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런 날이었다. 전날 오후부터 불어온 곳도 불어갈 곳도 헤아리기 어려운 바람이 미친년 널뛰듯 불어젖히더니 자정 넘어 가랑비가 흩뿌리기 시작했다. 가랑비에 살금살금 젖은 바람이 비와 함께 땅으로 스며든 것인지 어느 순간 잠잠해졌다. 잠귀 밝은 개들의 잠조차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한 고요한 비였다. 공기 중으로 스며든 습기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의 불안을 토닥여 그 밤, 모든 것들의 잠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달았다. 그 밤, 하늘과 땅 사이도 비에 씻겨 말 그대로 허공(虛空)이었다.

-알라딘 eBook <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4

동이 틀 무렵 오는 듯 마는 듯, 그러나 건조한 가을 대지를 적시기에는 충분했던 가랑비가 소리 없이 왔듯 소리 없이 사라졌다. 말간 하늘에 태양이 떠올랐다. 더러운 것이 씻겨나간 청정한 대기를 뚫고 햇살은 거칠 것 없이 지상으로 내려앉았다. 유난히 청명하고 유난히 상쾌한 아침이었다. 더 좋을 수 없이 좋았던 그날 아침,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알라딘 eBook <찌니주의보> (정지아 지음) 중에서 - 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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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유령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다. 내향인이라는 유령이. 지금까지 이 세계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그 세력이 누구냐고? 극우 언론, 자본가, 지주, 유력 정치인, 인플루언서 들이다. 이들은 각각 이 세상, 이 모양, 이 꼴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에게 이 모든 책임을 오롯이 돌린다는 말인가. 책임은 그들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자본도 아니고, 정치권력도 아니고, 무력도 아니고, 외모도 아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외향인이라는 사실이다. 내향인이라는 유령이 이 세계를 배회하고 있고, 외향인이 이 유령을 사냥하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알라딘 eBook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중에서 - P62

그렇다면 ‘찐’ 내향인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의 말을 들으면 기도하는 느낌이 든다? 그는 내향인이다. 삶의 경멸과 죽음의 두려움 사이에서 간신히 살아가는 것 같다? 그는 내향인이다. 더 이상 살아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그는 내향인이다. 마치 삶이 비상시인 것처럼 엘리베이터 대신 비상계단으로 종종 다닌다? 그는 내향인이다. 나대거나 우기는 것을 싫어한다? 그는 내향인이다. 멍청한 것까지는 양해하는데 큰 소리로 우겨대거나 나대는 이들을 못 참는다? 그는 내향인이다.

-알라딘 eBook <인생의 단맛을 보여주마> (김영민 지음) 중에서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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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slept in what had once been the gymnasium. The floor was of varnished wood, with stripes and circles painted on it, for the games that were formerly played there; the hoops for the basketball nets were still in place, though the nets were gone. A balcony ran around the room, for the spectators, and I thought I could smell, faintly like an afterimage, the pungent scent of sweat, shot through with the sweet taint of chewing gum and perfume from the watching girls, felt-skirted as I knew from pictures, later in miniskirts, then pants, then in one earring, spiky green-streaked hair. Dances would have been held there; the music lingered, a palimpsest of unheard sound, style upon style, an undercurrent of drums, a forlorn wail, garlands made of tissue-paper flowers, cardboard devils, a revolving ball of mirrors, powdering the dancers with a snow of light. -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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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텔란은 이렇게 말했다.
"웃음과 유머는 무의식과 직접 만나고, 상상력을 자극하며, 본능적인 반응을 터뜨리는 폭력 없는 트로이 목마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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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더스의 작품은 기대하게 만든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모든 것은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그의 작품은 과거를 중심으로 미래까지 뻗어나간다. 예술의 역사를 보여주는 트롱프뢰유Trompe l’oeil(실물이라 착각할 정도의 눈속임을 활용한 작품 — 역주)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75

후안 무뇨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무관심하게 지나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의 이야기를 붙잡아 그 평범함의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그는 공간에 잘 어우러지는 재료, 그러니까 묘사된 대상을 중립적으로 보이게끔 하는 재료를 선정했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78

금속의 기하학적 패턴을 결정 구조라고 한다. 우리 화학자들은 결정이라는 단어를 배열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한다. 어떤 금속의 원자가 항상 같은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다면 그러한 3차원 배열을 결정 구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79

파티나는 청동이 부식된 후 표면에 형성되는 구리염copper salt의 얇은 층이다. 모든 금속이 자연 상태, 그러니까 자신이 추출되었던 광물 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에서 비롯된다. 형성되는 염화구리copper chloride에 따라 파티나는 안정적일 수도 불안정할 수도 있다. 안정적인 파티나는 청동 고유의 성질을 보호하며, 불안정한 파티나는 그 성질을 파괴한다. 공기, 토양 및 바다의 불순물은 청동에 서서히 작용해 일반적으로 안정된 파티나를 형성한다. 안정적인 파티나는 보통 표면에만 생겨 청동 내부가 부식되는 것을 막는다. 이런 이유로, 동전과 조각품의 파티나는 제거해서는 안 된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81

후안 무뇨스는 청동에 파티나를 입혀 돌처럼 보이게 했고, 수지에 갈색과 회색 안료와 섞어 점토 같은 질감을 표현했다. 마크 맨더스 역시 청동 작품인 〈소성하지 않은 점토 토르소〉를 점토처럼 보이는 안료를 입혔다. 두 작가는 모두 청동이라는 귀한 재료 위에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의 옷을 입히는 방식으로 조각의 개념을 흔들었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83

모든 재료는 서로 다른 기하학적 배열로 연결된 원자들의 우주가 있다. 화학자들은 그 우주를 설명하고, 장인들은 그 우주를 활용하며, 예술가들은 그 우주를 언어로써 사용한다. ‘리틱’ 컬렉션은 바로 그 지점을 형상화한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85

금은 한눈에 반짝이며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돌은 자세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그 결이 보인다. 진짜 아름다움은 그것을 알고, 유심히 보아야 비로소 온전히 느낄 수 있다.

-알라딘 eBook <일상의 모든 순간이 화학으로 빛난다면> (데보라 가르시아 베요 지음, 강민지 옮김) 중에서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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