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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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첫 장 <선비>에서 눈에 띈 것이 공간성이었다. 워낙 대비되게 써 놓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정약종이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문장과 흑산 가는 배 타기 전에 사람들이 찾아낸 죽은 거지 여자아이. ‘얼굴은 물 쪽에 처박혀 보이지 않았고’라는 문장. 정약전이 흑산을 향한 돛배에 타서 바다를 바라보니 ‘물과 하늘 사이를 바람이 내달렸다.’는 문장에서. 수직의 선을 기준으로 위와 아래를, 수평의 선을 사이에 둔 전경과 배경의 흐릿한 경계를… 이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알레고리를 떠올리게 했다. 천주교도의 믿음과 백성들의 참혹함, 산 자의 막막함 같은 것들 말이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소설을 읽으면 대개 화자(작가)가 신경 쓴 묘사나 대사 같은 것들이 눈에 띄기 마련이고 또 나 스스로도 그런 것에 감응되기 마련인데, 어쩐지 이 소설에서 내가 감응 받은 것들은 저자가 신경이나 썼을는지 모를 그런 것들이었다. 흑산으로 유배를 떠나는 정약전이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선비>에서, 돛배가 뜨기 전날 ‘물소리에 실려서 정약전의 의식은 먼바다로 흩어졌다. 정약전은 불려가듯이 잠들었다.’라는 문장이 아주 선명하게 다가왔는데, ‘불려가듯이’라는 말이 애초에 내가 품고 있던 ‘과연 정약전은 진짜로 천주교를 배교한 것인가?’ 라는 의문에 해답처럼 주어진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고 소설 안에서도 그런지 아닌지 알지 못하겠다. 그런데도 나는 그 ‘부른 이’가 천주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 했더랬다. 그러자 정약전의 진실이 바로 목전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부 마노리에 대해서도 ‘마을과 마을 사이에 길이 있어서, 그 길을 사람이 걸어서 오간다는 것이 마노리는 신기하고 또 편안했다.’라는 문장에서 ‘편안했다’가 또 그렇게 와 닿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마노리라는 한 인물의 천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육손이> 장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게 된 황사영과 그의 처 명련(정약전의 조카)이 밤일에서 ‘제 몸의 기쁨으로 남자의 기쁨을 빨아들였다.’ 라는 문장 또한 ‘빨아’라는 어감에서 느껴지는 젊음의 신선함과 적극성이 명련을 지금 살아 숨쉬는 존재로 다가오게끔 만들었다. 이런 식의 표현들이 소설 전체 여기저기서 출몰한다. 인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흑산, 하늘, 바다, 강물 같은 것들에도 똑같이 해당됐다. 처음에는 의심했지만 읽을수록 확실해졌다.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었다. 그것은 저 공간성과도 떼어놓고 생각할 것이 아닌 것만 같았다.



<<흑산>>은 한 명의 주인공이 있는 소설이 아니다. 마노리, 문풍세, 박차돌, 황사영, 오칠구, 육손이, 창대, 아리, 강사녀, 길갈녀, 오동희, 순매, 조 풍헌, 박한녀, 오호세. 이 모두가 주인공들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것은 이들을 피지배층이니 학대 받는 자들이니 하는 식으로 묶어서 부르지 않는 것이다. 이름으로 불려져야 한다. 분류된 개념어로 호명하는 것이 몹시 꺼려진다. 독자들 각자가 가장 가슴에 와 닿는 사람들을 보면 그뿐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들 중에서 박차돌과 문풍세가 가장 와 닿았다. 박차돌은 삶의 비극성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풍세는 진실한 영웅의 면모를 보여주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생각해 보니 이 둘은 가장 소설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마노리도 문풍세와 더불어 흥미롭다. 각자의 직업이 마부와 사공이라는 점도 그렇고 마노리가 의주와 서울을 연결하고 문풍세가 육지와 흑산을 연결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처음부터 공간성이 와 닿았던 소설이라 그런지 그들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예사롭지 않다. 전령의 역할을 하는 천사의 환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어쨌든.



참게와 고등어와 날치도 빼먹을 순 없겠지. 많은 이들이 <<흑산>>을 역사소설이라고 말한다. 광고 카피를 빌려 말하자면 이것은 <<흑산>>을 반만 아는 것이다. 절반 이하 일지도 모르겠다. 나머지 절반 또는 그 이상. <<흑산>>은 지리소설이다. 예부터 지리에는 동물, 식물, 광물, 날씨, 풍토 같은 것들이 모두 포함된 것이었다. 각종 물고기에 대한 묘사가 구석구석 자리잡고 있는 것을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이름의 분명한 호명(주요인물들을 ‘그’라든가 ‘그녀’라고 말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인물만큼이나 주어 역할을 많이 하는 산, 섬, 하늘, 강물, 바람. 첫 장부터 등장하는 비상한 공간성. 이런 것들은 역사에 포함되어 있다기 보다 지리의 영역으로 보여진다. 왜 이런 방식이어야 했을까? 나 개인적으로 역사책이나 역사소설, 평전(전기)류를 좀 싫어하기 때문에 오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사는 그 역사의 주된 흐름이라는 측면 때문에 소수의 몇 명 위주로 작성 되는 것이 보통이다. 왕이니 황제니 장군이니 학자니 하는 사람들. 피라미드가 누구의 무덤인지 확인할 수 있지만 피라미드를 짓다가 죽은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 쓰여 지지 않는다. 역사는 정말 많은 것들을 배제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장르다. 지리는 역사가 배제한 많은 것을 메워줄 수 있다. 책으로 쓰여진 역사들을 고고학이 때론 공격하고 때론 지원하듯. 그렇게 말이다. <<흑산>>은 지리가 역사를 보조하는 수준을 떠나 리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의를 다투려는 목적을 갖지 않는다’는 저자의 말이 내겐 그런 뜻으로 들렸다. 판단을 통해 ‘인물’의 뒤나 위에 다른 말을 만들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이백여 년 전에 박해 받던 천주교가 오늘날 이런 위상이 된 건 모두 이와 같은 사람들 때문이다. 라는 식의 말. 그럼으로써 ‘이와 같은 사람들’로 묶여 싸잡아 배제되고 천주교만이 부각된다던가 하는 식의 것들. 개별의 실존 외에 덧붙일 것은 없다. 라는 느낌이랄까.


당면한 곳만이 삶의 자리. 라고 작가는 말한다. 참게도 고등어도 날치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걸 느끼는 순간 우리는 들고 있던 판관의 의사봉을 자신도 모르게 내려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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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02 1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후설에서 메를로퐁티까지 철학의 정원 7
피에르 테브나즈 지음, 김동규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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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투르니에의 <<외면일기>>를 봤을 때 조금은 놀랐었다. 내면에 대한 이야기를 그치고 겉으로 보이는, 관찰할 수 있는 것만을 관찰해서 일기를 쓰겠다고 하고, 써낸 투르니에의 시도가 내 편견의 한 귀퉁이를 찢어발겼다. 나란 인간은 그때까지도 으레 일기란 것은 심리적이고 주관적인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적어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 맨날 슬픔이니 외로움이니 실패니 하는 것들만 써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글쓰기가 스스로도 재미없고 심드렁했다. 지금도 글쓰기가 재미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글쓰기가 영 안 풀린다 싶을 때는 나르시시스트로서의 나를 벗어 던지고 겉으로 보이는 것들, 들리는 것들, 만져지는 것들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이제는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즐겁다는 것을 얘기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子曰 吾嘗終日不食 終夜不寢 以思 無益 不如學也
공자의 이 말씀이 이제 내게는 투르니에가 ‘외면일기’를 써 보라고 권했던 그 맥락으로 여겨진다.

후설은 의식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고 말한다. 의식은 딱딱하고 고정된 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어떤 외부 대상과 관계하는 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한다. 의식과 대상이 관계 맺는 방식을 지향성이라고 하는데, 이 지향성으로 말미암아 의식-대상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한데 묶여 경험이라는 사태를 이룬다. 이렇게 되면 대상은 데카르트의 생각처럼 나 바깥에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식 안에 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된다. 그러니 이 주어진 것은 분리시켜 고찰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현상학적 환원(또는 괄호치기)은 흔히 관찰이라고 하는 행위를 대단히 흥미롭게 만든다. 게임의 법칙이 좀 복잡해졌다고 할까.. 대상만을 그저 관찰하는 것과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하며 대상을 관찰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니까. 이 책은 현상학의 이런 기초 사항들이 하이데거의 DaSein에 사르트르의 자유에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 어떻게 반영되어 나갔는지를 간명하게 보여 준다.

의식 안에 현상이 드러나는 것을 본다. 는 것이 왜 이렇게 심금을 울리는지 모르겠다. 김훈의 <<흑산>>을 보면 그 화자의 포지셔닝이 아주 묘하다. 초월적인 위치인데, 당대 설움 받는 인간들에게 가깝다. 가까우면서도 실은 한참 멀기도 하다. 김훈이 <<흑산>>을 내놓고 한 인터뷰에서 다윈의 책을 수시로 읽은 것에 대해 얘기했었는데, <<흑산>> 화자의 시선과 의식적 판단의 언어에는 관찰의 대가라고 말할 수 있는 다윈의 어떤 것들이 녹아져 있는 듯 하고, 수학자이기도 한 후설의 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방법론이 드리워져 있는 것도 같았다. 안셀 아담스의 F64의 시선 같기도 하고 F2.8로 얕게 찍은 사진 같기도 해서.. 뒤죽박죽 주관적으로 느껴지지만, 실은 자기가 판단할 수 없거나 판단하기 싫은 것들 모두에 대해 판단중지를 하고 존재의 어떤 측면을 열어 보인 것들에 대해서만 썼다는 의미에서, 현상학적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내내 들었었다. 그 엄밀함 한 가운데 드러나는 것들이 매우 리얼해서, 그 리얼의 리얼감을 좀 죽이기 위해 이 책에서 소개하는 현상학의 둔한 개념들이 내겐 좀 필요했던 듯도 하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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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을 읽고 있다.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있다. 한적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집중해서 읽어야 할 소설인데 그러질 못하고 뚝뚝 끊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처지다. 뚝뚝 끊어진 그 틈새 시간을 좀 잘 활용해 보고 싶은 욕심에 다른 책을 잡은 것이 완전한 실수였다. 권혁웅의 <몬스터 멜랑콜리아>도,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도, 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도, 제니퍼 이건의 <킵>도, 도널드 바셀미의 <죽은 아버지>도, 성석제의 <칼과 황홀>도,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바틀비와 바틀비들>까지. 중구난방으로 읽는 사태로 번져 버렸다. 읽는 것도 아니고 안 읽는 것도 아닌 꼴. 원치 않았던 초병렬 독서다.

실마리는 <흑산>이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풀어야 할 것 같다. <흑산> 화자가 역사를, 인물을,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태도가 에드먼드 후설의 ‘현상’이라는 개념과 흐릿하게 중첩되어 보인다. 그것이 그나마 최근의 원치 않은 초병렬 독서에서 내 눈을 반짝이게 만든 유일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몸이 제 무게를 느끼고 있다. 혹사당하고 있다 까지는 물론 아니지만 피곤하다 말할 정도는 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와중에 연말 송년모임 일정까지 속속 잡히고 있다. 피곤해서인지 그것도 달갑지만은 않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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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제임스 우드 지음, 설준규.설연지 옮김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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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도스토예프스키를 읽었던 것은 아마 겉멋에 들었던 나이였기 때문이었던 것 같고, 조르바는 소설이라기 보다는 경전 보듯 했고, 바나나의 키친은 우연히 만난 위로였고… 겉멋이었고 경전이었고 위로였던 소설을 좀 다르게 보기 시작했던 것은 어떤 하나의 소설작품이 계기가 된 것이 아니라, ‘생활’의 반작용이었다. 사회의 효과/효율 지상주의는 사람을 한쪽 방향으로만 몰아가 결국 나를 뿔나게 만들었다. 나는 무용(無用)한 것. 그렇지만 의미심장한 무용한 것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때 내가 새삼스레 찾아낸 게 소설.

하지만 읽은 소설의 권수가 누적될수록 소설이 무용(無用)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미묘한 것들을 알아채는 감각.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이것이 조금씩 발달됨을 확인하게 되었다. 서울대입구역 방향으로 무심한 야간 산책을 나갔던 어느 날에 내가 생각했던 것이 저자가 쓴 글과 딱 떨어졌다.

‘문학이 우리를 좀 더 삶을 잘 알아차리는 사람으로 만들면, 우리는 삶 자체에서 실습하게 되고, 그리하여 이것이 우리를 문학의 세부사항을 좀 더 잘 읽는 독자로 만들면, 그것이 이번에는 우리를 삶을 좀 더 잘 읽는 사람으로 만든다. 이런 과정이 이어지는 것이다.’


2.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 에필로그에는 들뢰즈가 말한 독서법이 인용되어 있는데,

‘책을 읽는 또 다른 방식은 책을 어휘나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하게 하나의 기계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작용을 하는가, 어떻게 작용을 하는가?”하는 것만이 문제가 된다. 그것이 어떤 작용을 하는가? 만일 작용이 없으면, 감응이 없으면, 그럼 다른 책을 집어 들면 된다. 바로 이것이 강렬한 독서이다. 무엇인가 발생하든가 아니면 아니든가. 그뿐이다. 아무런 설명할 것도, 이해할 것도, 해석할 것도 없다.’

리얼리즘(사물의 존재방식에 대한 진실성)을 불러 일으키는 소설 형식에 대한 진지한, 즐거운 설명. 이라고 말하면 너무 압축한 것일 테지만, 현재로는 이정도 말 밖엔 안 나온다. 다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저자가 이 책에 인용한 많은 현대소설의 생생한 문장들이 나를 들뜨게 했다는 것이다. 읽고 싶다. 더 잘 읽고 싶다... 제대로 작용한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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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콘 - 진중권의 철학 매뉴얼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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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에 연재됐던 글이라더니, 역시 주간 단위로 한 편씩 읽는게 나을뻔 했다. 한꺼번에 읽었더니만 확 질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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