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 실제 폴란드에 존재하지 않는 지명.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지점, 공간이지만 시간을 대변하는 장소, 시공을 초월한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다른 고유명사와 달리 한국어 번역어로 표기했다.
남에서 북까지 태고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린다. 동에서 서까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사색에 잠긴 채 태고를 한 바퀴 돈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가 걸릴 것이다. 태고의 북쪽 경계선은 타슈프에서 키엘체로 향하는 도로와 만난다. 도로는 혼잡하고 위험하다. 여행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 경계는 대천사 라파엘*이 지키고 있다.
* 폴란드어 발음으로는 라파우.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7
백강은 얕고 생기발랄하다. 모래에 넓은 수로를 만들며 흘러가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투명하고 깨끗하며 모랫바닥까지 태양이 관통한다. 마치 반짝이는 거대한 도마뱀 같다. 강물은 미루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르게 흐르며 장난을 친다. 하지만 이 장난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9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불린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0
1914년 여름, 밝은색 군복을 입은 러시아 군인 둘이 말을 타고 미하우를 찾아왔다. 미하우는 그들이 예슈코틀레 쪽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그들의 웃음소리가 실려 있었다. 미하우는 밀가루가 묻어 희끄무레해진 외투 차림으로 대문 앞에 서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알면서도 기다렸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1
감자꽃이 떨어지고, 작고 푸른 열매가 영글 무렵, 게노베파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니, 5월 말 건초를 처음 베어낼 무렵이 틀림없었다. 그때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미하우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나날이 불러오는 배는 미하우가 돌아온다는, 아니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일종의 징표인지도 몰랐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2
명절을 앞두고 게노베파는 예슈코틀레에 장을 보러 갔다. 다리를 건너다가 강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맨발에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소녀의 맨발이 눈 위에 자그마하지만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게노베파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리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가방에서 코페이카* 한 닢을 찾아냈다. 소녀가 다리 위를 올려다봤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전이 눈 속에 떨어졌다.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감사의 미소도, 호의의 미소도 아니었다. 소녀는 커다랗고 새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3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부인께서는 분명 잘생긴 아들을 낳으실 거 같네요."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5
셴베르트 부인은 계산대에서 나와서 문까지 게노베파를 배웅했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딸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다들 딸만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죠." 두 여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6
천사는 산파인 쿠츠메르카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미시아의 탄생을 지켜봤다. 천사는 매사를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천사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물질적인 형태가 생성되었다가 스스로 파괴를 거듭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에 담긴 가치와 영혼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7
천사는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유추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생각지도 않는다. 어떤 인간들은 천사를 멍청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천사는 애초에 자기 안에 있는 지혜의 나무에서 따 온 열매, 순수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지식은 단순 명료한 직감을 통해서만 배가될 수 있다. 이것은 추론과 이에 수반되는 오류, 그 뒤에 찾아오는 온갖 두려움을 제거한 지식이며, 그릇된 인식이 빚어낸 편견을 배제한 지식이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게노베파가 코페이카를 던져주었던 맨발의 소녀는 크워스카*였다.
* ‘크워스’는 ‘이삭’, ‘곡식의 낟알’을 뜻한다.
크워스카는 7월 혹은 8월 즈음에 태고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소녀를 크워스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소녀가 들판에서 수확하고 남은 이삭을 주워다가 불에 구워 먹곤 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가을이 되자 감자를 훔쳤고, 11월에 밭이 텅 비고 나서 술집에 눌러앉았다. 누군가 가끔 소녀에게 보드카를 사주었고, 돼지비계를 바른 빵 한 조각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공짜로 뭔가를 베푸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나 술집에선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크워스카는 몸을 팔기 시작했다. 보드카로 가볍게 취기가 오르고 몸이 달궈지면, 남자들과 밖으로 나가서 소시지 몇 개에 그들과 관계를 맺곤 했다. 크워스카는 근방에서 유일하게 젊고 꽤 손쉬운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들은 개떼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크워스카는 몸집이 크고 가슴이 풍만했다. 밝은색 머리카락에 햇빛에도 끄떡없는 하얀 피부를 지녔다. 늘 당돌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고, 심지어는 교구신부와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록빛 눈동자에 한쪽 눈은 약간 옆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풀숲에서 크워스카를 취한 남자들은 항상 그 뒤에 거북함을 느꼈다. 그들은 바지 앞섶을 여미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이 턱턱 막히는 술집으로 돌아갔다. 크워스카는 절대 아래에 누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 그녀는 나무 혹은 술집의 나무 벽에 기대는 걸 즐겼고, 그럴 때면 치마를 등까지 걷어 올리곤 했다. 그녀의 엉덩이는 어둠 속에서 달처럼 빛났다. 이것이 바로 크워스카가 배운 세상이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밖에서 배우는 것과 안에서 배우는 것. 흔히 사람들은 전자를 최선, 나아가 유일한 방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장거리 여행, 혹은 보고 읽는 것을 통해서, 아니면 대학 교육이나 수업을 통해서 배움을 얻는다. 존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배워야만 한다. 그렇기에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식을 모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덧붙여나가고, 그렇게 지식이 쌓이면 그것을 활용하거나 가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에 도사린 ‘어리석음’, 다시 말해 학습을 필요로 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크워스카는 외부의 것을 내면으로 동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웠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3
통증이 점점 강렬해지면서 감각은 흐릿해졌다. 온갖 생각들이 부패한 천 조각처럼 갈기갈기 끊어졌다. 그녀의 말과 관념들이 뿔뿔이 흩어져 대지로 스며들었다. 출산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몸이 그녀를 온전히 장악했다. 인간의 육신은 온갖 심상들에 의해 생존을 유지하기에 이 심상들이 반쯤 의식을 잃은 크워스카의 정신을 지배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6
크워스카는 무덤을 덮은 흙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자 주위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세상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체와 사물,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크워스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싹을 틔우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한 명의 거대한 인간 혹은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었다. 크워스카 주위의 모든 것은 한 몸이었고, 그녀의 육신조차도 그 거대한 몸의 일부였다. 그 몸은 장대하고 전능하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움직임 하나, 소리 하나마다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무(無)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뭔가를 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힘이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0
망각의 과정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쁜 인간은 결국 숲에 왔던 애초의 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쁜 인간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고, 그 자신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잊었다. 몸에는 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이빨은 날고기를 먹으면서 마치 동물처럼 날카롭고 새하얗고 예리해졌다. 목에선 이제 쉰 소리와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났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청년이 바지춤을 풀었고, 게노베파는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보았다. 그녀는 꿈에서 맛보았던 바로 그 희열, 모든 행위와 시선들, 가쁜 호흡들이 어우러진 절정의 환희를 느꼈다. 그 환희는 통제 불가능하며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된 이 환희는 다시는 재현될 수 없기에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이미 실현되었고 흘러갔고 끝났고, 또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따분하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한번 눈을 뜬 허기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할 테니.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5
어느 날 밤 혹은 어느 아침, 인간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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