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라는 것은 논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소통의 장소로 인식되는 광장은, 바로 권력이 그 자신의 필요에 의해 건설한 장소라는 것이 바로 이 역사의 진짜 모습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74
유럽의 도시 환경에서 길은 도시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일 뿐 아니라 건물보다 절대 우위를 점한 공공재였다. 서구에는 길이 존재하지 않으면 건물도 존재하지 않는다. 공권력은 통행이 쉬운 포장도로를 만들고 그 아래에 상하수도·전기·통신 시설을 매설한 후에야 건물이 들어서는 것을 허용했으므로 건물들은 위생 걱정 없이 서로 밀집해 들어서면서 집합적으로 조직된 길, 즉 ‘가로街路’를 이루었다. 그런 점에서 도시의 탄생은 길road이 아닌 가로street가 열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길을 단지 다른 지점 간의 연결로가 아닌, 도시라는 생태계를 구성하고 유지시킬 수 있는 뼈대와 신경계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시민들은 건물이 가로의 종속 변수라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78
서울(▵)과 파리(▿)의 평범한 이면도로를 비교해 보면 우리가 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나타난다. 서울의 많은 길에 공과 사, 차와 사람의 구분이 희박하다. 통행을 위한 도로인지, 건물을 위한 주차장인지, 가게를 위한 야외 공간인지 명확하지 않다. 사람들이 눈치껏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것이 모호하니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붉혀야 하는 일도 흔하다. ‘가게 앞 주차 금지’라는 신경질적인 경고는 사실 아무런 법적 근거가 없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85
보차步車분리를 철저히 하고 도로 시스템을 발전시켜 통행과 도시 서비스를 최적화한 서구의 도로에 비해, 한국의 도로는 통행은 물론이고 상업, 휴식, 오락 등의 여러 기능이 공존하는 일종의 ‘도시적 공터’가 된 것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187
72개 중 지금은 14개만 남은 낡은 타워가 수백 년 전 인간의 경쟁심이 건축으로 폭발한 광기의 시간을 나지막이 증언하고 있을 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극적인 쇠락 때문에 14세기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간직하게 된 이 도시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기도 하다) 그 속사정을 알지 못하는 여행자의 눈에는 더없이 고풍스럽고 신비롭기만 하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17
근대 산업화가 낳은 거대 도시 메갈로폴리스는 그 속성상 인구의 도시 집중을 전제로 했고, 도시는 오랫동안 거주했던 토박이가 아니라 생존과 성공을 목표로 몰려드는 이방인에 맞춰 기존의 구조를 수정하고 확장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이루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41
죽기 살기로 자신을 알려야 한다는 생존과 성공을 향한 강박관념만이 도시를 지배한다. 마천루가 매일 기록을 경신해 봐야 승자는 계속 패자로 바뀌고, 경쟁에 끼지 못한 대부분의 시민은 어둠 속에 살게 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48
방房은 벽으로 둘러싸여 주위에서 분리된 공간이고, 벽면과 (창)문으로 구성되며 구체적인 용도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52
노래방, PC방, 비디오방, 찜질방처럼 ‘방’으로 끝나는 공간은 방으로 구획됐거나 최소한 옆자리와 칸막이로 구분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좀 더 사적 공간의 느낌을 준다. 실제로 외부와 단절된 밀폐된 곳에 굳이 함께 들어가려면 이미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야 한다. 문이 닫히고 같은 행위를 함께하면서 그들은 비로소 문밖에 있는 타인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55
가족적 규모의 소집단에 강하게 결속되어 역설적으로 큰 규모의 연대로 발전하기 힘든 문화권과 개개인은 모래알처럼 각각인데 어떤 문제에 의견을 나누고 공감하고 연대해서 사회적인 규모로 발전시키는 것은 수월한 다른 문화권을 상호 비교해 보면, 사람들의 관계가 사회적인 제도는 물론이고 물리적인 건축 공간이나 도시 공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놀라운 예를 발견할 수 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61
개인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 개인은 절대로 벗어나지 못할) 집단을 신뢰하는 셈이다. 이렇게 어떤 집단에 속해 있으려는 강박이 높은 사회이기 때문에 소속감을 증명하고 확인하고자 모임에 참석하려는 욕구가 높고, 그래서 한국인에겐 참가해야 하는 이런저런 모임이 유난히 많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64
자신의 우주(땅) 안에서 자신만의 수단(건축)으로 최선의 건축적 해답을 찾으려는 이른바 ‘자기 내향형’ 건축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73
건물의 형태와 사는 사람들의 신분만 바뀌었을 뿐, 담장 내부에 자신이 필요한 모든 시설을 갖춰 놓고 외부와의 극단적인 단절을 선택한 바로 이 아파트 단지와 그 건축적, 도시적 논리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경복궁과 이 단지의 면적을 비교했는데, 기묘하게도 크기마저 비슷했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85
국가는 도로를 만들고 공원을 조성하고 택지 개발하느라 드는 비싼 비용과 골치 아픈 관리 책임 없이도 낙후된 지역을 쉽게 개발할 수 있는 편리함에 만족했고, 기업들은 건물을 짓기도 전에 도면과 모델 하우스만 보고 선금을 지불하는 맘씨 좋은 소비자 덕에 똑같은 아파트를 양산하기만 하면 돈을 버는 편안한 장사에 행복해 했다. 그리고 비싸도 일단 청약에만 성공하면 몇 년 후 몇 배는 오를 집값에 소비자 또한 환호하는, 모두가 즐거운 ‘마법의 잔치’를 즐겼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91
(좌측) 단지에 사는 사람은 (우측) 동네에 자유롭게 갈 수 있지만 반대로는 안 된다. 도시 이용에서 극단적인 비대칭성이 발생한 것이다. 신체 내 어떤 세포가 혼자 비정상적으로 증식하여 다른 부위의 기능을 적대적으로 잠식하고 결과적으로 인체의 전체 기능을 떨어트릴 때, 의학 용어로 그것을 ‘암’이라고 부른다. 다른 쪽의 희생을 제물로 증식하는 암세포가 무서운 이유는 최초 발병 위치에서 얌전히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세력을 불려 나가기 때문이다. 이를 ‘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암세포 입장에서 보면 그런 상황이 불리할 게 없다. 자신은 비대칭적으로 (자기 쪽으로만) 혜택만 입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이 현상이 발전하면 신체인 도시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신체의 종말은 암세포의 종말도 포함한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296
가족적 내內집단의 결속감에 기초한, 유난히도 내·외를 구분하는 우리의 부족적 공동체 문화는 ‘집’ 내부에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고, 외부와는 단절을 택한 ‘울타리’ 건축 문화로 형상화돼 왔다. 그리고 그 자기중심적 건축은 다시 우리의 소小집단식 공동체 문화를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서로 단절된 그 소집단들을 어떻게 연결시키고 관계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른바 공공의 문제, 즉 ‘도시’의 문제였다. - <보이지 않는 도시> 중에서 https://www.millie.co.kr/v3/bookDetail/179581570 - P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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