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라는 개념-상업적 *농업적* 독점적* 금융적*제국주의 등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형태를 바꾸었다 해서 자본주의 본질을 변화로 본 마르크스 이론을 왜 불신 한다는 것인가?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계급이 쇠퇴하고 화이트칼라 노동이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이 ‘낡은’ 면모야말로 오늘날에도 그를 여전히 유효하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빅토리아 왕조 수준의 불평등으로 급속히 회귀하는 자본주의 옹호자들한테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 받고 있으니까.
사회주의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탈자본주의 경제의 세부 사항에 대해 계속 논의할 것이다. 이런 불완전성을 자본주의 경제-흠잡을 데 없이 작동하면서 이제껏 소규모의 빈곤이나 쓰레기나 불황에도 단 한 번 책임져 본 적이 없는 체제-와는 사뭇 대조 된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는 어마어마한 실업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결함에 대해서도 세계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국가는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 있지 않다면 일자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단지 역사적으로 본다. 자유와 개성을 박탈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철칙을 믿었는데, 이 법칙은 거침없는 스스로 실현하며, 어떤 인간적 행위로도 저항할 수 없다. 봉건주의는 자본주의를 낳을 운명이었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에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 역사이론은 섭리나 운명의 세속 버전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 이론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것은 어려움이나, 고통, 폭력이나 갈등이 없는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는다. 공산주의의 아래서는 어떤 대립이나 이기심, 소유욕, 경쟁, 불평등도 없다. 누구도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누구도 일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서로 완벽한 화합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물질적 재화의 흐름은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어떤 사회공학도 이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 된다. 마르크스의 천진난만한 미래 비전은 그의 정치학 전반에 걸쳐 터무니없는 비현실성을 반영한다. 다른 대부분의 유토피아 작품들과는 달리 정치적 변화의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자세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 마르크스는 고통, 죽음, 상실, 실패, 갈등, 비극, 혹은 심지어 노동이 없는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 경제 결정론의 한 형태다. 예술, 종교, 정치, 전쟁, 법, 전쟁, 도덕, 역사적 변화, 이 모든 것들을 가장 조악한 관점에서 단지 경제나 계급투쟁의 반영으로 간주한다.
참 착한 마르크스는 자신이 반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거꾸로 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에게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단순화이다. 그의 관점에서 역사의 진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계급투쟁이며, 계급은 경제적 요인으로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집단을 계급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혁명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해 썼다.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보다 우선한다면, ‘경제력’ 이란 노골적인 딱지가 뭍은 것이 어떻게 역사의 제1동력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인간의식 단지 물질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인류에 대한 음울하고 영혼 없는 관점에서 스탈린이나 다른 마르크스 제자들의 잔혹성으로 이어지는 명백한 노선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에 대한 지루한 강박보다 더 낡은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