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우리가 삶이라는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며 살아가고, 고프먼의 말대로 우리의 자아가 목격자의 해석으로 평가되는 ‘연출된 자아’라면, 우리 모두는 일정량의 허영심을 필요로 한다. 허영심은 우리를 보기 좋게 치장하는 것이자 나 스스로를 대우하는 하나의 도구인 셈이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32
그 일 이후, 나는 아무것에도, 그 아무것에도 마음을 주지 못했지요. 어떤 직업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서 결국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을 하는 내가 되었지요. 오물청소부.30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45
에두아르의 목소리다. 화들짝 놀라 얼른 문을 열었다. 그가 품 안 가득 책을 껴안고 낑낑거리며 서 있다. 얼굴에는 미소를 머금고 죽어가는 목소리로 도와달라고 한다. 가슴팍의 책들이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이다. 이 인간은 뭘 해도 어설프다. 받아든 책에서 책 곰팡이 냄새가 진동한다. 거리에 버려진 책들을 주워왔나보다. 나는 땅거지와 살고 있는 것인가?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57
빙그레 미소 짓고 말았다. 묘한 아늑함에 휩싸인다. 어릴 적 자주 가던 우리 동네 헌책방이 떠오른다. 지금은 서촌의 관광명소가 되었다는 내 어릴 적 추억의 헌책방. 책방 주인 할머니는 잘 계시려나? 에두아르의 누더기 책이 가득한 서재에서 나는 잠시 추억에 잠긴다. 그의 말대로 낡은 것에는 새것이 갖고 있지 않은 많은 것들이 있는 것 같다. 이 먼지투성이 거지 같은 서재에는 에두아르의 추억이 가득하다. 추억은 이야기를 한다. 집에 추억의 이야기가 있는 방 하나쯤 있어도 좋겠다 싶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65
글을 쓴다는 건 끝이 없는 작업인 것 같습니다. 한 문장을 쓰기 위해 한 시간을 보내고, 하나의 이미지와 한 개의 단어를 오 분 넘게 떠올리는 일. 그렇게 시간을 보내며 배가 고파지지 않는 이상 아무도 제지할 수 없고 멈추게 할 수 없는, 일상과 상관없는 것들을 생각하는 일. 이처럼 매력적인 일이 또 있을까요?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4
이 작은 회오리바람 덕분에 집안은 생기를 띱니다. 그녀에게 덜렁쇠 남편이 없었다면 그녀는 회오리바람으로 변신할 필요 없이 버려진 전쟁터에서 글을 쓰고 있었을 게 틀림없습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6
사물의 부조리를 글로 극복할 수 있다는 열망과 아름다움에 대한 처절한 저항, 행복이 손에 잡힐 듯해 희망에 부푸는 신비한 순간들, 우아한 패배와 반항을 어쩌면 이렇게 잘 묘사할 수 있을까요? 감탄했습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7
우리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 속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사무실을 오가는 당일치기 여행을 하며 책상 앞에 앉아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착각의 희생자는 아닐까요? 이런 잡다한 질문에, 프루스트는 어김없이 답해줍니다. 누군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으며 외로운 여름나절을 보내는 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한다면, 저는 조금 과장해서라도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프루스트와 함께라면 당신은 지금의 고통에서 멀어질 겁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8
바칼로레아를 치러야 했던 해, 우리는 샤를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공부했습니다. 이 책 속에는 마치 예전부터 존재해 온 손톱 모양이나 눈동자 색깔 같은 이유 없는 슬픔과 혐오가 가득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한 번의 수확을 마치면, 삶은 고통이다 이것은 잘 알려진 비밀이다 그것은 진정한 우울이다 낮은 하늘이 뚜껑처럼 무겁게 드리워 기나긴 권태 속에 신음하는 영혼을 짓누를 때… 33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9
그의 시 <시체>를 통해 이 세상 모든 죽음을 직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태양은 그 썩은 것을 마치 알맞게 익힐 셈인 양 내리쬐고 덩어리진 모든 것을 한데 모아 수백 배로 만들어 대자연에게 갚으려 한다34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79
그의 또 다른 시에서 부재하는 현실의 부드러움을 대면했습니다.
보라! 저 운하 위에서 잠자는 배들을 유랑은 그들의 타고난 기질 당신의 작은 욕망을 가득 채우려 그들은 세상 끝에서 온다35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0
제목과 달리 ‘악의 없는 섬세함’으로 가득한 《악의 꽃》은 너무 일찍 잃어버린 저의 선천적 멜랑콜리를 상기시켜 주는 작품입니다. 덕분에 저는 예술가는 되지 못했지만,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0
플로베르는 샤를의 두 번째 결혼을 다음의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립니다.
그리고 셔츠는 한결같이 갑옷처럼 가슴께가 불룩했다.37
이것이 바로 플로베르입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순수함과 어리석음, 더디게 흐르는 나날 속에서 잊히는 기쁨과 고뇌, 언제나 똑같은 일상을 아이러니하면서도 끔찍하게 표현합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1
하늘 아래에서 생생하게 벌어지는 진흙탕 같은 나날의 붕괴와 웅대하고 하찮은 사랑의 이야기. 각 페이지에 등장하는 플로베르의 풍부한 언어와 생각, 문장, 표현 방식, 단어, 세상에 있을 법하지 않은 만남의 희열, 이 모든 것을 기억해 두고 인용하고 싶은 책이 바로 《보바리 부인》입니다. 지나치게 완벽하고, 지나치게 총체적인 이 책에 집중하다 보면 기진맥진해져 배가 고파지곤 합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2
삶의 이면,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고 보내는 수많은 나날로 채워진 삶을 플로베르는 그가 가진 역량으로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플로베르와 화해한 저는 《보바리 부인》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샤를과 엠마는 서로 다른 인간상을 보여줍니다. 어떠한 열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샤를과 지나치다 못해 빗나간 열정으로 삶을 망쳐버린 엠마를 플로베르의 냉철한 언어로 읽어내리며, 삶의 형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4
여기 프루스트나 플로베르의 소설만큼이나 섬세하고 정교한 소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말하고 싶은 이 소설에는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한 삶이 있습니다. 바로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입니다. 복잡하게 뒤엉킨 미로 같은 마음을 슬픔이나 괴로움, 그 어떠한 신음도 추함도 없이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이 결혼식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지 않습니까?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4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우리가 가장 행복할 때는 바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할 때(그 설렘이란!)와 그 사랑이 ‘결정화結晶化, cristallisé’될 때가 아닐까요? 마리보의 희극에는 그런 행복이 가득합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5
행복을 거론하다가 갑작스런 반전인 듯하지만, 이번엔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에는 19세기 프랑스 노동자의 처절하게 비참한 삶이 잔혹할 만큼 생생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프루스트를 친구로 두고 보들레르의 시를 암송하며 고독한 영혼인 듯 젠체하던 저에게 ‘역겨우니 정신 차려!’라 외치며 뺨을 때리듯 다가온 작품입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6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비참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 어디에나 실존했고 여전히 실존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거장 졸라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가감 없이 들려줍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6
에른스트 윙거의 《강철 폭풍 속에서》, 1차 세계대전의 실상을 다루고 있는 이 작품은 충격적이지만 신선하게도 ‘전쟁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전쟁에 참가했던 작가 윙거는 치열한 전쟁터에서 마주친 인간성의 아름다움과 용기에 대해 말합니다. 그 속에서 단련된 영혼을 그립니다. 제게 전쟁과 인간성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생각을 제시해 준 작품이었습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8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 여인의 감정을 미묘하게 잘 분석한 작품, 헨리 제임스의 《비둘기의 날개》도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책입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8
글을 마무리하면서 ‘인생책’이라는 말을 되뇌어봅니다. ‘인생’이라는 단어는 ‘책’이라는 단어와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이란 우리네 인생과 함께하는 좋은 벗인 것 같습니다. 때론 다정하게 다독여주고 때론 따끔하게 충고하며, 어떤 때는 생각지 못한 고민을 털어놓아 당황하게 만듭니다. 책이란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그런 조금은 골치 아프지만 사랑스러운 친구입니다. 저는 그런 친구가 제법 많고 앞으로도 계속 사귀어나갈 생각입니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89
작가 이만근은 그의 담백한 에세이집 《풍경의 귓속말》에서 ‘꿈이란 돈을 예쁘게 부르는 말이 아닌가’라고 독백한다. 또 ‘돈을 잘 벌면 안 착해도 될 것 같아 부러워요’라고 덧붙이며 지금의 우리 한국인들에게 조용히 충고한다. 드디어 이 책을 통해 할말이 생겼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95
여기 주목받을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는 에두아르라는 사람이 있다. 그는 좋지 않은 머리를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사용하려 드는 고집쟁이이자, 상상을 초월하는 덜렁이 모지리이다.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뛰어난 것이라고는 ‘끊임없이 읽을 수 있는 능력’밖에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95
에두아르는 그저 앉아서 주구장창 읽으며 뭔가를 알아가는 것이 즐겁고,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며 감탄하고 동감하며 울고 웃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풍요롭게 만든다. 스스로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삶. 이보다 더 성공적인 삶이 있을까? 절대 깨지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풍요로움으로 무장한 에두아르는 진정한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 <나는 프랑스 책벌레와 결혼했다>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498059 - 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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