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이례적으로 매우 많은 책을 읽었던 해였네요.
서평 이벤트로 읽은 책도 있고, 구매하고 먼지만 쌓였던 책도 있고,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직접 구매해서 7월부터는 대략 다달이 10권 정도 읽은 엄청난 독서광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전에도 독서를 좋아하긴 했는데, 그래도 한 달에 2~3권이 고작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동안 얼마나 제가 게을렀는지 반성하게 되네요.
올해 가장 큰 행운은 강유원이라는 인물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의 책은 <역사고전강의>만 읽은 정도이지만,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함과 정독법, 무엇보다 서평가로서의 모습이 저에게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책읽기의 끝과 시작>은 서평 작성에 대한 동기 부여는 확실히 준 책입니다. 물론, 아직 글쓰기/책 읽기 능력은 한참 모자르지만.
어쨋든, 작년까지는 읽은 권 수가 몇 권 되지 않아 뽑기 어려웠던 TOP 10을, 한해의 독서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이전에 한 번 읽었던 것을 다시 읽은 책은 제외하였고, 당연한 거지만 발췌독한 책도 제외하였습니다. 순서는 그냥 저자 이름순으로 나열한 것입니다.
3. 디트리히 본회퍼, <성도의 공동생활>

얼마전에 서평도 썼는데, 참 공동체성과 신앙생활에 대해 구체적이고 유익한 조언이 많이 담겨져 있는 책입니다.
성경 읽기, 찬송, 기도, 중보 기도, QT 등에 실제로 적용해도 될 만합니다. 기독교 신자분들에게는 주저하지 않고 추천하는 책입니다.
*구름책방이라는 유투브 채널에, 이 책을 한 챕터씩 뜯어 읽고 감상을 얘기하는 영상들이 있으니 그곳도 같이 봐주시면 좋겠습니다.
4. 미로슬라브 볼프 <배제와 포용>
제 기준, 올해 베스트 오브 베스트.
정체성, 차별과 배제, 폭력의 문제에 대해 깊은 기독교적 통찰을 보여주는 책입니다.
그동안 답답했던 문제였는데, 이 책을 통해 저는 큰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 읽진 않았지만, <베풂과 용서>(복있는사람)와 <기억의 종말>(IVP)은 이 책의 주제를 좀 더 대중적으로 쓴 책이라 하니, 이 책들을 먼저 읽고 <배제와 포용>을 읽으시면 좋을 듯합니다.

5. 버나드 마넹, <선거는 민주적인가>

대의민주주의, 선거만이 민주주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 의하면, 18세기 이전까지 선거는 귀족정/엘리트주의적 정치와 연결되었고, 오히려 우리가 비민주적이라고 생각하는 추첨제가 민주주의와 연결된 방식이었습니다.
이 책은 고대 아테네의 민주정부터 고대 로마의 공화정, 미국 독립 이후로 시작된 대의정의 기원과 그 특징을 상세히 밝힙니다.
대의민주주의 사회의 정치를 이해할 때 유용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읽었던 고병권 선생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그린비)도 추천합니다. 남을 배제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타자를 포용할 수 있는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도와주는 괜찮은 책입니다.
유재원 선생의 <데모크라티아>(한겨레출판사)는 고대 그리스에서의 민주정 발전의 역사를 개략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니, 이쪽도 같이 보면 더욱 풍부한 독서가 될 것입니다.
<선거는 민주적인가>를 읽고 같이 보며 좋은 정치사상 고전 텍스트들
6. 스티븐 툴민, <코스모폴리스>
비트겐슈타인의 제자이기도 한 스티븐 툴민이 근대 서양 철학과 사상의 역사를 돌아보며 쓴 책입니다. 근대 철학에 대해 가지는 어떤 장밋빛 이미지와 달리 툴민은 데카르트로 대변되는 근대의 시작점은 전쟁과 재해 등으로 굉장히 불확실성의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그런 불확실성의 시대 속에서 서양의 철학은 더욱더 확실성을 추구했고, 이것이 근대 서양 철학을 관통하는 흐름이라고 지적합니다.
아쉽게도 한국어본은 절판되었습니다. 저는 운좋게 중고로 싸게 구할 수 있었지만, 원서로는 아직 구할 수 있는 듯합니다.
7. 옥성득, <한국 기독교 형성사>, 새물결플러스, 2020
한국 기독교사 연구에서 큰 족적을 남기고, 유투브와 블로그로도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옥성득 선생이 미국에서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한 것은 다시 한국어로 번역/보완하여 출간한 책입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과정이, '기독교를 강제로 주입하는 미국 선교사와 수동적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조선인 신도'의 패러다임이 아님을 이 책은 여러 역사적 증거를 제시하며 밝힙니다. 비단 한국 개신교사뿐만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한 단면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기독교의 토착화는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알 수 있는 책입니다.
동저자의 <다시 쓰는 초대 한국교회사>나 <첫 사건으로 본 초대 한국교회사>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내용도 중복된 것들이 좀 있는데, 이 책들이 조금 더 평이하게 서술된 것 같습니다.
8. 조경달, 박맹수 옮김, <이단의 민중반란>
일본의 재일조선인 사학자 조경달 선생이 쓴 동학농민운동사 통사입니다. 배항섭 선생에 의하면, 이 책이 출간된 후에 한국에서 다시금 동학농민운동 연구가 활발해졌다고 합니다. 민중의 자율성 복권이라는 관점에서 동학농민운동의 역사를 재구성한 이 책은 그 정도로 혁신적이었고 탁월한 책이었던 것입니다.
저도 올해 초에 이 책을 읽고 동학과 동학농민운동에 푹 빠졌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책도 품절되어 구하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좋은 책은 어디서든 꼭 다시 출판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9. 폴 콜리어, <엑소더스>, 21세기북스, 2014
'전 지구적 상생을 위한 이주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은 이 책은 이주 노동자 문제를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책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은 이유는 난민 문제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는데, 이 책이 포함하는 연구 대상은 난민 + 이주민 + 불법 이주 노동자 등을 다 포괄하고 있어서 100% 만족할 답은 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극단적 주장을 하지 않고 시종일관 균형 잡힌 태도를 유지하며, 문제에 대해 나름의 해답을 제시하는 모습이 퍽 인상적이었던 책이었습니다.
참고로 이 저자의 책이 새로 얼마전에 새로 번역되었습니다.
<자본주의의 미래>라는 책인데, 빠른 시일 내에 구매해서 읽어볼 계획입니다.
10.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 개략>
올해 제 독서는 '후쿠자와의 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국내에 출판된 후쿠자와 유키치 관련 저서들은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그중에서도 <문명론 개략>은 매우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봉건 사회에 대한 불만과 서양사사의 세례를 통하여 급진적 평등주의자로 거듭났는데, <문명론 개략>이 바로 이러한 후쿠자와가 생각한 문명 사회의 이상과 현 일본 사회에 제시하는 문명 사회의 비전을 잘 보여주는 책입니다. 명저입니다. 특히 일본 사회에 만연한 권력의 편중, 다른 말로 불평등을 날카롭게 꼬집는 9장 '일본 문명의 유래'는 정독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국내에 출판된 <문명론의 개략> 중에서는 소명출판에서 나온 이 번역본이 가장 잘 된 번역이라고 하는군요. 그러나 조선은 마치 필연적으로 근대화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설명한 역자 성희엽의 해제는 확실히 마이너스 요소였습니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문명론 개략>과 더불어 읽으면 좋은 책은, 우선 그의 또 다른 저서인 <학문의 권장>(소화)입니다. 심지어 거의 비슷한 시기에 저술하여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말년에 쓴 <후쿠자와 유키치 자서전>(이산)도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텍스트입니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고야스 노부쿠니가 쓴 <문명론의 개략> 해설서도 후쿠자와 유키치의 사상을 이해하는 데 됩니다.
워낙 좋은 책을 많이 읽었어서 고르기 많이 힘들었네요 ㅎㅎ 김회권 선생의 <하나님 나라 신학으로 읽는 사무엘상.하>, 마크 마조워 <발칸의 역사>, 단테의 <신곡>,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유길준의 <서유견문>, 무라카미 하루키의 <약속된 장소에서> 등등. 다 꼽을 수 없을 지경이네요.
내년 독서 계획 주안점 중 하나는 '서사시 읽기(길가메시-일리아드-아이네이스-베오울프-니벨룽겐의 대서사시-동명왕편-실낙원-복낙원-모비딕까지)'와 '조선시대사 읽기(조선왕조의 기원-건국의 정치-한국의 유교화 과정-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정의의 감정들-사대부시대의 사회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