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산>을 읽고 있다. 좀처럼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고 있다. 한적한 모퉁이에 자리 잡고 앉아 집중해서 읽어야 할 소설인데 그러질 못하고 뚝뚝 끊어서 읽을 수 밖에 없는 처지다. 뚝뚝 끊어진 그 틈새 시간을 좀 잘 활용해 보고 싶은 욕심에 다른 책을 잡은 것이 완전한 실수였다. 권혁웅의 <몬스터 멜랑콜리아>도, 피에르 테브나즈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도, 슬라보예 지젝의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도, 제니퍼 이건의 <킵>도, 도널드 바셀미의 <죽은 아버지>도, 성석제의 <칼과 황홀>도, 엔리께 빌라-마따스의 <바틀비와 바틀비들>까지. 중구난방으로 읽는 사태로 번져 버렸다. 읽는 것도 아니고 안 읽는 것도 아닌 꼴. 원치 않았던 초병렬 독서다.
실마리는 <흑산>이나 <현상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풀어야 할 것 같다. <흑산> 화자가 역사를, 인물을, 사물을 관찰하고 판단하는 태도가 에드먼드 후설의 ‘현상’이라는 개념과 흐릿하게 중첩되어 보인다. 그것이 그나마 최근의 원치 않은 초병렬 독서에서 내 눈을 반짝이게 만든 유일한 지점이었던 것 같다.
몸이 제 무게를 느끼고 있다. 혹사당하고 있다 까지는 물론 아니지만 피곤하다 말할 정도는 되는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 와중에 연말 송년모임 일정까지 속속 잡히고 있다. 피곤해서인지 그것도 달갑지만은 않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