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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제자들 그리고 나치 - 아렌트, 뢰비트, 요나스, 마르쿠제가 바라본 하이데거
리처드 월린 지음, 서영화 옮김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3월
평점 :

하이데거의 책을 펼치고 책장을 넘기니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책 내용은 분명히 좋은 것 같고 번역을 잘 한건지 문체가 바로 빠져 들게 했다.
그래서 점심 먹는 시간도 1시간이나 늦어졌다.
이 책은 하이데거의 제자들의 관점으로 하이데거를 분석한 책이다.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자인데도 유대인 제자들이 많았다.
이 책의 하이데거의 제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은 독일 문화권에 속해 있고 세대적으로 소속되어 있고 하이데거 초기 철학의 실존론적 방향성에 실질적으로 전념했음이 증명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강의와 세미나에 비유대적 유대인들이 몰려 들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와 동시대 유대 사상 간의 숨겨진 관련성과 예상치 못했던 공통점은 전승된 이항 대립과 분류를 극히 유행하는 방식대로 해체하는 것이다.
비판적, 경험적으로 접근했을 때 그러한 이항 대립은 동시에 필수적인 해석학적 열쇠를 제공하고 방향을 지시할 수 있다.
헤겔은 모든 것은 사태 자체에 의존한다.
모든 것은 제기되는 질문의 유형에, 그리고 우리가 설명하고자 시도하는 주제의 성격에 달려 있다.
하이데거는 니체에 충성했다.
저명한 역사학자는 나치즘은 국가적 트라우마, 정치적 극단주의, 그리고 폭력적인 갈등과 혁명적 격변의 분위기 속에서 태어났다.
소수의 범독일 극단주의자들을 도취시켰던 혐오, 공포, 그리고 야망이 뒤섞인 자극적인 혼합물은 갑자기 결정적인 추가적 요소인 물리적 힘을 사용하기 위한 의지와 결단을 획득하게 되었다.
국가적인 굴욕, 비스마르크 제국의 몰락, 사회민주주의의 승리, 공산주의의 위협, 이 모든 것은 범게르만, 반유대주의자, 우생학자, 그리고 초국수주의자들이 세기가 바뀌기 전부터 옹호해왔던 방안들을 실행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데거는 유대인 공동체는 형이상학의 시대에 파괴의 원리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역사상 자기-파괴의 절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은 형이학적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유대적인 것이 유대적인 것과 투쟁할 때뿐이라고 한다.
아우슈비츠와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유대인들은 근대 기술의 제공자로서 그들 자신의 형이상학적 운명의 과잉과 약탈에 굴복했을 뿐이다.
이 주장은 반유대주의적인 정치적 이미지를 열광적으로 투영했을 경우에만 '참'이다.
사르트르가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만일 유대인이 현존하지 않았다면 반유대주의자가 그들을 발명했을 것이라고 했다.
이것이 바로 하이데거가 근대 신화로서 세계 유대인들을 재창조하면서 한 일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하고 혼란스러운 홀로코스트에 대한 해석에서 유대인들은 단지 그 자신의 형이상학적 명민함의 희생자일 뿐이다.
존재역사의 순화된 관점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본질적으로 그 자신의 손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하이데거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의 대량 전멸에는 시적 정의의 요소가 있다고까지 할 수 있다.
서구 근대성의 쇠퇴에 대해 역사적인 책임을 갖는 집단으로서 그들은 단지 그들이 뿌린 씨앗을 거둔 것일 뿐이라고 한다.
한스 게로르크 가다머는 1920년대 초반의 시대 분위기는 비타협적인 문화적 급진주의의 동기에 대해서 얘기했다.
독일에서 키르케고르를 새롭게 수용하는 분위기에서 당대 진리에 대한 주장은 그 자체로 실존론적이라고 했다.
실존주의는 보편적으로 제기된 명제나 지식의 견지에서 증명되는 진리가 아닌 자신의 고유 경험의 직접성 속에서 그리고 실존의 유일무이한 특수성속에서 증명되는 진리를 다루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실체 형이상학을 해체해야 한다고 호소한 하이데거는 관습에 대한 저항이 극에 달해 전통적인 철학의 어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존재와 시간에서 하이데거는 반드시 처음부터 재창조하는 것이 필수적이라 믿었다.
그의 걸작에는 손안의 존재, 죽음을 향한 존재, 존재 전체의 가능성 등등의 크고 무거운 신조어들이 넘쳐난다.

하이데거의 철학적 출발점은 현사실성 혹은 실존, 즉 최소한의 존재론적 의미로 환원되는 세계-내-존재, 혹은 현존재와 함께 철학을 시작했다.
이와 반대로 로젠츠바이트의 경우, 그의 신학적 열망과 전적으로 일치하는 방식으로 철학은 신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 혹은 창조된 삶에서 시작해야 한다.
성취의 전망이 긴급한 구원 가능성에 달려 있는 철학은 타락한 인간성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궁극적 목적을 규정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할 때 그들의 차이는 보다 극명해진다.
로젠바이크에게 있어서 인간 실존의 궁극적 목적은 무한하고 영원한 구원을 통해 피조물로서의 삶, 즉 시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반대로 하이데거에게 있어, 유한으로서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래성에 이르는 열쇠일 뿐만 아니라 인간 실존의 완벽한 범례에 해당한다.
로젠츠바이크의 경우 죽음은 초월을 향한 길 위의 중간역, 즉 영원의 이름으로 인간성을 유한성의 고역으로부터 해방하는 더 높은 형태의 존재로 향하는 자기성과 무한한 객관성의 빛나는 명료성 사이를 잇는 다리라 볼 수 있는 것에 관한 물음에 의해 추동된다.
"구원의 별"에서 극도의 주체성과 무한한 객관성의 두 계기를 매개하는 연결고리는 계시이다.
세속주의 사도들이 한계와 결핍으로 인식하는 유대인의 비역사적 민중으로서의 지위는 특히 그들이 영원과 구원의 약속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이데거의 실존은 로젠츠바이크의 접근 방식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의 유한성이라고 하는 불안이 들끓는 변전에 돌일킬 수 없을 정도로 빠져 있다.
그의 실존론적 존재론은 초월이 영구히 폐기되었다고 전망하며 신에게 버림받은 인간 조건의 본성에 열중한다.
남겨진 것은 구원에 대한 희망을 빼앗긴 채 세계-내-존재라는 극복 불가능한 진리로서 절망스러운 현실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반유대주의이고 마르스크주의이고 한나 아렌트와 바람을 피웠다.
교회사람들이 바람을 핀 남자는 사람이 아니니까 바로 손절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하이데거를 읽어야 하는데 하이데거라고 얘기를 안해서 그냥 일반 남자인줄 알았나보다.
하이데거를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상가로 봐도 되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그는 사실상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일에 한 때 손을 댄 사람일 뿐만 아니라 광적인 반유대주의자이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은 도구적 이성을 이끄는 매개체였으며 아우슈비츠와 다른 몰살 현장에서 진보한 과학기술에 의해 살해되었다.
하이데거는 유대인들의 제거를 악의적으로 일종의 집단 자살로 기술한다.
전쟁 후 연합군이 독일을 거대한 강제수용소로 바꿔놓았기 때문에 독일인들이 전쟁의 실질적 희생자라는 것이다.
나치 박해의 희생자들에 대한 하이데거의 공감 능력 부재는 냉담하고 용납할 수 없는 도덕적 무관심을 가졌다.
국가사회주의의 끔찍한 악행을 하찮게 보이게 만드는 하이데거의 불온한 노력, 그것도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실질적 가해자인 독일인들을 역사적 책임에서 면제사ㅣ켜 주려는 노력은 그의 제거주의적 반유대주의 고백과 결합되어 그를 더 이상 훌륭한 사상가로 볼 수 없다.
요즘에 하이데거의 옹호자들이 하이데거 전집에서 반유대주의 부분을 삭제하려고 했다고 한다.
잘못인 건 아는가보다.
난 이엠바운즈의 8권으로 된 기도전집을 한 번 읽고 두 번째 읽고 있다.
이제 8권째 읽고 있는데 기도에 대해서 항상 궁금하고 성경책보다 더 깊은 내용을 원했다.
그 전에 기도에 대한 책들을 무수히 읽어서 그 책들도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기도전집을 읽고나니까 기도에 대한 많은 의문들이 풀렸다.
기도생활하는 것도 더 좋아졌다.
하이데거의 전집은 97권이다.
그런 쪽으로 전공하는 사람들이 전집을 읽으면 많은 도움이 되기는 할거다.
하이데거는 도덕적인 사려를 존재론적 탐구 혹은 존재물음에 못 미치는 것으로 공개적으로 조롱했다.
윤리적 문제를 과소평가하면 안 되는데 그는 반휴머니즘을 선언한다.
카를 야스퍼스는 하이데거의 사상을 부자유하고 독재적이며 의사소통 능력이 부재하다고 했다.
나도 하이데거를 읽어 보니까 야스퍼스의 의견이 맞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하이데거는 학교 다닐 때 실존주의 철학자라는 인식만 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더 깊게 그를 알게 돼서 좋았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