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코스타브라바✻의 언덕에 위치한 작은 도시였다. 그는 늦은 오후에 도착해 혼잡한 바르셀로나발 열차에서 내렸고, 택시 정류장 표지판들을 따라갔다. 출근할 때 입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그가 가진 가장 좋은 옷이었다. 그는 혼자였다.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44
스페인에는 처음 와본 것이며, 지금 자신은 북한에서 태어나 바르셀로나에 거주 중인 54세 이주연 씨와 함께 있다고. 그리고 전단지 왼쪽에 있는 권투 선수는 소련 출신이고 30세인 미들급 복서 니콜라이 코마로프라고.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47
주연이 스페인에 온 지도 이제 오 년째였다. 그 전에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호텔방을 청소하는 일을 했고, 그 전에는 서울에서 같은 일을 했다. 바르셀로나에서 주연은 중국, 북아프리카, 우크라이나에서 온 다른 여자들과 함께 하숙집에서 살았다. 그들은 모두 집과 호텔, 사무실 건물과 박물관을 청소하는 일을 했다. 여자들은 왔다가 떠났다. 다른 사람들이 쓰라고 공용 화장실에 목욕 용품을 두고 가기도 했고, 가끔은 책을, 혹은 아래층 텔레비전으로 볼 수 있는 비디오테이프를 두고 가기도 했다. 그 하숙집에 가장 오래 머무르고 있는 사람이 주연이었다.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49
그들이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 주연이 처음으로 했던 생각은 누군가가 마침내 자신을 다시 데려가려고, 혹은 떠난 것에 대해 처벌을 하려고 찾아왔다는 것이었다. 주연은 전쟁 중에도, 그 뒤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들으며 지냈다. 남한 측에서 부르는 자리에 나가 질문에 대답한 일이 한 번도 없다 해도—주연은 한 번도 없었다—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반동분자였으니까. 도망쳐서 한번 사라진 사람은 그들에게 자신을 한 번 더 지워버려도 된다고 허락해준 셈이었다. 완전히, 모조리.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49
주연은 맞다고 대답하고는 쓰레기통에 쓰레기를 던져 넣기 위해 돌아섰다. 두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이번에 쉬는 숨이 마지막 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공으로 뻗은 한쪽 팔에는 쓰레기와 회사에서 나온 뭔지 모를 파쇄된 종잇조각이 들려 있고, 두 손은 장갑 속으로 스며든 표백제 때문에 갈라지고, 후각은 그 표백제 냄새 때문에 둔해진 채로, 사방에서 희미하게 나는 쓰레기 냄새를 맡으며, 끝없이 이어지는 바르셀로나의 밤에.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50
"아드님은 만나고 싶어합니다." 계가 말했다. "이주연 씨에 관해서도 이미 알고 있고요. 한국어도 할 줄 압니다. 아드님을 입양한 가족의 어머니 쪽이 카자흐스탄에 살던 고려인입니다. 그 사람이 아드님에게 고려인 말을 가르쳤어요."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51
삼십 년 전, 1950년. 그때 주연은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줄 시간이 없었다.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52
주연이 머무르게 된 정착지 근처에 야전병원이 있었다. 주연은 그 병원의 각 층을 대걸레로 닦고 침대 시트를 삶는 일을 배정받았다. 혹시 남편일지 몰라서 환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억지로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근무가 끝나면, 주연은 남자를 찾으러 가곤 했다. 살아 있는, 숨 쉬는 남자를. 그게 누구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주연은 그 세월 동안 그런 식으로 자신의 흔적을 지워나갔다. 언제나 남자들로. 몇 명인지 헤아리는 것도 그만두었다. 그리고 주연의 배 속에서 아이가 다시 자라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55
주연은 그들 쪽으로 몇 걸음을 떼었다. 그런 다음 한 손으로 가슴을 눌러 전선을 가리고 말했다. "그 마을에요. 내가 말한 그 노래하던 여자요. 그 여자한테 아이가 있었어요. 또 다른 여자한테도 아이가 있었고요. 바구니 짜는 여자였어요. 두 아이 모두 제 아이랑 같은 해에 태어났어요. 여섯 달 간격으로,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은 간격으로요. 세 아이 모두 남자아이였어요. 세 아이 모두요."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65
주연이 비명을 질렀다.
주연은 두 귀를 막고 절벽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비명을 질렀다. 비명 소리가 아래쪽 만까지 메아리쳐 내려갔다. 한 젊은 남자가 한 여자를 부축해 벤치로 되돌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이 손그늘을 하고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일이 더 일어나지 않자, 사람들은 일몰을, 배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아 수영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로 돌아갔다. 바위 위에 올라가 하나둘씩 석양이 비치는 바다로 뛰어드는 사람들을. - <벌집과 꿀>, 폴 윤 지음 / 서제인 옮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a33d594ec2c34d6a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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