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 - The Cheat Code of Justice
안천식 지음 / 옹두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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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책은 고백 그리고 고발이라는 책을 읽었는데 읽기 편하게 잘 썼었다.

확증편향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자기가 받아 들이고 싶은 것만 받아들이는 경향이 큰 것, 한쪽으로 치우친 것, 한쪽으로 쏠린 것을 말한다고 생각했다.

저자 안천식은 경북 예천 출생이고 포항제철공업고등학교 기계정비과를 졸업했고 경희대 법학과를 졸업했다.

서울시립대 세무전문대학원 조세법을 졸업했고 사법연수원 34기를 수료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변호사법 제1조는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하고 그 사명에 따라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사회질서 유지와 법률제도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 변호사는 어려운 직업이다.

변호사가 의뢰인으로부터 수임료를 받은 만큼만 성실히 직무를 수행하고 판결의 결과나 오류는 판사의 몫으로 돌려버리면 된다라고 생각하면 변호사도 어렵지 않은 직업이라고 한다.

법관은 원칙적으로 재판 및 판결에 대하여 책임을 지지 않으니 변호사가 그러한 법관에게 책임을 미뤄버리면 쉽다.

우리 국민은 사법부를 불신한다.

사실 무조건 맹신할 수 있는 기관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사법불신의 원인은 판결의 오류를 쉽게 알 수 있는 변호사들이 침묵해서일지도 모른다.

사법절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정해야 한다.

만일 공정하지 못한 재판으로 판결에 오류가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공정하게 사법절차를 진행해야 한다.

사법절차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된 관행은 개선되어야 하고 그렇게 해서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고 사회정의를 실현해야 한다.

법치주의는 우리 헌법의 소중한 가치이며 법관이나 판결을 포함한 그 어떤 것도 법치주의의 예외가 될 수는 없다.

변호사들이 변호사법 제1조의 사명을 수행하면 우리 사법절차는 신뢰를 회복할 것 이다.

하지만  변호사가 이러한 사명에 눈을 감으면서 모든 잘못을 법원과 검찰 탓으로 돌려버린다면 사법불신의 불길은 날이 갈수록 커질 것이다.

변호사가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기성 법률가들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는 불안에 휩싸인다.

그 불안을 떨쳐내지 못하면 변화는 없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있는 일이다.

























법은 일종의 생활 규범이다.

한 무리가 공동체 생활을 함에 있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법이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성문법이라고 알려진 고조선 시대의 팔조법금은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한다.

남에게 상해를 입힌자는 곡물로써  배상한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데려다 노비로 삼으며 속죄하고자 하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인의 생명과 신체와 재산을 함부로 침해하지 말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서양의 함무라이 법전의 내용 역시 대동소이하다.

법은 이와 같이 공동체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한 매개체로서 권력자와 공동체 구성원이 타협의 산물로 고안한 개념이자 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국가 이전 시대의 법에는 결정적인 단점이 있다.

바로 권력자 자신은 이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대의 법은 통치대상인 백성에게만 일방적으로 강요되고 백성들만 지켜야 할 규범을 의미했을 뿐이다.

오늘날에 와서야 법은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주인이 되는 정치체제이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권력자 혹은 통치자는 바로 국민이다.

법은 국민에 의한,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위한, 국민의 법이 되었다.

역사적으로 일반 민중을 국가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시민 혹은 국민이라는 개념으로 자리잡게 된 시기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격변기라고 본다.

대혁명에 의해 왕권은 무너졌고 공화정, 즉 다수의 일반 민중들이 선출한 정치지도자가 헌법에 따라 통치를 하는 법치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민은 주권자로서 대표를 선출한 후 스스로 선출한 대표자의 지배를 받는, 국민주권주위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때 법은 선출된 것이 지도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권자인 일반 국민의 자유와 안전, 재산을 보장하기 위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다.

정치 지도자를 가리켜 통치자라 하지 않고 국민을 섬기는 종이라는 의미에서 공복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모두 일반 국민의 자유와 안전, 재산권을 최대한 보장하여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제도적 장치이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 법치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18세기 프랑스 게몽사상가이자 법률가인 몽테스키외는 1748년 출간한 '법의 정신'에서 국가의 권력을 행정권, 입법권, 사법권으로 나누고 상호견제와 균형을 이루게 하는 삼권분립이론을 주장했다.

이 이론의 핵심은 사법권을 행정권과 입법권으로부터 분리하여 독립시키는 것이다.

사법권을 독립시킨다고 저절로 공정한 재판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독립된 재판관이 심판을 공정하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 독립성을 이용해 재판 권한을 남용하는 문제가 대두될 수도 있다.

중국은 사법의 독립을 부정하고 있다.

그걸 따라하겠다니,,

몽테스키외는 재판권의 공정한 행사를 재판권의 무권력화, 종이호랑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호랑이와 같은 무서운 역할을 담당하지만 아무도 무서워하지 않는 종이호랑이와 같은 존재가 바로 재판관이어야 한다고 몽테스키외가 그랬다.

이를 현대식으로 얘기하면 재판관은 중립적인 입장에서 무엇이 법인지를 말해주는 고성능의 만능 인공지능과 같아야 한다.

미국과 영국은 법관이 일률적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시민들 사이에서 선출된 배심원단에 의해 재판받을 권리를 공식화했다.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독일, 프랑스, 일본은 배심제와 참심제를  적절히 혼용한 국민의 재판참여제도를 활성화함으로써 직업 법관의 재판권 남용 문제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두고 있다.

대한미국 헌법은 법관의 재판독립만을 선언할 뿐, 독립된 법관이 중립적인 지위에서 주권자인 국민의 자유와 재산을 어떻게 보호하고 또 어떻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성숙시켜 정의를 수호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해  법관의 재판권 남용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공정한 사법제도는 우리 사회의 안정과 신뢰를 정착시키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일반 국민은 물론이고 사회 기득권층에게도 장기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가치이다.

13세기 영국 귀족들이 세계 최초로 배심제도를 마그나카르타(대헌장)에 명문화하도록 요구하였는지 우리 사회가 생각해봐야 한다.























재판권 남용을 대비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헌법 제109조에서 규정하는 재판공개의 원칙이다.

모든 사회가 공개를 한다면 부정이나 비리는 덜 할 것이다.

지금 정부는 공개할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해서 의심스럽다.

모든 재판의 심리와 판결은 공개되어야 하고 판결의 결과는 어떠한 이유에서도 그 공개를 제한할 수 없다.

재판의 심리와 판결의 결과가 모든  국민에게 공개되어야 하는 이유는 재판권을 독점한 법관이 불공정한 재판을 하는 것은 아닌지, 사전적인 혹은 사후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모든 판결을 공개함으로써 재판 전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확보하고 사회를 안정시키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성숙하게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재판공개의 헌법정신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도 현재 대법원은 대부분의 판결을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있다.

개별적으로 사건번호를 특정하여 판결문 열람을 허용하더라도 지나친 익명화 처리로 인해 도저히 판결 이유의 의미와 내용을 알아보기  힘들다.

비공개의 명목상 이유는 개인정보보호라고 하지만 미국 등 사법선진국들이 원칙적으로 판결문뿐만 아니라 소장, 답변서 등 모든 소송자료를 일반에 전면공개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법원이 판결문의 전면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실질적인 이유는 그동안 행해진 수많은 불공정한 판결 등 재판권 남용 사례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 책임을 모면할 방편으로 개인정보보호 등 다른 이유를 제시하는 거라는 의심을 지우기가 어렵다.

대법원이 판결문을 전면 공개해야 한다.

저자는 여러 개의 판결을 공개하고 설명해서 확증편향을 막으려고 노력했다.

실질적인 판결문을 보고 해설을 보는 건 공부하는데 도움이 많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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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두리 2025-07-03 13: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옹두리 입니다.
소중한 리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도서출판 옹두리 올림-
 
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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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의 책을 펼치고 책장을 넘기니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책 내용은 분명히 좋은 것 같고 번역을 잘 한건지 문체가 바로 빠져 들게 했다.

그래서 점심 먹는 시간도 1시간이나 늦어졌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제자들의 관점으로 하이데거를  분석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자인데도 유대인 제자들이 많았다.

이 책의 하이데거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독일 문화권에 속해 있고 세대적으로 소속되어 있고 하이데거 초기 철학의 실존론적 방향성에 실질적으로 전념했음이 증명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강의와 세미나에 비유대적 유대인들이 몰려 들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와 동시대 유대 사상 간의 숨겨진 관련성과 예상치 못했던 공통점은 전승된 이항 대립과 분류를 극히 유행하는 방식대로 해체하는 것이다.

비판적, 경험적으로 접근했을 때 그러한 이항 대립은 동시에 필수적인 해석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헤겔은  모든 것은 사태 자체에 의존한다.

모든 것은 제기되는 질문의 유형에, 그리고 우리가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주제의 성격에 달려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에 충성했다.

저명한 역사학자는 나치즘은 국가적 트라우마, 정치적 극단주의, 그리고 폭력적인 갈등과 혁명적 격변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소수의 범독일 극단주의자들을 도취시켰던 혐오, 공포, 그리고 야망이 뒤섞인 자극적인 혼합물은 갑자기 결정적인 추가적 요소인 물리적 힘을 사용하기 위한 의지와 결단을 획득하게 되었다.

국가적인 굴욕, 비스마르크 제국의 몰락, 사회민주주의의 승리, 공산주의의 위협, 이 모든 것은 범게르만, 반유대주의자, 우생학자, 그리고 초국수주의자들이 세기가 바뀌기 전부터 옹호해왔던 방안들을 실행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공동체는 형이상학의 시대에 파괴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상 자기-파괴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형이학적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이 유대적인 것과 투쟁할 때뿐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와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근대 기술의 제공자로서 그들 자신의 형이상학적 운명의 과잉과 약탈에 굴복했을 뿐이다.

이 주장은 반유대주의적인 정치적 이미지를 열광적으로 투영했을 경우에만 '참'이다.

사르트르가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만일 유대인이  현존하지 않았다면 반유대주의자가 그들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근대 신화로서 세계 유대인들을 재창조하면서 한 일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에서 유대인들은 단지  그 자신의 형이상학적 명민함의 희생자일 뿐이다.

존재역사의 순화된 관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의 대량 전멸에는 시적 정의의 요소가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서구 근대성의 쇠퇴에 대해 역사적인 책임을 갖는 집단으로서 그들은 단지 그들이 뿌린 씨앗을 거둔 것일 뿐이라고 한다.

한스 게로르크 가다머는 1920년대 초반의 시대 분위기는 비타협적인 문화적 급진주의의 동기에 대해서 얘기했다.

독일에서 키르케고르를 새롭게 수용하는 분위기에서 당대 진리에 대한 주장은 그 자체로 실존론적이라고 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으로 제기된 명제나 지식의 견지에서 증명되는 진리가 아닌 자신의 고유 경험의 직접성 속에서 그리고 실존의 유일무이한 특수성속에서 증명되는 진리를 다루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형이상학을 해체해야 한다고 호소한 하이데거는 관습에 대한 저항이 극에 달해 전통적인 철학의 어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반드시 처음부터 재창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믿었다.

그의 걸작에는 손안의 존재, 죽음을 향한 존재, 존재 전체의 가능성 등등의 크고 무거운 신조어들이 넘쳐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출발점은 현사실성 혹은 실존, 즉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로 환원되는 세계-내-존재, 혹은 현존재와 함께 철학을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로젠츠바이트의 경우, 그의 신학적 열망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방식으로 철학은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혹은 창조된 삶에서 시작해야 한다.

성취의 전망이 긴급한 구원 가능성에 달려 있는 철학은 타락한 인간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궁극적 목적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할 때 그들의 차이는 보다 극명해진다.

로젠바이크에게 있어서 인간 실존의 궁극적 목적은 무한하고 영원한 구원을 통해 피조물로서의 삶, 즉 시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유한으로서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래성에 이르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완벽한 범례에 해당한다.

로젠츠바이크의 경우 죽음은 초월을 향한 길 위의 중간역, 즉 영원의 이름으로 인간성을 유한성의 고역으로부터 해방하는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향하는 자기성과 무한한 객관성의 빛나는 명료성 사이를 잇는 다리라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물음에 의해 추동된다.

"구원의 별"에서 극도의 주체성과 무한한 객관성의 두 계기를 매개하는 연결고리는 계시이다.

세속주의 사도들이 한계와 결핍으로 인식하는 유대인의 비역사적 민중으로서의 지위는 특히 그들이 영원과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로젠츠바이크의 접근 방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의 유한성이라고 하는 불안이 들끓는 변전에 돌일킬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다.

그의 실존론적 존재론은 초월이 영구히  폐기되었다고 전망하며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조건의 본성에 열중한다.

남겨진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빼앗긴 채 세계-내-존재라는 극복 불가능한 진리로서 절망스러운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이고 마르스크주의이고 한나 아렌트와 바람을 피웠다.

교회사람들이 바람을 핀 남자는 사람이 아니니까 바로 손절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라고 얘기를 안해서 그냥 일반 남자인줄 알았나보다.

하이데거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봐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는 사실상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에 한 때 손을 댄 사람일 뿐만 아니라 광적인 반유대주의자이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을 이끄는 매개체였으며 아우슈비츠와 다른 몰살 현장에서 진보한 과학기술에 의해 살해되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의 제거를 악의적으로 일종의 집단 자살로 기술한다.

전쟁 후 연합군이 독일을 거대한 강제수용소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전쟁의 실질적 희생자라는 것이다.

나치 박해의 희생자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공감 능력 부재는 냉담하고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무관심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악행을 하찮게 보이게 만드는 하이데거의 불온한 노력,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사ㅣ켜 주려는 노력은 그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고백과 결합되어 그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가로 볼 수 없다.

요즘에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이 하이데거 전집에서 반유대주의 부분을 삭제하려고 했다고 한다.

잘못인 건 아는가보다.

난 이엠바운즈의 8권으로 된 기도전집을 한 번 읽고 두 번째 읽고 있다.

이제 8권째 읽고 있는데 기도에 대해서 항상 궁금하고 성경책보다 더 깊은 내용을 원했다.

그 전에 기도에 대한 책들을 무수히 읽어서 그 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기도전집을 읽고나니까 기도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기도생활하는 것도 더 좋아졌다.

하이데거의 전집은 97권이다.

그런 쪽으로 전공하는 사람들이 전집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할거다.

하이데거는 도덕적인 사려를 존재론적 탐구 혹은 존재물음에 못 미치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윤리적 문제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데 그는 반휴머니즘을 선언한다.

카를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부자유하고  독재적이며 의사소통 능력이 부재하다고 했다.

나도 하이데거를 읽어 보니까 야스퍼스의 의견이 맞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이데거는 학교 다닐 때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인식만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더 깊게 그를 알게 돼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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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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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를 더 알 수 있는 좋은 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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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선일보 독자입니다 - 샤이 보수의 수줍은 고백
문성철 지음 / 책읽는귀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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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내가 진보라고 생각했다.

보수는 뒤떨어짐 자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책도 진보인사들의 책을 봤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 위선, 거짓이었다.

그래서 중보에서 보수책을 보기 시작했다.

텔레비전도 tv조선만 거의 본다.

난 보수나 진보, 좌파, 우파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아빠는 공산주의나 사회주의, 좌파를 너무 싫어하신다.

아빠 집안이 지주집안이라고 공산당들에게 몰살 당해서이다.

할아버지들, 할머니가 공산당들때문에 전부 돌아가셨다.

아빠가 탈북민들이 도망치는 여정을 담은 프로그램을 같이 보는데 영아야 아빠도 엄마가 보고 싶어라고 하셨다.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들을 가지고 계신데 아빠는 할머니 사진 한 장이 없으시다.

아빠는 내 얼굴이 할머니 얼굴을 닮아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하셨다.

내 얼굴을 보면 할머니 얼굴이 뚜렷이 떠오른다고 하셨다.

국제정치는 자국의 이익을 따라가는 것인데 이 지구상에서 가장 힘있는 나라는 미국이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저물어가는 사상이다.

좌파는 세계 1위와 손을 안 잡고 세계 꼴찌와 손을 잡겠다고 한다.

그것조차도 전부 쇼였다.

보수가 몰락하고 좌파정권이 들어오니까 장관들의 내로남불은 장난이 아니고 이번에 LH투기도 장난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대한 책을 읽는데 자본주의가 잘 굴러가려면 사회주의도 경쟁을 해야 한다고 하기는 했다.

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싸그리 사라지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경쟁과 균제를 하게 해야 한다고 하는데 보수와 진보도 서로 경쟁하고 견제와 균형을 맞춰야 하는가보다.

우리나라의 보수당이 보수의 가치를 버리고 애매하게 변해서 실망이 된다.

그래도 좌파보다는 낫다.

보수들은 이번 정권을 보면서 좌파알레르기가 생겨서 좌파는 무조건 싫고 좌파랑 친한 사람들도 싫다고 한다.













난  책을 많이 읽고 정한 노선은 기독보수우파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미국와 일본 동맹을 원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동성애, 성개방, 진화론, 다원주의도 반대한다.

저자 문성철은 작가로서 글을 쓸 때 피를 말리고 어떻게 하면 더 쉽게, 재밌게 쓸까, 이마를 때리며 생각을 쥐어짜낸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이 재미있다.

저자가 촛불집회를 나갔는데 그들의 배타적인 폭력성을 봤다고 한다.

나도 엄마 대학원 사람들이 촛불집회에 가자고 했지만 그때 책을 읽고 있어서 못 나간다고 했었다.

지금도 아리스토텔레스를 다 읽으면 교회사람들은 만날 수 있거나 밖에 나올 수 있냐고 하지만 그 다음엔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고 하이데거를 읽고 나면 한나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하고 한나 아렌트를 다 읽으면 한스 요나스를 읽어야 한다고 했다.

한스 요나스를 다 읽으면 허버트 마르쿠제를 읽어야 해서 교회사람들을 만날 수 없다.

촛불 시위의 주장에 대해 옳고 그름을 입도 뻥긋 못 하게 만들려는 그들의 태도가 있었다.

촛불의 신성성에 대해서 언급조차 못 하게 했다고 한다.

촛불 혁명에 반대하는 사람을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해버리거나 극우 세력으로 매도해버린다.

이제는 하다하다 성전이란다.

성스러운 전쟁이라는 거다.

풋,,실패한 성전이겠지,,

저자가 완장 찬 좌파들의 매서운 눈을 처음 느낀 건 대학교 토론 시간 때였다고 한다.

나도 대학때 항상 화가 나 있고 말투가 전투적이고 무서운 애들이 있었다.

난 쟤네는 뭔데 맨날 화를 내냐고 하니까 애들이 가까이 가지마, 막시즘들이야 라고 했다.

걔네는 돌아다니면서 데모에 참석하자고 하기도 했다.

그런 애들을 만나면 눈도 안 마주치고 못 들은 척 빨리 지나쳐야 한다고 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저항의  수단으로 총장실이나 교수실을 점거하곤 했는데 저자가  다닌 대학에서도 종종 그런 일이 있었다.

민주적 절차와 방법을 통해서 충분히 문제를 제기하고 싸울 수 있는데 왜 굳이 불법 점거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했는지 이해가 안가고 그들은 범죄자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인간들 같다.

그들이 정부에 들어 가 있는 거다.

조선일보는 보수 언론이라고 취재를 거절당하거나 세무조사, 불매운동, 폐간 운동까지 화려하다.

조선일보만큼 좌파에게 오래 두들겨 맞은 언론도 없다.

이 정도 맞았으면 쓰러져야 하는데 희한하게도 사라지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꼴통이라면 폐간되었어도 벌써 폐간 되었어야 하는데 1등 신문사라는 자리만 더 공고해졌다.

우리집도 텔레비전을 켜면 TV조선부터 켜고 볼 게 없으면 다른 채널로 돌린다.

조선일보는 역사가 오래돼서 잘못한 것도 실수한 것도 많은 게 당연하다.

언론사의 길을 걸어오면서 최소한의 생존 본능으로서 타협해야 했을 때도  있었을 거고 숨어서 버텨야 했을 때도 있었을 거다.

진보 성향 신문사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잘못한 건 잘못한 거고 반성하고 계속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우직하게 우파 담론을 지켜냈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박수받아야 한다.

 

모든 일이 다 잘될 거예요,,국민 모두 행복한 나라,,

좌파 사상은 인간적이다 못해, 멋있기까지 하다.

정의롭게 말은 하지만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지구에 유토피아 같은 건 없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고 그런 세상을 꿈꾸었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는 죄다 망하거나 사라졌다.

그런데도 여전히 정치인들은 책임질 수도 없는 달콤한 말로 국민을 현혹하고 인기 관리만 한다.

그런 거짓말을 들으면 역겹다.

본인들은 10년, 20년 먹고살 준비를 다 마쳐놓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오늘만 생각하자고 하고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면 소름 돋는다.

그저 모든 일이 잘될 거니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아무런 방법도, 대안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국민들을 위험한 판타지에 빠뜨리고 있다.

냉혹한 현실에 대해서 얘기해줘야 한다.

세상은 만만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개개인이 살아남으려면 정신 바짝 차리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 한 세상이다.

모두가 잘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노력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정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싶다.

좌파는 삼성을 욕하면서 삼성에 입사하고 자본주의를 혐오하면서 대기업 주식 매수에 여념이 없다.

미국을 욕하면서 자식은 미국에 유학 보내고 부를 재분배하자면서 본인들은 10원짜리 한 장 내놓지 않는다.

강남좌파의 위선과 이중성은  인류 최고이다.

이건 귀여운 수준이다.

끝판왕은 자신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거다.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산주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색팔색을 한다.

좌파가 선전, 선동에 능하고 아사모사하게 현혹시키는 기술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정치체제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가 다른 개념이라고 거짓말 그만해라,,

그게 그거다,,

사회주의가 급진적으로 변하면 공산주의인 것이다.

사회를 위해서 개인의 자유나 사유재산을 과도하게 제한하거나 모두가 똑같이 잘 사는 방법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 사상적 뿌리는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로 연결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공산주의를 공산주의라 부르지 못하는게 좌파들이다.






















좌파는 스스로 깨어 있다고 정의한다.

풋!

상대방이 아직 각성하지 못한 어떤 것을 알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쉽게 말해 자신은 옳고 상대는 틀리다는 거다.

토론하려면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데 애초에 논쟁할 수 없는 상태이다.

좌파 집단은 상대방이 일단 계몽이 안 된다고 판단되면 이들을 제거 대상으로 인식해버린다.

반대파가 없어져야 완전무결한 이상 사회가 펼쳐진다고 생각한다.

난 얘기하다가 좌파인게 파악이 되면 말을 섞지 않는다.

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정부 지원금? 세금 환급이지,,

세금을 힘들게 걷어가서 다시 번거롭게 나눠 준다.

불필요한 행정 절차들만 늘어난다.

정부 맘대로 쓰고 우리보고 대신 갚으라고 하는 거다.

속상한 마음이 들어 돈을 어디다 쓰는지 살펴보면 줄여도 시원찮은 판에 공무원 수를 늘린다고 한다.

코로나 경제 위기를 견뎌내고 야근하고 세금 따박따박 내고 불철주야 일하면서 정부를 먹여 살리고 있는 우리 국민들이다.

좌파는 어느 순간부터 우리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을 외면해 버리고 있다.

흑역사도 역사인데 어떻게 과거를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민주화의 토대가 된 그 역사적인 장소들을 누가 만들어 놓았냐,,

고속도로가 없었다면 국민이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올 수 있었을까,,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도로가 깔려 있고 수도꼭지만 틀면 깨끗한 물이 나오고 열심히 하면 누구나 세계적인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는 나라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냥 창조된 건가,,

불과 70년 전만 해도 말 그대로 우리나라는 거지 국가였다.

좌파 정권은 국민을 벼락부자도 아니고 벼락거지로 만들고 있다.

깨끗한 물도, 먹을 것도, 도로도, 일자리도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던 나라였다.

이런 나라에 인프라를 깐 게 소위 말하는 산업화 세대다.

너네가 틀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있지,,

그분들의 노고를 기억하고 고마워해야지,,

이 세상에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유토피아는 없어,,

죽을 힘도 다해도 될까, 말까가 팩트야,,

진짜진짜 노력을 하고 땀과 눈물 없이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정치도 진정성 있는 노력을 보어줘야지 사탕발림을 하면 국민들은 속지 말고 대안이 있는지 꼭 확인을 해봐야 한다.

좌파정부에게 많이 속았지 않나,,

그만 속고 우파들은 백 마디 말보다 결과를 보여줘야 한다.

탄탄한 사상과 현실적인 정책, 선거로 보여주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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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06 1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일보만큼 선동 날조 왜곡 잘하는 언론사도없지 1등언론사인것만 더 공고해졌다?ㅋ그 무지한 노인네들이 가장좋아하는 언론사 ㅎ조선일보가 안망한이유를 저렇게설명하다니~!풋! 보수에서 불리한건 거대거악비리도 축소은폐보도! 좌파쪽보도는 확대보도~! 주가조작 허위경력 본부장비리 장모땅투기 보도는 총 3회 12분이내 보도ㅡ11만원소고기 30만원초밥은 122분보도~! 없는사실 팩트없이 지어내서 흠집기사쓰고 고발들어오면 아님말고식의 사과기사낸게 한두번인가? 모르면 조선일보의 상습적 왜곡보도에 정정기사 사과기사낸 과거좀찾아보시지~조선일보의 행태를이렇게나 모르는군~! 공정보도제일 안하는곳이 조선일보인데 기득권카르텔 조선일보가 진실해서 안망한거라생각하는건가ㅋ참 단순하네 ~ 촛불집회사람들이 매섭고무섭다?ㅋ오히려 집회현장은 사람들의눈빛은 평화적이다 윤석열유세현장가봤나? 노인들이 독기풍은 살인자들의 눈빛으로 빨간띠를 머리에메고 기둥을들고 흔들어재끼며 군복을입고나와 소리를지르며 분노와혐오분위기를 부추긴다 반대시위한 딸뻘되는 여학생도 무식하게 집단폭행하는것들이 당신들이다 (이런건 보도절대안하는 조선일보만 뺀 뉴스, 유튜브영상참조)
 
굴욕 없는 출산 - 우리는 출산을 모른다
목영롱 지음 / 들녘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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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과 출산은 엄청난 축복같고 여성이라면 결혼해서 꼭 겪고 싶은 일일 것이다.

저자는 출산 없는 페미니즘은 가짜라고 한다.

출산얘기들만 모아서 들려 준다고 하는데 흥미로운 것 같다.

남들이 겪어서 들은  임신과 현실의 임신은 또 틀리나보다.

저자 목영롱은 강원도 양구 분만 취약지역 (산모 거주지에 산부인과가 없는 지역)에 거주하며 임신 과정을 보낸 대한민국 30-40대여성이다.

양구에 산부인과가 없어서 춘천의 대형 산부인과로 초음파, 진료 및 검진은 다녔으며, 막달에 자연주의 출산을 결심, 의료 형평성에 있어서 서울 - 지방간에 격차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진통 당시 경기도에 위치한 얼마 남지 않은 조산사 중 실력 있다고 인정받은 조산사의 도움을 받으려 했으나 진행이 원활하지 않아 강남 성모 병원에서 3일 진통 끝에 20194월 출산, 출산 이후이전 세계가 부서지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인지적, 사상적 변화를 경험했다.

지방에는 산부인과도 없다면 임신한 여자들은 모두 큰 도시에서 살아야 하는 것 같다.

아이를 낳는 것까지 이렇게 차별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출산의 의미는 한마디로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사랑은 이런 거야 라고 딱 잘라 말하는 게 어려운 것처럼, 그러나 출산은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고 한다.

저자는 ​가장 긴 시간 동안 몸이 아팠고, 가장 오랫동안 치욕스러웠으며, 주변의 이해와 도움, 격려의 손길을 몹시도 갈구했지만 엄마라면 당연히같은 통념이 산모의 외침을 외면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모든 여자들이 경험하는 출산은 숭고하지도 위대하지도 않다는 것 같이 여기는 것 같다.

저자는 ​참을 수 없이 경박스럽고 비인간적이며 폭력적인 사회의 민낯을 출산에서 경험했다고 한다.

덕분에 출산이라는 개별적이고 보편적인 체험을 우리 사회를 속속들이 들여다보는 새로운 고밀도 현미경이자 세상을 파악하는 더듬이로 삼을 수 있었다.

더불어 출산이 가져온 신체의 변화와 복잡한 내면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꾸준히 발버둥쳤다고 한다.

저자는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본인 스스로가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저자는 어떤 얘기보다도 출산을 이야기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을 쓰는 동안 분노와 오기와 회한과 일반의 사명감이 마구 뒤섞여 몹시 고단했다고 한다.

저자가 글을 마무리할 즈음, 202011월 산후조리원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임신과 출산, 그리고 출산을 이제 막 마치고 엄마가 된 이들에 관한 이야기인데, 배경이 산후조리원 이었다.

회사 임원인 주인공은 잘나가는 커리우먼으로 엄마가 되는세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신참이다.

나이가 좀 있는 전문직 여성, 연하 남편, 고령 출산이라는 극중 키워드는 초산 연령이 20대에서 30대를 넘어 50대 까지 늦춰지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때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출산하는 과정에서 죽을 만큼 아픔을 겪고나서 간신히 출산에 성공한다.

현대의 출산이라고 해서 옛날보다 결코 순탄할 것은 없다는 사실을, 여전히 여성이 자기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출산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엄마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도 아이를 보며 안도의 한 숨을 내쉬기도 전에 새로운 난관에 돌입할 수 있다.

출산을 마치면 젖몸살, 수면 부족은 물론 모유 수유와 모성에 대한 압박까지 억눌러 온다.

엄마이전에 여성이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어떤 직업의 소유자인지는 하나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름과 직업, 개성이 모두 사라지고 오직 모유가 잘 나오는지, 젖을 잘 먹이는지가 중요하다.

저자는 ​산후조리원의 이 같은 현실은 엄마가 된 기쁨보다 더 슬프고 화가 나고 괴롭다고 한다.

저자는 대다수 여성들처럼 출산이 무엇인지,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그 모든 과정을 겪었고, 겪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정말 많이 당황하고 많이 놀랐다고 한다.

저자 역시 대학원을 나와서 직장을 얻고, 수많은 것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살아가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조금은 소홀했다고 한다.

​저자는 엄마가 되고 마음먹고, 엄마 되기를 준비하면서, 그리고 엄마가 된 다음 비로소 고민과 갈등의 종합선물세트를 손에 들고 전전긍긍하는 낯선 여성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은 그런 여성의 기록이라고 한다.

내친구는 이번에 세종대교수가 되었다.

그 친구는 나한테 왜 결혼을 해서 애를 낳고 희생을 하며 힘들게 살아야 하냐고 했다.

자기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결혼해서 남편이랑 애들한테 부대끼면서 살아야 하냐고 했다.

나한테도 넌 남자한테 관심도 없고 지금까지 혼자였는데 쭉 혼자인게 쉽지 누군가를 만나는게 쉽냐고 했다.

공부나 책이나 읽고 나중에 전문직을 가지고 혼자 살라고 했다.

난 남자한테 관심 있고 하나님뜻이 혼자 사는 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친구는 남자애들이 너보고 남자애들을 전부 무시하고 원장수녀님이냐고 한다고 했다.

난 남자애들을 무시한 적이 없다고 하니까 넌 눈빛 자체가 걔네를 무시하고 책읽어야 한다고 전화하지 말라고 해서 너무 황당했다고 했다.

 

 

나이가 들면 엄마가 되나 신기한 것은 누구나 저출산을 입에 올리지만 왜 출산에 관한 담론이저 출산'만 있는가 하는 점이다.

출산이 애국인 것처럼 열을 올리지만 막상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해결해야 할 여기 저기 산적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개인의 선택이라며 모두가 나 몰라라 한다.

심지어 지 새끼 지가 키우는데, 뭐가 힘들어?” “자기가 좋아서 아기 낳고 왜 사회한테 책임을 떠넘겨? 뭘 그렇게 요구하는 게 많은지!” "요즘처럼 애 키우기 좋은 때가 어디 있어?" 하면서 험담을 퍼붓기 일쑤다.

묘한 것은 이들이 사용하는 표현은 제각기 다른데 듣는 사람은 하나같이 엄마라는 존재의 원형을 떠올리게 된다는 점이다.

마치 엄마의 엄마같은 본인의 엄마를, 그 엄마의 엄마를 떠올리도록 강제하는 제스처와 언어들이라니! 너무나 폭력적이지 않은가?

가장 흥미롭게 여긴 점은 우리 사회가 나이든 여성을 대하는 태도다.

 일단 나이 많은 여성은 모두 엄마로 취급한다.

나이 든 여자결혼한 여자(당연히)애 엄마란 공식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면화하고 있다.

출산을 하지 않은 여성을 의무를 다하지 않은 이기적인 여자로 취급하는 시각 또한 여전하다.

여성은‘유명인사'가 되지 않는 이상 어른으로 예우받지 못한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족과 국가의 전폭적인 눈총 아래 결혼과 출산을 종용 당한다.

​저자의 남편은 교사, 사위라는 역할에 아빠라는 역할이 더해졌을 뿐 특별한 변화를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반면 저자의 경우 아내, 교사, 며느리라는 역할에서 교사가 빠지고 그 자리를 엄마가 대신하면서 역할의 우선순위 또한 엄마, 아내, 며느리로 재배치되었는데, 저자는 솔직히 이 부분에서 혼란과 고통, 압박을 경험했다고 한다.

남편은 그 어느 부분에서도 엄마인 저자보다 절박해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결혼과 출산으로 인해 기쁘고 고달프다면 남편은 고달프긴 하지만 만족스러움이 더 큰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면서 사회구조에 대해 고민하고, 교육시스템과 피부에 와 닿는 복지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고 한다.

여성이 결혼과 출산, 육아를 통해 날마다 새롭게 눈을 뜬다면 남성들은 거의 모든 일에 제로섬상태에 빠진다고 한다.

대다수 남성들의 이성을 잠식해나가는 것일까? 사회 분위기도 마찬가지다.

​남자를 주양육자로 인정하지 않는 탓에 아무리 법이 남자의 육아휴직을 보장해준다 해도 현실에서는 거의 무용지물이다.

한국의 아빠들이 정시에 퇴근하지 못하고 공동육아에 참여할 여유를 갖지 못하는 배경이다.

경제적 능력이 월등하여 육아를 도맡아줄 입주 전문가를 고용하면 좋겠지만 대다수 엄마들은 그렇게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이 든 엄마(부모님)들의 희생을 지켜보는 고통 역시 고스란히 젊은 엄마의 몫이다.

부모에게 맡기면  그 고통과 안타까움, 미안함이 든다고 했다.

결국 출산은 부부사이를 위협하는 큰 갈등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육아 문제가 가정 내에서 큰 갈등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했다.

아빠들도 육아를 도우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엄마는 사회에 나가면 직함이 많다.

교수님, 목사님, 원장님, 박사님이라고 사람들이 부른다.

하지만 우리 엄마는 언제나 아빠가 불러주는 여보, 딸이 부르는 엄마라는 호칭이 제일 좋다고 하셨다.

그래서 나도 엄마처럼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남편에게 여보와 아이에게 엄마라는 호칭을 듣고 싶다.

간접적이라도 알고 싶어서 책을 읽는데 인생사의 모든 면이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닐거다.

역시 힘든 점도 많은 것 같다.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협찬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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