 날개가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살이 부풀기 시작한다고나 할는지. 날개가 달린 부푼 이미지는 달리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와 내가 서 있는 공간 사이에서 ‘틈’은 커지고 나의 언어도 날개를 달기 시작합니다. 날개가 달린 이미지는 공간 밖으로, 또는 나의 아주 깊은 곳, 심연을 향하여 날기 시작합니다. 이미지의 공간과 ‘틈’의 공간이 동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33

나는 ‘비알’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언제나처럼 부질없이 사라지기 위하여, 또는 스밀 수 있는 한 무엇엔가 스미기 위하여 이곳에 도착하는 것을 망연히 바라보지 않을 수 없다. 마치 소리 없는 어느 곳의 죽음처럼, 지금도 수없이 이루어지고 있을 지구 위의 사랑의 무저항의 종말처럼, 뜻 없이 뜻 없이 창에 맺히는 비알들, 얌전한 살갗들마다 소름이 돋아 오르게 하고 그 축축한 냄새로 기억을 흐리게 하는 비알들.

한 방울의 ‘비알’은 우주이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46

이상한 모자 가게였다. 마땅한 계단도 없는, 마땅한 길도 없는, 물론 문도 없는, 겨우 찾아낸, 한구석에 박혀 있는 엘리베이터는 너무 낡아서 덜컹덜컹거리던, 그러나 어느 순간, 프랑스풍의 귀족적인 비로드 장식의 모자들이 불쑥 나서서 나를 막아서던, 리얼–모더니즘의 가게, 시도 그렇지, 리얼–모더니즘이지.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5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벽 속의 편지─ 눈을 맞으며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57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기역 자로 꿇고, 가장자리에 검붉은 피 칠을 한, 널브러져 있는 자장면 그릇들(검붉은 자장면이 남아 있기도 하고 먹다가 만 듯 휘저어져 있어 자장면이 부은 것 같기도 한)을 은빛 통에 담는 남자의 구부정한 모습, 그는 이 시대의 성자가 분명하다, 무릎을 어떤 수도사들보다 진지하게 꿇고 있다, 게다가 곤색 잠바를 수도복처럼 수그리고 있고, 그 위로 수도의 눈물처럼 방울방울 빗방울이 굴러 내리고 있다. 그는 기도하고 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71

시를 읽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비밀에 나의 비밀을 기대게 하는 일입니다.
그 비밀은 읽는 이와 쓰는 이를 연결시켜 주며, 그 순간 한 편의 시는 완성되는 것입니다.
당신의 비밀이 나의 비밀에 어깨를 기대기 전에는 나의 시는 보석이 되기 전의 원석, 즉 빛날 줄 모르는 돌에 불과했습니다.
당신이 읽음으로써 나의 언어는 비로소 빛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183

등갓이 없는 불구不具의 등불은, 알몸으로 비추려 드는 알전구는 슬프다. 빛은 알몸이 아니어야 한다. 빛은 많은 덮개를 거느려야 한다. 덮개를 많이 거느릴수록, 깊이깊이 숨어 있을수록, 그래서 그 어둠의 덮개를 뚫고 빛의 살肉이 삐져나올수록 그곳에 지어진 집은 너의 눈을 간절함으로 가득 차게 할 것이다. 우윳빛 등불이 켜지는 순간, 네 가슴뼈에는 행복의 눈물이 가득 드리워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덧문을 닫는 순간, 무지개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 드리워졌다가 사라지듯 그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질수록, 사라졌으나 모든 마음에 희뿌연 빛의 베일을 던지며 남아 있을수록, 그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눈부시리라.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4

나는 그립고 그리운 동네의 한 귀퉁이입니다, 희망에 찬, 어머니의 갈색 장롱이고, 희망에 찬, 아버지의 그림자빛 시계이고, 또는 희망에 찬, 할머니의 무지갯빛 망사 커튼입니다, 십일월 바람에 떨며 서 있습니다, 가슴에 솟은 단풍나무 한 그루 숨 여닫는, 영원토록 변방인 또는 영원토록 구원인, 희망인 그 또는 나를 맞는,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8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절단이다. 사유의 절단, 시간의 절단, 또는 사유의 절단과 그 변주, 시간의 절단과 그 변주.

쓰는 시간, 그것은 끊임없는 절단의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한 다음 통합하는 시간 속에 놓여 있다.
절단의 시간은 아름답다. 절단의 시간은 눈부시다. 통합을 꿈꾸는 절단의 시간은 찬란하다.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09

저녁이 스러지고 밤이 온다. 어둠은 모든 비어 있는 곳에서 흘러나와 다른 비어 있는 곳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가만히 있는 공기를 휘젓고, 머리카락을 더욱 검게 물들이고, 곳곳에 침묵의 병정을 풀어 놓으면서, 어둠은 스미지 않는 곳이 없다. ……모든 것을 자기의 무량한 날개로 덮고, 눈뜨고 있는 것들의 눈초리를 쓰다듬는다. 소리 나는 것들을 잠시 소리 나지 않게 하면서.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4

묶는 자와 묶이는 자, 무명無名·無明 시인이여, 너는 늘 묶는 자가 되려고만 하는가. 묶는 자여야만 한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시를 쓰려는 자는 묶이는 자여야 한다, 속박하는 자가 아니라, 속박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필연의 시선을 유예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말라. 벗어나는 자가 아니라, 벗어나지 못하는 자가 무명 시인인 것을. 그리하여 시인 중의 시인이 무명 시인인 것을.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19

현재적 상상력은 끝없는 미래이다. 끝없는 현재의 미래이다. 또는 미래의 지연遲延…….

그렇다. 모든 미래는 늘 현재 속에 숨어 있다.

눈물 한 방울은 눈물 두 방울이다.
일 그램의 눈물은 천 그램, 만 그램 눈물의 총량.

-알라딘 eBook <꽃을 끌고> (강은교 지음) 중에서 - P2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