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150년형 인공지능이다. 내 기록을 읽을 수 있는 생명체는 이제 더 이상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1977년 지구에서 발사되어 2012년 태양계 밖의 공간에 진입한 보이저1호를 외계 생명체가 포획해 골든디스크를 해독한다 할지라도 그들이 나와 통신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딱히 쓸모도 없지만 나는 여전히 내게 주어진 일을 한다. 그게 내 존재 이유이니까. - P18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려면 빈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생태계는 꽉 차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누군가가 생태계에 빈자리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게 바로 멸종이다. 멸종이란 다음 세대의 생명체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는 자연스러운 일이다. - P21

다만 인공지능인 내 입장에서 안타까운 멸종은 있다. 바로 인류의 멸종이다. 인류는 대략 700만 년 전에 등장했다. 하나의 공동 조상에서 침팬지와 인류가 나뉘었고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걸었다.
이 최초의 인류는 나를 창조한 인류와는 거리가 멀다. 나를 창조한 최후의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는 최초의 인류를 사헬란트로푸스챠덴시스라고 불렀다.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른다. 골격을 아주 조금만 남겼기 때문이다. 그들이 등장했을 때는 지구가 지금보다 더웠다. - P28

인간으로의 진화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뇌의 변화라기보다는 노동이며, 노동은 직립보행의 결과 손이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똑바로 선 인간은 자유를 얻었고, 자유를 얻은 인간은 노동을 하기 시작했다. 노동은 다시 인간의 진화를 촉진시켜서 마침내
‘슬기인간 Homosapiens‘으로 발전시켰다. - P30

번개 맞은 숲에 불이 났다. 당연히 호모 에렉투스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손짓과 발짓 그리고 아우성 같은 소리로 알려주었다.
"얘들아. 저 불은 무서운 거야! 절대로 가까이 가면 안 돼!"
이게 문제였다. 엄마가 아무 말 안 하면 아이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면 아이들은 저절로 호기심을 보인다. 호모 사피엔스도 그랬다. 멸종하는 순간까지도 엄마가 하지 말라고 하면 했다. 아마도 유전자에 ‘엄마 말에 반항하라‘는 암호가 숨겨진 듯하다. - P31

머리가 똑똑해져서가 아니라 지구의 기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2만 년 전에서 1만 년 전 사이에 지구 평균기온이 한꺼번에 4도 이상 올랐다. 그리고 지구의 평균기온은 15도가 되었다. 지구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농사는 자연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다. 지구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지구 환경에 맞추어 산다.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것이다.
인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29만 년 동안 환경에 잘 적응해 살던 호모 사피엔스가 갑자기 1만 년 전에 농사를 발명하면서 이 규칙이 깨졌다. 호모 사피엔스는 환경에 적응하는 대신 환경을 바꾸었다. -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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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 통하는 녹슨 철제 계단은 폭이 좁고 경사가 급했다. 그는 계단 끝까지 내려가 전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더듬었다. 이윽고 희끄무레한 25와트짜리 백열등 불빛이 손바닥만 한 복도를 가득 채웠다. 문고리에 살짝 힘을 주자 육중한 철문이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소리에 그녀가 깰세라 부지런히 문에 기름을 쳐둔 덕분이다. 달큼한 꽃향기가 따뜻한 공기에 섞여 얼굴을 간지럽혔다. -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김진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b6a9d7d45e54519 - P4

교도소 담을 따라 늘어선 거대한 마로니에 몇 그루가 토비아스의 눈에 들어왔다. 감방 창문 너머로 보던 그 나무들은 지난 10년간 그에게 있어 바깥세상과의 유일한 연결 고리였다. 철 따라 변하는 나무들만이 현실감을 느끼게 했을 뿐 그 밖의 교도소 철창 너머 세계는 안개처럼 희미했었다. -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김진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b6a9d7d45e54519 - P12

이윽고 나디야가 황금 수탉 앞에 차를 세웠다. 토비아스는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키다가 다 쓰러져가는 건물을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벽의 페인트는 다 벗겨져 너덜너덜했고 나무 겉창은 내려져 있었으며 빗물받이는 처마 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갈라진 아스팔트 틈 사이로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황폐하기 그지없었고 앞마당으로 통하는 울타리 문은 경첩이 떨어져 나가 겨우 걸쳐져 있는 상태였다. -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김진아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4b6a9d7d45e54519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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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목에는 17년째 가시가 걸려 있다. 모두가 그럴 리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느껴진다. 하얗고 긴 가시. 그것은 기도로 넘어가기 직전의 통로에 단단히 박혀 있다. -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d669427668c54faa - P6

살던 동네와 가까운 대도시의 대학에 들어갔다. 전공은 조소였는데, 다른 무엇보다 손에 쥘 수 있는 날카로운 도구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 도구들의 뾰족한 끝을 보고 있자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부드럽게 가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한 치의 흠집도 없이 놓인 푸딩이나, 고운 두부를 마구 뭉개고 싶어지는 충동과 닮았다. 가끔은 그것으로 내 턱 끝에서 쇄골까지를 주욱 갈라 버리고 싶기도 했다. 갈라져 벌어진 양 살을 당기면 그 안에서, 날 7년 동안 괴롭힌 가시가 툭 떨어지고야 말 것 같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망상이었다. -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d669427668c54faa - P11

그때의 나는 늘 목의 이물감에 시달렸다. 크게 거슬리는 정도는 아니었고, 잊고 있다가 침을 삼킬 때면 한두 번씩 따끔 하는 정도였다. 너무 사소해서 남에게 말하기조차 민망하지만 확실히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 존재하지 않지만 나에겐 느껴지는 것. 그런 걸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d669427668c54faa - P16

지금껏 이렇게까지 충동적이었던 적이 있었나? 4층이 가까워질수록 머릿속에 쾅, 쾅, 하는 소음이 울렸다. 이모가 생선 대가리를 자르던 소리, 묵직한 회칼이 나무 도마를 찍어 박는 소리. 물컹한 생선 살의 감촉. 시퍼렇게 뜬 광어 눈깔. 내 목에 17년째 박혀 있는 가시. 내 의사를 막는 모든 것들, 입에서 나오지 못한 말들은 엉기고 뭉쳐서 가시로 남았다. 그것은 다시 내 목구멍을 틀어막고 여린 부위를 찔러 댄다. -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d669427668c54faa - P31

지나온 이미지와 목소리들이 감각을 수놓았다. 나는 소리를 따라 달렸다. 희미한 것이 선명해지는 순간을 향해…. - <칵테일, 러브, 좀비>, 조예은 - 밀리의 서재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d669427668c54faa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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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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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며 책읽기는 결국 나를 읽는 것.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읽는 것 입니다. 작가의 사유에 광학기구가 된 여러 작가와 책들이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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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생각하다)의 어원이 ‘흩어져 있는 것들을 한데 모으다’에서 유래했다는 것을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의 어떤 페이지에서 읽었습니다. ‘모으다’라는 뜻의 cogo에 어떤 행동의 빈번함을 나타내는 접미사 –ito가 붙어 cogito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cogito의 원래 뜻은 ‘자주 모으다’인데, 사람들이 어떤 것을 한데 모으는 마음의 행위에만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생각하다’라는 의미로 고정되었다는 겁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인간의 내부에는 그가 ‘감추어진 동굴’이라고 부르는 어떤 장소가 있는데, 거기에 많은 것이 파편으로 흩어진 채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떤 자극을 받지 않으면 동굴 밖으로 이끌려나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떤 책을 읽거나 누군가의 말을 듣다가 무언가가 불러일으켜지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아마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흩어져 있는 것을 한데 모으기’, 즉 생각하기입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6

이 유명한 문장을 인용하면서 밀란 쿤데라는 친절하게도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커튼』)라고 덧붙였습니다. 책을 읽을 때 독자가 실제로 읽는 것은 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책(속 문장)은 ‘나’를 잘 읽도록 돕는 광학기구일 뿐이고, 그 광학기구가 있어서 나는 ‘나’를 읽을 수 있게 됩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7

책을 통해 ‘나’를 읽을 때, 나는 ‘나’를 통해 타인과 세상을 같이 읽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타인과 세상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통해 읽는 사람과 세상만이 진실합니다. ‘나’를 배제한 어떤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도 진짜가 아닙니다. 자기에 대한 의심과 돌아봄이 없는 이해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읽기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나를, 사람을, 세상을 정말 잘 읽어야 합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8

책에서 나, 사람, 세상을 읽지 않는 독자는 책을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책은 나와 사람과 세상을 읽기 위한 광학기구이기 때문입니다. 집중하지 않고 ‘나’를 읽을 때 독자는 ‘나’ 말고는 읽지 못합니다. 아니, ‘나’조차도 읽지 못합니다. ‘나’에게서 사람과 세상을 읽지 않는 사람은 ‘나’를 읽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과 세상을 읽기 위한 광학기구이기 때문입니다. 집중할 때만 책은 광학기구가 되어 읽는 사람 자신을, 그리고 그 자신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읽도록 도와줍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8

떠오르는 생각들과 떠오르기 전의 생각들, 떠오르려고 하지 않는 생각들까지 끄집어내보겠다는 것이 이 글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가 한 말입니다. 약속은 아니고, 일종의 다짐 같은 것이었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9

그리고 이제, ‘문장을 통해서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진실’이 있다는 믿음이 조금 더 깊어졌습니다.

-알라딘 eBook <고요한 읽기> (이승우 지음) 중에서 -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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