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입장 차에 따라 처삼촌 부자를 성토하는 것은 물론 통문 자성을 직접 주도한 셈인데, 이런 풍경은 다산이 얼마나 정치적 책략에 능했던가를 보여 준다. 이 밖에도 《눌암기략》에서는 다산과 이승훈 등이 자신들을 타깃으로 배척 상소를 올리려고 하는 성균관 유생들이 개별적으로 으르고 위협해 무력화시키는 동시에, 체제공의 뜻을 움직이려고 말을 부풀리거나 없는 일을 꾸며 사달을 만드는 장면이 자주 목격된다.
사학을 배우는 사람이 없는 듯하나, 사학을 두둔하는 풍조는 신유년 이전보다 심한 점이 있다. 이기환과 정약용이 독한 심보를 부리던 때에는 반드시 정론과 다투어 이겨 선한 부류를 해치려고 거짓말을 만들고 비방을 조작해서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것이 대체 무슨 심보이며, 또 무슨 의도인지 모르겠다. 어리석고도 현혹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조금 뒷날의 일이기는 하지만 특별히 1799년 여름 다산과 대단히 가까웠다 이익운이 영춘헌에 입시해 정조를 만났을 때 정조와 나눈 대화도 인상적이다.
주상께서 ” 정약용이 경의 단점을 많이 말해 내게 들리게끔 한다. 어떤 이는 그 사람이 믿을 만하지 않다고 하고, 어떤 이는 권위가 채제공보다 열 배나 된다고 하며, 어떤 이는 남인 쪽에 보탬이 없다고 한다. 이석 또한 경의 일에 대해 자꾸 드러내어 지적하는 것이 서인들보다 심하니, 내가 그 까닭을 알지 못하겠다. 경이 이들에게 거슬림을 입은 것은 어찌하여 그런 것인가?" "약용은 신이 이조참판으로 있을 때 그 형 정약현을 위하여 여러 번 첫 벼슬을 구하였지만 신이 한 번도 물망에 올리지 않자 과연 크게 원망을 품었습니다. 금년정초 이후 한 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다산은 이정운⸱이익운 형제와 대단히 친밀한 사이였고, 특히 이익운과는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다산과 이벽의 동생 이석 등이 왜 그대를 계속 비방하느냐는 물음에 이익운은 다산이 큰형에게 음직으로 벼슬을 내려줄 것을 청탁했는데, 자신이 들어주지 않자 유감을 품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지는 글에서 이익운은, 이석의 경우 형 이격이 혼사를 청했을 때 그가 무관인데다 사람됨을 좋지 않게 여겨 거절한 일때문에 그런 모양이라고 대답했다.
정조가 이에 두 사람의 말을 듣고 괴이하다고 의심했는데 말을 듣고 보니 까닭을 알겠다고 말했다. 이익운과 다산이 훗날 틀어진 것은 채체공과 얽힌 문제로 정파적 입장이 갈린 때문이겠지만, 정조 또한 다산의 이 같은 모나고 강파른 성향을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금정찰방 시절 이도명과 등과의 설전에서나 윤취협에게 보낸 편지 등에서 그런 면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다산은 결국 중앙에서 발을 붙이지 못한 채 다시 곡산부식사의 직을 받아 황해도 깊은 산골로 떠나야 했다.
1797년 윤 6월 6일의 일은 다양했다. 금정에서 이존창을 검거하고, 서암 강학회를 주도 했으며, 〈도간사수록〉을 집필하고도 천주교의 협의를 벗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변방소〉라는 회심의 카드를 내밀었지만 임금과 대신들은 입으로만 칭찬하고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이삼환의 충고대로 ‘변명하자 말라’ 는 가르침을 따랐던 것만 못한 결과를 낳았다. 정조는 앞서 살핀 〈자친묘지명〉에서 다산을 곡산부사로 내려 보내며 ‘지난번 상소’ 가 훌륭해 한차례 쓰려 했으나 의론이 괴롭게 많아 외직에 잠시 보내는 것이니, 한두 해 늦더라도 서운하게 여기지 말라고 위로했다. 애를 쓸수록 도리어 역효과가 났다.
다산의 위의 글을 쓰고 나서 “ 당시 귀신들로서 참소하고 미워하는 자가 많으니, 주상의 의사는 약용으로 하여금 외직에 수년간 있게 함으로써 냉각기를 두려 한 것이다”라고 썼다. 다산은 이 말을 쓰면서 가슴이 아렸을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도 이때 다산은 한 번 더 분루를 삼키며 도성을 떠나야 했다. 이날 어전을 물러나며 쓴 시 한수에 다산의 심경이 오룻이 담겨 있다. 제목은 ‘장차 곡산으로 가면서 궁궐을 떠나던 날, 서글퍼서 짓다’ 이다. 송나라 때등원발과 소송 이야기3〜4구에 인용했다.
다산의 일기는 객관적 동선을 설명하고 있으나, 그에 선행하는 의도가 있다. 천주교 문제는 숙명처럼 다산의 발목을 잡았다. 임금 정조가 다산을 그토록 아꼈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드러내놓고 편들 수가 없었다. 시기적으로 주문모 신부 실포 사건에서 1797년 곡산부사 취임 직전까지 다뤘고, 이 기간 다산은 천주교와 표면상 적대적 자리에 서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도 못했다. 다산에게 천주교는 이른바 양날의 검이었다. 다산이 천주교에 등을 돌려 전향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천주교 지도자 검거에 앞장섰어도 아무도 그의 진실성을 믿어주지 않았다.
비방은 점점 커지기만 했고, 그는 끓임 없이 자신의 결백을 입증해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일기는 이 같은 안간힘의 결과라는 점에서 모순의 덩어리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시기의 다산은 천주교와 군주 사이에 길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기는 자신의 삶에서 천주교의 흔적을 어떻게 지워내려고 애쓰던 시절의 기록일 수 있었던 사실을 부정하고, 속마음으로 따른 일에 고개를 저으면서, 자신이 혐오하고 경멸하던 지들에게 자신의 진정을 믿어달라고 쓴 기록인 까닭이다.
천주교 지도자 검거와 성호악의 정리 주도로도 자신의 상황은 종결되지 않았다. 움직이기만 하면 비방과 비난이 따라왔다. 천주학을 버렸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했고, 정학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술수를 부리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다산의 일기를 통해 드러나는 일부 부정합과 첨예한 갈등 속에는 다산과 그 시대가 맞닥뜨렸던 거대한 모순이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어느 한쪽의 잘잘못을 따져 편을 갈라 시비를 가리고야 말겠다는 태도는 오히려 사실과 진신을 호도할 수 있었다.
난 이승만책을 읽고 대한민국을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것은 전부 궁금하고 알고 싶어서 고조선에 대한 책까지 읽었다. 우리민족의 뿌리가 동이족이고 동이족이 한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 책도 대한민국을 사랑하고 그와 관련된 조선과 정약용이라는 인물까지 확장하는 입장에서 읽었다. 옛날 언어라서 어려웠고 그 시대에도 가짜 뉴스때문에 힘들었고 정쟁과 새로운 천주교에 대한 갈등과 임금과 주변 사람들과의 정치적 갈등때문에 인간관계도 끓기는 것을 보았다. 요즘과 너무나 비슷한 모습으로 오버랩돼서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