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대문을 활짝 열어뒀기 때문이다. 문지방을 닳게 만든 건 본인 자신이었다. 속에서는 천불이 나고 억울함에 피가 거꾸로 솟는데 입 밖으로는 습관처럼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를 내뱉었다. 하고 싶은 말은 입안에서 피처럼 돌다가 식어버렸고, 삼킨 말들을 목구멍에 ‘미안함’이라는 거대한 혹으로 남았다.
그 혹은 점점 커져 나중에 숨쉬기조차 힘들게 만들었다. 저자는 더 이상 참지 않기로 결심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감정 배출구로 쓰던 인간들, 필요할 때만 찾던 껍데기들은 떨어져나갔다. ‘착하다’라는 말보다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 본인의 색깔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입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뱉어야 한다, 이제는 자신의 말로, 자신을 가두던 세상을 베어낼 차례다. 더 이상 침묵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의 침묵은 평화가 아니라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많은 사람들은 착각하는 공식이 있다. ‘내가 입을 다물면 상황이 조용해진다. 조용해지면 평화가 온다.’ 틀렸다. 완전히 틀렸다. 자신이 입을 다물어서 찾아온 고요함은 평화가 아니다. 그건 복종이다.
자신의 침묵은 상대에게 “당신들의 마음 대로 뜻대로 짓밟아도 된다.”는 프리패스였다. 당신은 그저 싸우기 싫어서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 그들은 당신의 침묵을 동의로 해석하고 당신의 영역에 흙발을 들여 놓았다. 한 번의 침묵은 실수일 수 있다. 두 번의 침묵은 습관이 되고 세 번째의 침묵은 영구적인 서열이 된다.
그 순간 관계는 대화가 오가는 인간관계가 아니라 명령과 수행만 남은 노예 계약으로 변질된다. ‘이 사람은 밟아도 되는 사람인가, 아닌가.’ 반응이 느린 사람, 싫은 소리 못하는 사람, 무례한 농담에도 허허 웃으며 넘어가는 사람을 보면 상대의 뇌는 즉시 판단한다. 아, 얘는 샌드백으로 써도 되겠다. 착한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한 이유는 성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말이 없기 때문이다.
자기감정의 깃발을 꽂지 않으니 상대가 그 땅을 자기 땅이라고 우기는 것이다. “여기, 평화를 지키려다 호구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 잠든다.” 세상에는 남을 깎아내리는 것을 인생의 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조각가라고 부른다. 물론 그들은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는 투박한 돌덩이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지만, 이들은 멀쩡한 사람을 깎아 내려 부스러기로 만든 파괴자들이다. 그들의 태도를 한번 봐라, 아주 가관이다. 눈빛은 이글거리고 손길은 섬세하다. 마치 로댕이 되어 불멸의 명작⟨생각하는 사람⟩이라도 조각하는 줄 알겠다. 정과 망치를 들고 상대의 뱃살, 말투, 옷차림, 성격을 아주 디테일하게 깎아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