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순환 끊는 방법은 단순하다. 매일 아주 잠깐이라도 스스로의 문장을 써보는 일이다. 그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이론을 인용하지 않아도 된다. 단 한 문장이 완벽하지 않아도 스스로의 어조로, 스스로의 어휘로, 스스로의 맥락을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그 문장 하나가 타인의 알고리즘이 아닌 자기 사고의 단서가 된다.
NPC처럼 보이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생각의 방향을 바꾸는 힘을 잃은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이 정한 박자에 맞춰 움직이지만, 왜 그 박자인지를 묻지 않는다. 반대라고 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 그 또한 불확실성과 혼돈 속에 산다. 다만 한 가지 차이가 있다.
자신의 혼란을 의식한다. 이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주권이다. 확신 대신 의심을, 안정 대신 관찰을 택하는 태도, 그 태도가 우리를 다시 인간으로 만든다. NPC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속도에서 벗어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도를 인식한 채로 자기 리듬을 세우는 일이다. 감정을 휘두를 때, 자극이 몰려올 때, 우리는 잠시 그 리듬을 의심해야 한다.
이건 내가 느끼는 분노인가, 아니면 설계된 분노인가, 이건 내가 선택한 루틴인가, 아니면 추천된 루틴인가, 이건 내가 찍은 사진인가, 아니면 누군가가 찍으라고 한 순간인가, 이 질문을 버리지 않는 한 완전히 자동은 불가능하다. 시스템은 여전히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자신은 그 안에서 ‘다르게 움직이는 점’으로 남을 수 있다. NPC에서 벗어나려는 일은 완결형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평생의 반복이다. 세상이 던지는 언어와 감정, 구조와 루틴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벗겨 세우는 끊임없는 조정이다. 오늘의 결심이 내일의 자동으로 변하지 않도록, 매일 다른 각도로 질문을 갱신하는 일이다. 완벽한 자율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유의 흔적은 남는다. 그 흔적이 많아질수록 사회의 루프는 느려진다. 루프가 느려지면 틈이 생긴다. 그 틈에서 새로운 언어가 태어난다.
그래서 진짜 탈출은 지도 위에 없다. 오직 고민의 지속 속에만 있다. 내가 세상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 그 질문 하나를 매일 새롭게 던지는 것 그게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 남는 유일한 방식이다. 난 오랫동안 국제정세와 패권전쟁에 대한 책을 읽고 읽고를 계속 했다. 뉴스도 외국 뉴스를 보는데 우리나라 뉴스와 왜 이렇게 다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뉴스가 왜곡되거나 가짜뉴스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건 중국투자를 받아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중국이 전 세계를 경제, 선거, 정치, 엔터테인먼트, 에너지, 사이버로 개입한다는 얘기를 책에서 읽었다. 중국이 미국, 아프리카, 캐나다, 이태리, 프랑스, 캄보디아, 동남아, 호주에 개입한다고 했다. 책을 읽으면서 게속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윤석열 대통령이 계엄을 해서 알아 보니까 중국옆에 있는 우리나라도 안전하지 않았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많이 개입하고 있었고 홍콩의 초반과 많이 닮아서 언론이 제대로 뉴스를 내보내지 않았고 공산화를 시키는 입법들을 통과시키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정치에 관심을 안 가지면 내가 사랑하는 나라가 공산화가 되는 걸 지켜봐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외국 뉴스를 계속 보고 책을 찾아보면서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로 계속 지키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을 한다. 그게 나에게는 npc에서 벗어나는 것인 것 같다. 계속 공부하고 책을 읽고 전 세계 정보를 검색하고 사유하고 의심하고 생각하는 것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