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안주머니에서 은제 담뱃갑을 꺼냈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사이 담뱃갑에는 군데군데 더러움이 생겼고 섬세하게 조각된 부분도 알아보기 힘들어졌다. 하지만 — 그는 점화를 위해 파인 홈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 이건 아직 여기에 있었다. 시간은 모든 감정의 진폭을 납작하게 눌러버리기 마련이지만, 그럼에도 진짜로 존재하는 무엇인가를 지울 수는 없었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335
한철에게 든 첫 번째 충동은 이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는 것이었지만, 슬픔의 광채로 빛나는 옥희의 표정이 그를 멈칫하게 했다. 옥희의 얼굴은 너무도 여위었고, 땀방울로 반짝이는 상아색 피부는 뼈에 거의 달라붙어 있는 듯했다. 전에 없던 초췌함이 엿보이는 외모와, 여전히 긍지 높게 턱을 치켜들 때마다 그 섬세한 목을 가로질러 수평선을 그리는 주름들이 한철의 눈에 들어왔다. 만약 이 순간 옥희의 모습을 묘사해야 한다면 한철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마치 어머니가 불러주곤 하던 정답고 그리운 옛 노래 같다고. 혹은 서랍 뒤쪽에서 아직 뜯지 않은 채로 발견된, 오래전에 사랑했던 사람이 보내준 편지 같다고. 아니면 어느 봄날 갑자기 되살아난 고목 — 검게 죽어 있던 가지들이 만개한 꽃들로 가득해져, 꽃잎 한 장마다 전부 나, 나, 나라고 외치며 타오르는 한 그루 나무 같다고. 하지만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저 지나간 시절과 추억의 잔해만이 아니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것,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것은 대체 무얼까? 그것은 뭔가 신비롭고, 옥희의 진정한 모습에 더 가까운 것이었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441
마침내 계단이 끝나 언덕 꼭대기에 이른 정호는 은빛 하늘로 치솟은 벽돌 건물을 마주하고 섰다. 그는 저 멀리 펼쳐진 눈 덮인 산들, 계단 아래 장난감처럼 조그맣게 들어선 동네들, 생기라곤 없어 보이는 겨울의 채소 텃밭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처럼 하늘에 가까이 닿아 있으면 모든 것이 그저 평화롭게만 보인다고, 정호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성당의 양 옆문 근처로 떠들썩하고 부산스럽게 몰려들었다. 아무런 사전 주의도 없이, 그들은 신부를 위해 암묵적으로 중앙 정문을 비워둔 것이다. 정호는 마지막으로 신선한 바깥 공기를 훅 들이쉰 다음 사람들 무리 뒤로 줄을 섰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376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며, 대다수는 그중 첫 번째 범주에 속한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자신이 현재의 상태에서 성공을 향해 더 나아갈 수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 그러고 나면 자신의 삶에 주어진 운명을 합리화하고 그 자리에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이것을 깨닫는 시점은 놀랍도록 일러서, 대체로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도달한다. 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 또한 서른에서 마흔 살 사이에는 같은 결론에 이른다. 일부 사람들은 출생 환경이나 그 자신의 야망, 그리고 재능에 힘입어 대략 쉰 전후에 비슷한 깨달음을 얻는데, 그 정도 나이에 이르면 이러한 소강도 그렇게 끔찍해 보이지 않는 법이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361
그 순간 신부를 바라보지 않는 이는 딱 한 사람, 오직 정호뿐이었다. 그는 자신과 바싹 붙어 앉은 옥희의 이마가 그리는 곡선을, 그리고 그의 검은 눈, 슬픔과 기쁨이 똑같은 깊이로 차올라 반짝이는 저 두 개의 우물을 자신의 영원한 기억에 새겨 넣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옥희의 스웨터에 감싸인 채 나란히 솟은 한 쌍의 가느다란 어깨뼈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보니 저 옷 안에 감춰진 맨살까지 그려지는 듯했다. 만일 장의자 등받이를 따라 팔을 뻗어 옥희의 아름다운 등을 감싸 안는다면, 그의 심장은 이 자리에서 바로 멈추고 말리라.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380
모두가 꿈을 꾸지만, 그중 몽상가는 일부에 불과하다. 몽상가가 아닌 다수의 사람들은 그냥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본다. 소수의 몽상가들은 그들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 달, 강, 기차역, 빗소리, 따스한 죽 한 그릇처럼 평범하고 소박한 것들도, 몽상가들은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무엇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세상은 사진이라기보단 유화여서,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가장 바깥쪽에 있는 색깔만을 바라볼 때 이들은 영원히 그 아래 감춰진 색깔을 바라본다. 몽상가가 아닌 사람이 유리를 통해 보는 풍경을, 몽상가들은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셈이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387
옥희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손을 맞잡은 정호의 손은 뜨겁고 축축했다. 자신이 한철의 손을 잡고 있다고 상상해 보려 했지만, 그 두 남자의 손에 공통점이라곤 전혀 없었다. 길게 뻗은 튼튼한 손가락들을 가진 한철의 손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그 손등 아래 도드라져 보이는 청록색 핏줄마저도 옥희는 깊이 사랑했다. 하지만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촉감의 측면에서도 그들의 두 손은 완전히 달랐다. 나이 든 기생들은 남자란 일단 촛불을 끄고 나면 구분할 수 없이 다 똑같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러나 사실 남자들의 표정을 들여다보거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멈추고 단순히 그들의 감촉이 어떻게 느껴지는지에 집중하다 보면, 그들 사이의 차이점은 훨씬 더 예리하게 느껴졌다. 만일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저 우정의 가장 짙은 색채일 뿐이요, 너무 짙은 나머지 다른 빛깔로 보일 정도지만 사실은 충실함이라는 감정과도 같은 색상표 안에 있는 것이라면, 그러면 옥희도 정호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을 터였다. 정말 깊이, 진심으로. 하지만 결국 그런 감정들이 아예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거라면, 그는 정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었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402
정호는 적수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며 자기도취의 평정심을 잃어버리는 모습을 만족스레 지켜보았다. 이 남자의 약점이 바로 이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자신이 옳은 쪽인 것처럼 보이고 싶은 욕구 말이다. 한철은 자신이 언제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며 치열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부류의 남자였다. 지금 한철의 얼굴을 가득 뒤덮은 비통과 애수의 표정도 결국은 제 자존심을 보호하는 방법에 불과하다는 걸 정호는 잘 알고 있었다. 한철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복수는 다름 아닌 그의 자만심을 뒤흔드는 것이었고, 그건 단순한 주먹질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412
정호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느라 일생을 헛되이 바쳤다는 사실을 마침내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옷을 주워 입었다. 그의 얼굴은 증오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렇게 옥희의 방문을 열고 나가기 직전에, 그가 홱 돌아섰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422
날카로운 단음절로 이어지는 그 무서운 소리는 사람이 내는 비명이라기보다 고뇌에 찬 산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잠시 그는 그렇게 엎드린 자세로 숨을 헐떡였다. 가쁜 호흡을 내쉴 때마다 등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 <작은 땅의 야수들>, 김주혜 저/박소현 역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9ccc4b99aefa406c - P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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