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 - 프로메테우스의 꿈과 좌절
테리 이글턴 지음, 박경장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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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자본론을 읽었는데 지금은 별로 기억나는 게 없는 것 같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이고 노동자를 대변했지만 진짜 마르크스는 귀족이고 하인을 두고 일했고 일을 별로 안 했다고 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사회주의에서 가장 극좌가 되면 공산주의라고 하는데 거기에는 유토피아가 있다고 했다. 마르크스가 뭐가 옳았는지 궁금해서 읽었다.

자유민주주의를 원하고 추구한다. 자유민주주의의 반대가 사회주의라고 생각하는데 그 이론을 주창한 마르크스와 그의 이론에 대해서 잘 알고 싶다. 세계가 점점 사회주의화 되고 있는 시점에서 사회주의가 뭔지 잘 알고 대처할 건 대처해야 할 것 같다. 월남의 공산화, 홍콩의 공산화, 캐나다의 사회주의화,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아프리카의 중국 간첩들의 침투, 지금 우리나라도 법이 사회주의화되었다고 하니까 체재의 인식은 무관심할 수가 없는 것 같다.

공산화는 같은 분배를 키치로 내거는데 분배를 받으면 별로 일을 안 하고 창의력이 떨어져서 국고는 줄어들고 나중에는 분배될 게 없을 것 같은데 그 자원은 어디서 나오는지도 궁금하다. 마르크스가 그것에 대한 아이디어를 주는지도 궁금해서 이 책을 읽었다.

저자 테리 이글턴은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학 평론가, 1943년 영국 샐포드에서 태어났다. 영국 신좌파의 대부이자 문화 연구의 창시자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제자로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옥스퍼드대학교와 맨체스터대학교 영문학 교수를 거쳐 현재 랭커스대학교 영문학 석좌 교수로 있다.

19세기 이후 영미 문학을 주로 연구하며, 문학사상론, 포스트모더니즘, 정치, 이념, 종교 등의 분야에서 50여 권의 저서를 펴냈다. 그중 국내에 소개된 책으로 「미학이론 」 「마르커스주의와 비평」 「우리시대의 비극론」 「성좌와 학자」 「성스러운 테러」 「진실 말하기」「포스트모니즘의 환상」 「비극」등 30여권이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는 말은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자들의 귀에는 음악처럼 들릴 것이다. 그들은 행진과 피켓 시위 현장에서 짐을 챙겨 걱정 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또 다른 지루한 위원회모임에 참여하는 대신, 집에서 행복한 저녁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자가 원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기를 그만두는 것뿐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불교 신자나 억만장자가 되는 것과는 다르다. 그보다는 의사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의사는 환자를 치료하여 더는 자신을 필요치 않게 함으로써 스스로 직업을 박탈하는, 비뚤어지고 자기 파괴적인 존재다.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급진주의자들의 임무는 자기네 목표가 달성되는 자신들을 필요로 하지 않을 지점에 이르는 것이다. 20년 후에도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나 페미니스트가 존재한다면 유감스런 전망이 될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마르크스주의 비판자들은 이 점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마르크스 시대 이래로 자본주의 체제가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에, 이 주장을 보다 상세히 검토하기 앞서, 마르크스가 도전한 이 자본주의 체제가 항상 변화는 성격을 지녔다.



자본의 다양한 역사적 형태라는 개념-상업적 *농업적* 독점적* 금융적*제국주의 등은 마르크스주의 자체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면 자본주의가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형태를 바꾸었다 해서 자본주의 본질을 변화로 본 마르크스 이론을 왜 불신 한다는 것인가?

마르크스 자신은 노동계급이 쇠퇴하고 화이트칼라 노동이 가파르게 증가할 것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어쩌면 마르크스의 이 ‘낡은’ 면모야말로 오늘날에도 그를 여전히 유효하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빅토리아 왕조 수준의 불평등으로 급속히 회귀하는 자본주의 옹호자들한테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비난 받고 있으니까.

사회주의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탈자본주의 경제의 세부 사항에 대해 계속 논의할 것이다. 이런 불완전성을 자본주의 경제-흠잡을 데 없이 작동하면서 이제껏 소규모의 빈곤이나 쓰레기나 불황에도 단 한 번 책임져 본 적이 없는 체제-와는 사뭇 대조 된다. 물론 자본주의 경제는 어마어마한 실업에 책임이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결함에 대해서도 세계 자본주의를 선도하는 국가는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았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감옥에 있지 않다면 일자리를 찾고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 아니다. 그것은 사람을 단지 역사적으로 본다. 자유와 개성을 박탈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의 철칙을 믿었는데, 이 법칙은 거침없는 스스로 실현하며, 어떤 인간적 행위로도 저항할 수 없다. 봉건주의는 자본주의를 낳을 운명이었고,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에 자리를 넘겨줄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 역사이론은 섭리나 운명의 세속 버전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그 이론도 인간의 자유와 존엄에 대한 모독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유토피아를 꿈꾼다. 그것은 어려움이나, 고통, 폭력이나 갈등이 없는 완벽한 사회의 가능성을 믿는다. 공산주의의 아래서는 어떤 대립이나 이기심, 소유욕, 경쟁, 불평등도 없다. 누구도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다. 누구도 일하지 않을 것이고, 인간은 서로 완벽한 화합 속에서 살아갈 것이며, 물질적 재화의 흐름은 끝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공격적이고 경쟁적인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어떤 사회공학도 이것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은 쉽게 간과 된다. 마르크스의 천진난만한 미래 비전은 그의 정치학 전반에 걸쳐 터무니없는 비현실성을 반영한다. 다른 대부분의 유토피아 작품들과는 달리 정치적 변화의 과정이 실제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자세히 보여 주었다.

하지만 ‘유토피아’를 일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 마르크스는 고통, 죽음, 상실, 실패, 갈등, 비극, 혹은 심지어 노동이 없는 미래에 대해서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로 환원한다. 경제 결정론의 한 형태다. 예술, 종교, 정치, 전쟁, 법, 전쟁, 도덕, 역사적 변화, 이 모든 것들을 가장 조악한 관점에서 단지 경제나 계급투쟁의 반영으로 간주한다.

참 착한 마르크스는 자신이 반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거꾸로 된 이미지에 불과하다. 마르크스에게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단순화이다. 그의 관점에서 역사의 진로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은 계급투쟁이며, 계급은 경제적 요인으로 같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 집단을 계급으로 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계급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혁명뿐만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에 대해 썼다. 사회적 관계가 생산력보다 우선한다면, ‘경제력’ 이란 노골적인 딱지가 뭍은 것이 어떻게 역사의 제1동력일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마르크스는 유물론자였다. 인간의식 단지 물질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보았다. 인류에 대한 음울하고 영혼 없는 관점에서 스탈린이나 다른 마르크스 제자들의 잔혹성으로 이어지는 명백한 노선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계급에 대한 지루한 강박보다 더 낡은 것은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글을 쓴 이래로 사회계급의 풍경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특히 그들이 사회주의로 안내해 주리라고 즐거이 상상하는 노동계급은 거의 흔적 없이 사라졌다. 우리는 계급은 점점 덜 중요해지고, 사회적 유동성은 더욱 심해지며, 계급투쟁 이야기가 마녀를 화형시키는 이야기만큼이나 구식이 되어 버린 세계에서 살고 있다.

사악한 자본가만큼이나 혁명 노동자도 마르크스주의 상상력이 낳은 헛것이다. ‘계급주의’라는 괴상한 미국식 개념은 계급이 대체로 태도의 문제인 것처럼 암시한다. 백인들이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느끼는 우월감을 버려야 하듯이,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을 경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개인의 마르크스주의는 전능한 국가를 믿는다.

사유재산을 철폐한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전제 권력을 사용해 통치할 것이고, 그 권력은 개인의 자유를 끝장낼 것이다. 인민이 당에 양보하고, 당이 국가에 양보하며, 국가는 괴물 같은 독자에게 양보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논리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감히 야만적이고 권위적인 정부를 비판했다고 정신병원에 가두는 것보다는 무한히 낫다.

마르크스는 국가에 대해 반대했다. 그가 국가가 시들어 사라지기를 고대했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당치도 않는 유토피아적 희망이라고 반마르크스주의자들이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동시에 그가 전체적인 정부를 열망했다고 비판할 수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가 더 이상 보지 않기를 희망했던 것은 폭력의 도구로서의 국가이다.

공산주의에서 공적 권력은 그 정치적 성격을 잃게 될 것이다. 당대의 무정부주의에 반대하면서, 마르크스는 오직 이런 의미에서 국가가 사라질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라져야 할 것은 특정 종류의 권력으로, 지배적 사회계급의 통치를 떠받는 권력이다. 국립공원과 운전면허 시험 센터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국가를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각으로 바라본다.

국가가 당파적이라는 개념에 무슨 내밀히 공모 같은 것은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분명 최근에 정치 시위에 참가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자유주의 국가는 자본주의와 그 비판자 사이에 비판자가 이길 것처럼 보이는 순간까지는 중립적이다. 하지만 비판자 쪽이 이길 것 같은 순간이 되면, 국가는 물대포와 무장 경찰부대를 앞세워 쳐들어간다. 탱크를 밀고 들어간다.

어느 누구도 국가가 폭력적일 수 있다는 걸 의심하지 않는다. 단지 이런 폭력이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봉사하느냐 하는 질문에 새로운 답을 제시할 뿐이다. “정부가 국제 자본을 위한 업무 대리인이라는, 한때 추문이 된 마르크스의 명제는 오늘날 ‘자유주의’ 와 ‘사회주의’ 둘 다 동의하는 분명한 사실이다. 정치와 자본 경영의 절대적 동일화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형식’ 뒤에 감추어진 수치스러운 비밀이다.

오히려 이는 공공연히 선언된 진실이며, 정부는 이를 수단으로 정당성을 흭득한다.” 그렇다고 경찰, 법원, 감옥 심지어 특수 부대까지 없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특수 부대는 화학무기나 핵무기로 무장한 테러리스트 집답이 날뛸 때는 필요하며, 온화한 성향과 좌파일수록 이 사실을 인정하는 편이 낫다.

국가 폭력이라고 해서 모든 명분이 현 상태를 보존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자본」 제3권에서 국가가 계급을 특정하는 기능과 계급 중립을 지키는 기능을 구분한다. 마르크스가 옳았던 이유는 차별없이 누구나가 일 안하고 잘 사는 세상을 꿈꿨다는 것인데 그 꿈을 꾼 것만 옳앗지 진짜 그런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일한 만큼 공정한 댓가와 기회를 원해야 한다. 공산주의는 모두가 잘 사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만 잘 사는 세상이 되어 있는 걸 공산주의 나라가 증명하고 있다.마르크스는 생각한 저의만 옳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틀렸다.



서평단 이벤트에 참여하여 도서를 제공받아 읽고 솔직하게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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