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사람의 삶을 구하기 위해 페미니즘의 실천적 이론인 ‘자기 이론autotheory’을 적극 활용 중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를 사회·정치적인 맥락과 연결시키는 ‘자기 이론’은, 고통을 자신의 탓으로만 돌리는 개인에게 균형 잡힌 시선을 제공해 스스로 삶을 재구성할 수 있게 도와준다. - <가치 있는 삶>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2194 - P3

● New Age. 서구의 물질적 가치와 문화를 배척하고 종교·의학·철학·천문학·환경·음악 등의 종합적이고 다방면적인 발전을 추구하는 움직임. 개개인의 영성적 변화, 즉 인간의 내적 능력을 개발시켜 우주의 차원에 도달하고자 한다. - <가치 있는 삶>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2194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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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 실제 폴란드에 존재하지 않는 지명. 시간과 공간이 중첩되는 지점, 공간이지만 시간을 대변하는 장소, 시공을 초월한 개념을 설명하는 상징적인 단어로, 다른 고유명사와 달리 한국어 번역어로 표기했다.

남에서 북까지 태고를 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면, 대략 한 시간쯤 걸린다. 동에서 서까지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느린 걸음으로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면서 사색에 잠긴 채 태고를 한 바퀴 돈다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가 걸릴 것이다.
태고의 북쪽 경계선은 타슈프에서 키엘체로 향하는 도로와 만난다. 도로는 혼잡하고 위험하다. 여행에 대한 불안 때문이다. 이 경계는 대천사 라파엘*이 지키고 있다.

* 폴란드어 발음으로는 라파우.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7

백강은 얕고 생기발랄하다. 모래에 넓은 수로를 만들며 흘러가고, 아무것도 감추지 않는다. 투명하고 깨끗하며 모랫바닥까지 태양이 관통한다. 마치 반짝이는 거대한 도마뱀 같다. 강물은 미루나무 사이를 요리조리 빠르게 흐르며 장난을 친다. 하지만 이 장난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9

태고는 두 개의 강, 그리고 이 두 강의 뒤엉킨 욕망이 만들어낸 세 번째 강의 강변에 자리하고 있다. 방앗간 기슭에서 흑강과 백강이 합쳐진 이 세 번째 강은 ‘강’이라 불린다. 강은 고요하고 충만하게 흘러간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0

1914년 여름, 밝은색 군복을 입은 러시아 군인 둘이 말을 타고 미하우를 찾아왔다. 미하우는 그들이 예슈코틀레 쪽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후텁지근한 공기에 그들의 웃음소리가 실려 있었다. 미하우는 밀가루가 묻어 희끄무레해진 외투 차림으로 대문 앞에 서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온 것인지 알면서도 기다렸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1

감자꽃이 떨어지고, 작고 푸른 열매가 영글 무렵, 게노베파는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가락으로 날짜를 꼽아보니, 5월 말 건초를 처음 베어낼 무렵이 틀림없었다. 그때 아이가 들어선 것이다. 아무 말도 못 한 채 미하우를 떠나보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나날이 불러오는 배는 미하우가 돌아온다는, 아니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는 일종의 징표인지도 몰랐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2

명절을 앞두고 게노베파는 예슈코틀레에 장을 보러 갔다. 다리를 건너다가 강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소녀를 보았다. 맨발에 꾀죄죄한 차림이었다. 소녀의 맨발이 눈 위에 자그마하지만 깊은 발자국을 남겼다. 게노베파는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다리 위에서 소녀를 내려다보던 그녀는 가방에서 코페이카* 한 닢을 찾아냈다. 소녀가 다리 위를 올려다봤고,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동전이 눈 속에 떨어졌다. 소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감사의 미소도, 호의의 미소도 아니었다. 소녀는 커다랗고 새하얀 이빨을 내보이며 초록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3

"신, 신이라……. 그분은 잘난 회계사죠. ‘인출금’과 ‘융자금’을 관리하시니까요. 둘은 서로 균형을 맞춰야만 하거든요. 그래서 하나의 생명이 사라지면,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죠……. 부인께서는 분명 잘생긴 아들을 낳으실 거 같네요."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5

셴베르트 부인은 계산대에서 나와서 문까지 게노베파를 배웅했다.
"아마도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딸이 필요한 것 같네요. 다들 딸만 낳기 시작한다면, 세상이 한결 평화로워질 텐데 말이죠."
두 여인은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6

천사는 산파인 쿠츠메르카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미시아의 탄생을 지켜봤다. 천사는 매사를 전혀 다르게 파악한다. 천사들은 세상을 바라볼 때, 물질적인 형태가 생성되었다가 스스로 파괴를 거듭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세상에 담긴 가치와 영혼으로 세상을 인식한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7

천사는 인간과 같은 지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유추도 판단도 하지 않는다. 논리적으로 생각지도 않는다. 어떤 인간들은 천사를 멍청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천사는 애초에 자기 안에 있는 지혜의 나무에서 따 온 열매, 순수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 지식은 단순 명료한 직감을 통해서만 배가될 수 있다. 이것은 추론과 이에 수반되는 오류, 그 뒤에 찾아오는 온갖 두려움을 제거한 지식이며, 그릇된 인식이 빚어낸 편견을 배제한 지식이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19

게노베파가 코페이카를 던져주었던 맨발의 소녀는 크워스카*였다.

* ‘크워스’는 ‘이삭’, ‘곡식의 낟알’을 뜻한다.

크워스카는 7월 혹은 8월 즈음에 태고에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소녀를 크워스카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소녀가 들판에서 수확하고 남은 이삭을 주워다가 불에 구워 먹곤 했기 때문이었다. 소녀는 가을이 되자 감자를 훔쳤고, 11월에 밭이 텅 비고 나서 술집에 눌러앉았다. 누군가 가끔 소녀에게 보드카를 사주었고, 돼지비계를 바른 빵 한 조각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공짜로 뭔가를 베푸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특히나 술집에선 더욱 그랬다. 그리하여 크워스카는 몸을 팔기 시작했다. 보드카로 가볍게 취기가 오르고 몸이 달궈지면, 남자들과 밖으로 나가서 소시지 몇 개에 그들과 관계를 맺곤 했다. 크워스카는 근방에서 유일하게 젊고 꽤 손쉬운 여자였기 때문에 남자들은 개떼처럼 주위를 맴돌았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1

크워스카는 몸집이 크고 가슴이 풍만했다. 밝은색 머리카락에 햇빛에도 끄떡없는 하얀 피부를 지녔다. 늘 당돌하게 상대방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보았고, 심지어는 교구신부와 마주칠 때도 마찬가지였다. 초록빛 눈동자에 한쪽 눈은 약간 옆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풀숲에서 크워스카를 취한 남자들은 항상 그 뒤에 거북함을 느꼈다. 그들은 바지 앞섶을 여미고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이 턱턱 막히는 술집으로 돌아갔다. 크워스카는 절대 아래에 누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늘 이렇게 말했다.
"왜 내가 당신 밑에 누워야 하죠? 나는 당신과 동등한데."
그녀는 나무 혹은 술집의 나무 벽에 기대는 걸 즐겼고, 그럴 때면 치마를 등까지 걷어 올리곤 했다. 그녀의 엉덩이는 어둠 속에서 달처럼 빛났다.
이것이 바로 크워스카가 배운 세상이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배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밖에서 배우는 것과 안에서 배우는 것. 흔히 사람들은 전자를 최선, 나아가 유일한 방법으로 여긴다. 그렇기에 장거리 여행, 혹은 보고 읽는 것을 통해서, 아니면 대학 교육이나 수업을 통해서 배움을 얻는다. 존재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통해 뭔가를 습득하는 것이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기에 배워야만 한다. 그렇기에 꿀벌처럼 부지런히 지식을 모아서 그것을 자신에게 덧붙여나가고, 그렇게 지식이 쌓이면 그것을 활용하거나 가공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면에 도사린 ‘어리석음’, 다시 말해 학습을 필요로 하는 본성은 바뀌지 않는다.
크워스카는 외부의 것을 내면으로 동화시키면서 세상을 배웠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2

쌓이기만 하는 지식은 인간에게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거나 단지 변화를 일으키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그저 겉옷을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며 배우는 사람은 끝없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배워서 알게 된 것들이 존재 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들기 때문이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3

통증이 점점 강렬해지면서 감각은 흐릿해졌다. 온갖 생각들이 부패한 천 조각처럼 갈기갈기 끊어졌다. 그녀의 말과 관념들이 뿔뿔이 흩어져 대지로 스며들었다. 출산으로 인해 부풀어 오른 몸이 그녀를 온전히 장악했다. 인간의 육신은 온갖 심상들에 의해 생존을 유지하기에 이 심상들이 반쯤 의식을 잃은 크워스카의 정신을 지배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26

크워스카는 무덤을 덮은 흙을 오랫동안 쓰다듬었다. 마침내 고개를 들자 주위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이제 세상은 서로 나란히 존재하는 물체와 사물, 현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크워스카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나의 덩어리였다. 싹을 틔우고, 죽고, 다시 태어나기 위해 다양한 모습을 가진 한 명의 거대한 인간 혹은 한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었다. 크워스카 주위의 모든 것은 한 몸이었고, 그녀의 육신조차도 그 거대한 몸의 일부였다. 그 몸은 장대하고 전능하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움직임 하나, 소리 하나마다 강력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무(無)에서 뭔가를 만들어낼 수도 있고, 뭔가를 무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힘이었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0

망각의 과정에 수년의 세월이 흘렀고, 나쁜 인간은 결국 숲에 왔던 애초의 그 남자와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나쁜 인간은 이미 그 자신이 아니었고, 그 자신이 된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조차 잊었다. 몸에는 털이 자라기 시작했고, 이빨은 날고기를 먹으면서 마치 동물처럼 날카롭고 새하얗고 예리해졌다. 목에선 이제 쉰 소리와 그르렁거리는 짐승의 소리가 났다.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34

청년이 바지춤을 풀었고, 게노베파는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보았다. 그녀는 꿈에서 맛보았던 바로 그 희열, 모든 행위와 시선들, 가쁜 호흡들이 어우러진 절정의 환희를 느꼈다. 그 환희는 통제 불가능하며 멈출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에 발현된 이 환희는 다시는 재현될 수 없기에 더욱 두렵고 무서웠다. 이미 실현되었고 흘러갔고 끝났고, 또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은 따분하고 혐오스러울 것이다. 한번 눈을 뜬 허기는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맹렬할 테니.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5

어느 날 밤 혹은 어느 아침, 인간은 경계를 넘어 절정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 뒤로는 아래를 향해, 즉 죽음을 향해 걸음을 내딛게 된다. 그때 한 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나는 지금 당당하게 어둠을 향해 내려가고 있는가, 아니면 어둠을 부정하고 그저 방의 불이 꺼진 것뿐이라 여기며 과거에 머물던 그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인가.

-알라딘 eBook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중에서 -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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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2010년 6~7월, 2015년 1~2월, 2016년 8월 오마이뉴스·오마이스쿨 주최로 열린 ‘조국의 법고전 읽기’ 강의를 바탕으로 2022년 새로 집필했다. - <조국의 법고전 산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899 - P4

무엇보다 법고전의 내용과 21세기 대한민국을 연결하려고 했습니다. 열다섯 권의 고전들이 출간된 당시에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살펴봄과 동시에 이 책들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정리했습니다. 법학 개념이나 이론의 구사는 최대한 줄이고, 중고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어 설명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은 1장부터 순서대로 읽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관심 있고 흥미 있는 고전부터 골라 읽으셔도 무방합니다. - <조국의 법고전 산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899 - P9

대학 입학 후 평생 법을 공부하고 가르친 사람으로서 기소가 되어 재판을 받는 심정은 무참無慘합니다. 저 자신과 가족 일에 철두철미하지 못했던 점, 면구하고 송구합니다. 자성하고 자책합니다. 법정에서 저의 소명과 해명이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읽고 씁니다. 이 책을 쓰는 동안 법고전 저자들과의 대화 속에서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습니다. 비운悲運이 계속되고 있지만, "너를 죽일 수 없는 것이 결국 너를 더 강하게 할 것이다"라는 니체의 말을 믿으며 견디고 또 견딥니다. 한계와 흠결이 많은 사람의 글이지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목에 칼을 찬 채로 캄캄한 터널을 묵묵히 걷겠습니다.

2022년 10월
조국 - <조국의 법고전 산책>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4899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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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라는 것은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소통의 장소로 인식되는 광장은, 바로 권력이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 건설한 장소라는 것이 바로 이 역사의 진짜 모습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74

유럽의 도시 환경에서 길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일 뿐 아니라 건물보다 절대 우위를 점한 공공재였다. 서구에는 길이 존재하지 않으면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권력은 통행이 쉬운 포장도로를 만들고 그 아래에 상하수도·전기·통신 시설을 매설한 후에야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했으므로 건물들은 위생 걱정 없이 서로 밀집해 들어서면서 집합적으로 조직된 길, 즉 ‘가로街路’를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탄생은 길road이 아닌 가로street가 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길을 단지 다른 지점 간의 연결로가 아닌, 도시라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뼈대와 신경계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건물이 가로의 종속 변수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78

서울(▵)과 파리(▿)의 평범한 이면도로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나타난다. 서울의 많은 길에 공과 사, 차와 사람의 구분이 희박하다. 통행을 위한 도로인지, 건물을 위한 주차장인지, 가게를 위한 야외 공간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람들이 눈치껏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모호하니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붉혀야 하는 일도 흔하다. ‘가게 앞 주차 금지’라는 신경질적인 경고는 사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85

보차步車분리를 철저히 하고 도로 시스템을 발전시켜 통행과 도시 서비스를 최적화한 서구의 도로에 비해, 한국의 도로는 통행은 물론이고 상업, 휴식, 오락 등의 여러 기능이 공존하는 일종의 ‘도시적 공터’가 된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87

72개 중 지금은 14개만 남은 낡은 타워가 수백 년 전 인간의 경쟁심이 건축으로 폭발한 광기의 시간을 나지막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극적인 쇠락 때문에 14세기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게 된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여행자의 눈에는 더없이 고풍스럽고 신비롭기만 하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17

근대 산업화가 낳은 거대 도시 메갈로폴리스는 그 속성상 인구의 도시 집중을 전제로 했고, 도시는 오랫동안 거주했던 토박이가 아니라 생존과 성공을 목표로 몰려드는 이방인에 맞춰 기존의 구조를 수정하고 확장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41

죽기 살기로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생존과 성공을 향한 강박관념만이 도시를 지배한다. 마천루가 매일 기록을 경신해 봐야 승자는 계속 패자로 바뀌고, 경쟁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은 어둠 속에 살게 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48

방房은 벽으로 둘러싸여 주위에서 분리된 공간이고, 벽면과 (창)문으로 구성되며 구체적인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52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찜질방처럼 ‘방’으로 끝나는 공간은 방으로 구획됐거나 최소한 옆자리와 칸막이로 구분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좀 더 사적 공간의 느낌을 준다. 실제로 외부와 단절된 밀폐된 곳에 굳이 함께 들어가려면 이미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문이 닫히고 같은 행위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문밖에 있는 타인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55

가족적 규모의 소집단에 강하게 결속되어 역설적으로 큰 규모의 연대로 발전하기 힘든 문화권과 개개인은 모래알처럼 각각인데 어떤 문제에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연대해서 사회적인 규모로 발전시키는 것은 수월한 다른 문화권을 상호 비교해 보면, 사람들의 관계가 사회적인 제도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건축 공간이나 도시 공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놀라운 예를 발견할 수 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61

개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집단을 신뢰하는 셈이다. 이렇게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려는 강박이 높은 사회이기 때문에 소속감을 증명하고 확인하고자 모임에 참석하려는 욕구가 높고, 그래서 한국인에겐 참가해야 하는 이런저런 모임이 유난히 많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64

자신의 우주(땅) 안에서 자신만의 수단(건축)으로 최선의 건축적 해답을 찾으려는 이른바 ‘자기 내향형’ 건축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73

건물의 형태와 사는 사람들의 신분만 바뀌었을 뿐, 담장 내부에 자신이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춰 놓고 외부와의 극단적인 단절을 선택한 바로 이 아파트 단지와 그 건축적, 도시적 논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경복궁과 이 단지의 면적을 비교했는데, 기묘하게도 크기마저 비슷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85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고 택지 개발하느라 드는 비싼 비용과 골치 아픈 관리 책임 없이도 낙후된 지역을 쉽게 개발할 수 있는 편리함에 만족했고, 기업들은 건물을 짓기도 전에 도면과 모델 하우스만 보고 선금을 지불하는 맘씨 좋은 소비자 덕에 똑같은 아파트를 양산하기만 하면 돈을 버는 편안한 장사에 행복해 했다. 그리고 비싸도 일단 청약에만 성공하면 몇 년 후 몇 배는 오를 집값에 소비자 또한 환호하는, 모두가 즐거운 ‘마법의 잔치’를 즐겼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91

(좌측) 단지에 사는 사람은 (우측) 동네에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반대로는 안 된다. 도시 이용에서 극단적인 비대칭성이 발생한 것이다. 신체 내 어떤 세포가 혼자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다른 부위의 기능을 적대적으로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인체의 전체 기능을 떨어트릴 때, 의학 용어로 그것을 ‘암’이라고 부른다. 다른 쪽의 희생을 제물로 증식하는 암세포가 무서운 이유는 최초 발병 위치에서 얌전히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세력을 불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를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암세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상황이 불리할 게 없다. 자신은 비대칭적으로 (자기 쪽으로만) 혜택만 입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현상이 발전하면 신체인 도시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체의 종말은 암세포의 종말도 포함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96

가족적 내內집단의 결속감에 기초한, 유난히도 내·외를 구분하는 우리의 부족적 공동체 문화는 ‘집’ 내부에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외부와는 단절을 택한 ‘울타리’ 건축 문화로 형상화돼 왔다. 그리고 그 자기중심적 건축은 다시 우리의 소小집단식 공동체 문화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서로 단절된 그 소집단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관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른바 공공의 문제, 즉 ‘도시’의 문제였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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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umb self might be a shuck, but this is true: he only does bad people. It’s how he sleeps at night. It goes without saying that he has made a living working for bad people, yes, but Billy doesn’t see this as a moral conundrum. He has no problem with bad people paying to have other bad people killed. He basically sees himself as a garbageman with a gun.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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