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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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하고,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들에게 감동하였습니다. 제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니까요.”

이 소설은 화자인 극작가 ‘커더우’가 이제는 아흔 살이 된 산부인과 의사 고모 ‘완신’의 삶과 자신의 고향인 가오미 둥베이향을 회상하며, 되짚어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순간들을 편지로 써 그가 존경하는 ‘스기타니 요시토’ 선생님께 보내고, 마음속 깊이 묵혀둔 감정들을 손끝에서 흘려보내듯 써내려간 이야기가 희곡 <개구리>로 탄생한다.

서양 의학을 배운 혁명 열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지하 병원 창설자인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업을 잇고자 위생학교에 들어가 열여섯 살에 졸업한 고모는 위생소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신식 조산 훈련에 배치되었고, 그 뒤로 고모가 받은 아이가 모두 1만 명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만만치 않은 경력에 빼어난 미모까지 겸비한 고모 자랑에 ‘나’의 입은 침이 마를 새가 없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처벌받던 시절인 문화 대혁명(1966년~1976년)이 시작되기 전, 동맹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이 적대 관계로 전환해 전운이 감돌고, 공중에서는 비행훈련으로 비행기 굉음이 자주 들려오던 시골 마을에서는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으며, 까만 이를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얀 이를 자랑하는 고모였으니 어린 조카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말할 필요도 없다. 화자 스스로 과시욕이 있다고 고백한 바, 출신 성분 좋은 집안 식구들 이야기라면 사흘 밤낮도 부족하다.

국가 생산력이 향상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출산율도 덩달아 높아졌다. 고모는 당시 매우 귀했던 자전거로 곳곳을 누볐고, 신식 분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야 했던 분위기 속에서 전문적인 의술 없이 산모와 아기의 안전과는 동떨어진 늙은 산파들 사이에서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당찬 여성이었다.

이 소설의 화자 ‘나’를 받아준 것도 고모다. 엄마 뱃속에서 거꾸로 선 바람에 발부터 나올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처음이 아니니 혼자서 찬찬히 낳아 보려무나.”라고 말했던 할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마당에 나가 북 치고 장구를 치면서 아이들은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며 지들이 안 나오고 배기냐는 소리만 하고 있는 통에 ‘나’는 세상 구경도 못 할 위험에 처했고, 구시대적인 풍습을 철석같이 믿는 할머니를 밀어내고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신식 의술로 출산을 도와준 고모는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가 없다.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저자의 방식은 내가 미처 고통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할 새 없이 충돌하듯 맞닥뜨리게 하여 흠칫 놀라기도 하고 종종 속에서 뭔가가 자꾸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벌어진 ‘들추어 내서 말하는 것이 난처하고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그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모가 씩씩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하네. 여자가 딸을 낳으면 남자는 우거지상이 되던데. 소가 암송아지를 낳으니까 남자 입이 헤벌어지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암송아지는 자라면 다시 새끼를 낳잖아!
고모가 말했어요. 사람은요? 여자아이도 커서 시집을 가면 아기를 낳잖아요?
아버지가 말했어요. 그거야 다르지.
고모가 말했어요. 뭐가 달라요? (p. 56)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불행을 담은 현실을 눈에 담아야 하는 것도 고통이라지만, 기술이 있어 굶어 죽을 일은 없는 고모는 큰소리라도 뻥뻥 치는데 그러지도 못한 여성들이 버텨낸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갑갑했다.

어느덧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옛날 1960년대 시절의 이야기도 한낱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나’의 큰형 막내아들의 항공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시끌시끌한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일흔이 다 된 고모가 가족들을 향해 한 마디 던지며 등장한다.

아니, 왜 이렇게 큰 등을 켜고 그래? 할머니 하신 말씀 생각 안 나? 컴컴해도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진 않는다고. (p. 80)

평생 타향을 전전하다가 이제야 친정에 온 고모의 모습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고, 어째 가족들도 예전처럼 고모 주변을 둘러싸고 칭송하던 모습과는 달리 영 탐탁지 않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 분명 복잡한 사연이 있는가 보다.

‘나’는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은 고모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준비해 왔음을 알리며, “하나도 적지 않고, 둘은 적당하며, 셋이면 많다.”라는 구호와 함께 산아 제한 붐이 일어났던 1965년 말, 고모가 공산당 소속 당원으로서 강제성을 띤 산아제한 정책 계획 생육 지도자로서 정책을 짜고, 지휘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 온 이야기부터 결혼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고모가 젊은 시절 만난 ‘왕샤오티’라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타이완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고모가 반동분자라 의심받는 이야기 등등 붉은 깃발이 바다를 이루던 시절의 이야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때때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순진무구한 동네 사람들이 무척 진지한 태도로 당연한 이야기를 껄껄 웃으며 나누는 모습에 웃는 것이 실례가 될 것만 같은 잔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다.

위안 형님도 대단하시죠. 사천 동생이 말했어요. 위안 형님은 우리 샤좡 시장에서 판을 벌이고 점을 치는데, 별명이 ‘신선거사’예요. 우리 큰어머니 댁 암탉이 없어졌는데 위안 형님이 육갑을 짚어 보더니 말했어요. 오리는 물가로 가고, 닭은 풀밭으로 가니 풀숲에 가서 찾아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풀숲에서 찾은 거 있죠? (p. 183)

한숨 돌리고 나니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모는 계급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계획 생육 정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은 사회주의 기본 사상을 흔드는 일이라며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 루프 시술, 정관 수술, 중절 수술을 어떻게든 피하려 하자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듯이 한 마디로 정리한다.

물이 든 그릇은 반듯하게 들어야 한다. (p. 197)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출산을 도우며 안전하게 아기를 받던 고모의 양손은 권력의 지휘 아래 탄생의 고귀함을 알리는 대신 생명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지금의 삶을 운명이라 여기듯 충성스러운 공산당원으로서 맡은 계획 생육 사업에 광기로 보일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 방법은 참혹했다. 나 역시 원칙을 중요시하는 직에 종사하다 보니 불합리함 앞에 그녀가 홀로 감수했을 내적 갈등과 차마 드러내지 못한 괴로움을 모를 수가 없었지만, 길이라는 것이 저쪽으로 가다 보면 이쪽으로도 오게 마련인 것을 왜 그리도 잔혹하게 보이면서까지 다른 방향은 보지 않고 자신을 증명해 내려 하는 건지 참담하기만 했다.

고모는 산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건강한 아기를 안겨줄 때 순수하고 순결한 감정으로 희열을 느꼈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때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받았던 고모였고, 어찌 보면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 나서 겪어야 했던 일로 온갖 욕을 얻어먹고 있으니 조카인 ‘나’의 시선에서 읽히는 수많은 감정 안에 고모를 향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졌고, 그런 고모의 뒤를 죄책감에서 비롯된 괴로움이 바짝 쫓았다.


누구나 후회가 많은 삶을 살아가면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고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칠 때도 있겠지만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며 극복하려고 했던 인물과 달리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번민으로 잠 못 이루던 시절조차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양심과 공감 능력마저 상실한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볼 때는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목숨이 걸린 일을 우연한 사건 혹은 소소한 일로 치부했던 사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프고 비참한 남의 불행에 “자업자득이죠.”라고 말하는 모습에 나는 부작용만 남긴 야만적인 강제 정책에 대해 분노한 것만큼이나 화가 났다. 본질적인 권리를 무시당한 타인의 고통에 아픔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사람이라면 말이다.

국가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작품을 통해 여러 인간 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다만,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을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저자의 솔직한 서술에 기대감이 점점 커져 이 소설의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무언가가 나오겠지...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얻지 못한 채 끝이 난 느낌이다. (또르르)

다음에는 모옌의 또 다른 소설 <열세 걸음>을 읽어보려 하는데, 의미심장한 표지부터가 이미 진입 장벽의 높이를 세워주지만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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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0-01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껜 한방이 없었나봅니다.^^
<열세 걸음> 저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곰돌이 2025-10-01 21:57   좋아요 1 | URL
기대감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었나 봐요ㅎㅎ 모옌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레이스님처럼 다양하게 읽어봐야겠어요!!

rainbass 2025-10-02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우지는 못했지만 생명을 아는 구식산파가 더 많이 죽였을까, 배웠지만 생명을 수단으로 본 이모가 더 많이 죽였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꽤 두꺼운데 잘 읽혔던 책이네요. 나오겠지...나오겠지..곰돌이님의 엄청난 글이 나왔잖아요~ 👍

곰돌이 2025-10-02 06:21   좋아요 1 | URL
중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한 편인데, 굳이 취향으로 따져본다면 읽어본 것 중에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전 좀 더 따뜻함을 얻는 걸 좋아하는가 봐요. 앗, 그리고 남겨주신 댓글 마지막 줄은 블러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ㅎㅎ (식은땀)

새파랑 2025-10-04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사진이 너무 멋집니다 ㅋ 서재가 도서관 급이네요~!! 전 아직 중국문학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곰돌이 2025-10-04 20:5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감성과는 조금 벗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드실 때, 류전윈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추천합니다! 책장은 어쩌다가 깔맞춤까지 하며 정리를 하는 바람에 흔적을 남겨봤어요! 느낌 아시죠?ㅎㅎ
 
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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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 펄롱은 알았다.”

해야 할 일을 마치면 그다음 일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 순간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따로 있는 듯, 쳇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삶을 살아가는 한 가족은 현재의 소박한 삶에 감사함을 느끼고 속에 들어찬 서글픔은 서로를 위해 잘 포장하여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말 못 할 고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잠든 부인 옆에서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남편 ‘펄롱’은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누리지 못한 채 왜인지 심란해 보인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혼란스럽게 만드는 걸까. 앞으로 닥치게 될지도 모를 그 무언가를 고민하지 않으려 애쓰지만, 방황하는 사람처럼 복잡함에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큰 집에 혼자 사는 여성 ‘윌슨’의 집에서 가사 일꾼으로 지내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난 펄롱은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선물로 아버지와 500피스짜리 퍼즐을 받고 싶어 했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었지만, 어린 펄롱에게는 간절했고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글픔이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내리려 했지만, 내색하면 안 될 것 같아 외양간으로 뛰어 들어가 울어버렸다.

젖소가 자기 칸 안에 묶인 채 선반 위의 건초를 끌어 내려 만족스러운 듯 먹고 있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 전에 펄롱은 말구유에 언 살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아픔을 잊기 위해 손을 차가운 물에 깊이 담그고 손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까지 한참 그러고 있었다. (p. 30)

펄롱이 아기였던 시절, 구슬처럼 빛나는 맑은 눈으로 들여다본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윌슨의 집 정사각형 부엌 안에서 일해야 하는 엄마가 위험한 것들로부터 조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을 유아차의 안전띠에 매인 아기 펄롱이 알아들을 수는 없었겠지만, 공중에 대고 허우적거리는 손짓과 음성은 쌓이고 쌓여 자신이 마음껏 양팔을 휘젓고 소리 내는 것이 누군가의 허락 없이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더 자라서 윌슨이 가끔 같이 쓸 수 있게 해주는 거실을 가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처지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그 모든 것들이 잘 보이지 않는 먼지가 내려앉듯 그렇게 펄롱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쌓여만 갔을 것 같다.

그렇게 펄롱은 자랐다. 어린 시절 크리스마스 날 농장 일꾼 ‘네드’가 준 보온 물주머니와 윌슨이 준 곰팡내 풍기는 낡은 책 <크리스마스 캐럴>은 그 당시에는 원하는 선물이 아니었기에 서럽게만 느껴져 외양간으로 달려가 눈물을 쏟았지만, 세월이 지나 돌이켜보니 그 덕분에 오랫동안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에게 필요하고 소중하게 여겨지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집 크기와 보이는 행색에 따라 쳐다보는 시선을 달리하는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숙덕거림 속에서 가족들도 외면한 어머니를 일할 수 있게 해준 윌슨이 따뜻하게 자기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칭찬해 준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소중한 존재라고 속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거쳐 온 생을 들여다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소설 속 주인공 펄롱이라면 불행했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어 준 순간들을 발견했을 것 같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동안 누군가에게는 사소할지 모를 배려와 관심이 단순한 행동을 넘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줬음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서 한 소녀를 우연히 만난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 보였고, 도저히 뿌리칠 수 없었기에 외면하지 않고 그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다.

그 순간 소녀의 심정을 떠올려보았다.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늘 그곳에 그가 있을 거라는 안심만으로도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고마움과 안도감으로 이미 따뜻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펄롱이 어린 시절 윌슨이 머리카락을 따뜻하게 쓰다듬어주던 그 손길만으로도 다른 아이들처럼 소중한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었듯이 말이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p. 82)

유한한 삶을 살아가며 오늘의 평온만을 원하는 삶에서 더 나아가 현재의 나를 존재하게 해 준 고마운 순간들을 과거의 기억으로만 끝내지 않고 현재와 연결 지어 삶을 더욱 의미 있게 채우는 것이 무엇인지 고뇌하며 소녀에게 손길을 건넸으나, 펄롱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 의지로 무언가를 결정하는 것이 겁이 났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네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건이 갖춰져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감수해야 할 것들도 훨씬 많기 때문이다.

내내 이어지는 서리가 내린 듯한 날씨가 마치 금방이라도 맑게 갤 하늘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섣부른 희망을 품지 않게 했다. 무시할 수 없는 여러 목소리에 휩싸여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것이 마치 모래주머니를 찬 것처럼 무겁기만 하고, 집에 돌아가면 밖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내놓는 몇 파운드의 동전을 못마땅해하는 부인과 다른 친구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르러 나가고 싶지만 내색도 못하고 아빠 펄롱의 일손을 돕기 위해 사무실을 봐야 하는 딸이 기다리고 있다.


이 소설은 불완전한 삶 속에서 세상의 불의 앞에 고민하게 될 때, 인간이 소중히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 삶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생각하게 만든다.

나의 지난 삶의 선택을 떠올려 보았다.
나는 마음의 소리대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늘 최대한 평온함을 유지하며 살고 싶어 했으며, 그나마 합리적인 쪽을 택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스크롤 내리는 손가락의 속도만큼이나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기사들 사이로 지금, 이 순간도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지나치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한기가 느껴지는 날씨처럼 침울함을 견디는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며 누군가의 구원의 손길이 있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만 머물러 있는 쪽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사실이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늘 어떤 경계에서 고민하는 일이 발생하는데, 내적 갈등과 감수해야 할 현실로 가슴 속이 꽉 막혀 있을 때, 늘 타인의 생각과 판단을 배경으로 했던 지난날의 내 선택들을 되짚어보니 원하는 대로 흐르는 듯 보이는 강을 바라보며 침묵과 용기 사이에서 고뇌했던 펄롱의 모습이 현실의 내 모습 같아서 공감할 수 있었다.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p.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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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5-09-2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책이라고 해서 안 읽고 있었는데, 곰돌이님 글 읽으니 어렵지 않을것 같기도 하고...🤔

곰돌이 2025-09-29 13:16   좋아요 1 | URL
이 책은 사두고 계속 읽지 못하는 바람에 영화까지 미뤄지다 보니 킬리언 머피를 얼른 보고 싶어서 그 계기로 최근에서야 읽었어요~!! 개인적으로 강추까지는 아니지만 이 소설 속의 날씨처럼 추운 계절에 어울릴 만한 책이었던 것 같아요.ㅎㅎ
 

<이처럼 사소한 것들> 중에서...

이제 펄롱은 과거에 머물지 않기로 했다. - P19

가끔 펄롱은 딸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걸 보며ᅳ성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걸 보면서ᅳ이 애들이 자기 자식이라는 사실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진한 기쁨을 느끼곤 했다.
"우린 참 운이 좋지?" 어느 날 밤 펄롱이 침대에 누워 아일린에게 말했다.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지." - P20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ᅳ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 P29

아직 동이 트기 전이었고 펄롱은 검게 반짝이는 강을 내려다보았다. 강 표면에 불 켜진 마을이 똑같은 모습으로 반사되었다. 거리를 두고 멀리서 보면 훨씬 좋아 보이는 게 참 많았다. 펄롱은 마을의 모습과 물에 비친 그림자 중에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는지 마음을 정할 수가 없었다. - P67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니?" 펄롱이 말했다. "말만 하렴."
아이는 창문을 쳐다보고 숨을 들이마시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친절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처음으로 혹은 오랜만에 친절을 마주했을 때 그러듯이. - P81

그게 가능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정말 뭔가를 할 것인지, 진짜로 거기 갈 것인지 생각했다.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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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아이들 2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0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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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인연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은 없다. 과거의 내 모습은 영원히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 1권에서는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을 선언한 날, 특별한 능력을 지닌 1,001명의 아이가 태어났다. 그중 정각에 태어나 조국의 운명과 하나로 이어진 불가분의 관계이자 ‘맏형’으로서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이 소설의 화자 ‘살림 시나이’가 서른한 살을 앞두고 지나온 세월을 되돌아보며 자신의 연인 ‘파드마’에게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 했던 그 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권에서도 외할아버지의 성난 바나나 같은 큰 코를 물려받은 살림의 스러져가는 삶 속 흩뿌려진 기억이 이어지고, 인도의 빠른 경제 성장과 함께 쑥쑥 자라 벌써 성인의 키만큼 자란 열한 살 살림이, 봄베이(현 뭄바이) 영화계에서 유일한 사실주의 작가인 외삼촌 ‘하니프 아지즈’와 전직 여배우인 외숙모 ‘피아 아지즈’에게 잠시 맡겨진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식이 없는 부부에게 살가운 아들의 역할을 하고 있는 이곳은 석양과 소음이 어우러진 봄베이의 ‘마린 드라이브’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아파트다. 이곳에서 카드놀이가 벌어지는 날이면 외삼촌의 단골들인 재즈 연주가, 가수, 화가, 사진 기자 등이 모이는데, 살림은 이곳 사람들에게서 떨어지는 흥미진진한 일화와 추악한 이야기를 줍고 또 줍는다.

인도의 신화적 삶에 휘말려버린 나는 나 자신의 불가사의한 모습을 의식하면서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다. (p. 20)

살림은 행상인과 거지, 노점상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발코니로 나가 둥근 목걸이처럼 가로등 불빛이 만들어낸 빛의 행렬을 바라보고 있다. 이때, 자신의 옆으로 다가온 영화계 거물인 한 남성과 잠시 대화를 나눈다.

“바깥공기가 상쾌하구나.”
“네, 아저씨.”
“그래, 그래. 인생이 그럭저럭 살 만하니?”

부모님 곁을 떠나 귀양살이 중이니 그럭저럭 살 만할 리가 없는 살림의 속마음을 들어보려 했으나 순번이 틀렸다는 듯 생각도 못 한 외숙모 피아의 하소연부터 이어졌다. 신식 사고방식의 며느리에게 냉소적으로 대하는 시어머니 ‘나심 아지즈’의 잔소리로 인한 한숨과 여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의 향수가 한데 뒤섞여 눈물과 함께 흐른다. (참고로 1권부터 이어진 시어머니 나심의 독특한 화법이 꽤 웃긴데, 익숙해져서 감흥이 없을 만도 한데 어째 튀어나올 때마다 잔웃음이 나온다.)

“우리 집안은 거뭣이냐! 아니 그러니까 거뭣이냐! 내 말은 거뭣이냐!”

그건 그렇고 살림도 울고 싶은 건 마찬가지다.
다시 메솔드 단지의 부모님 곁으로 돌아와 한평생 신기하고 황당무계한 변화의 세계와 맞닥뜨리면서 여러 가지로 골칫거리가 많아 고달프기 때문이다.

1권에서 살림은 인도의 독립과 함께 태어난 아이들과 ‘한밤의 아이들 협회’를 만들었는데 살림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간 이 협회는 단순히 아이들이 모여 잡담하고 낄낄거리는 친목회가 아니라,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인도의 미래를 위해 활용하기 위해 고민하는 제법 진지한 모임이다. 외삼촌 댁에서 귀양살이를 마치고 돌아왔으니(물론, 이보다 더 큰 이유로 미뤄두었던) 다시 회의를 소집한다. 상황이 좋지 않음을 뜻한다.

인도는 독립 선언 이후에도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다.
오랜 시간 식민 지배를 받으며 지내왔고 다양한 언어, 종교, 문화를 가진 나라이면서 독자적인 국가 운영 경험 또한 부족했기 때문이다. 한밤의 아이들 협회도 이런 나라 사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인지 다시 모인 아이들과 영 신통치가 않았다. 특별한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른들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지역, 피부색, 종교, 계급 등의 차별과 충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 대화조차 사라지며, 더 나아가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살림은 아이들에게 서로 ‘사랑’으로 단결하자고 호소한다. 그런데 이때, 한밤의 아이들 중 살림과 같은 시간에 태어난 ‘파괴의 신’의 막강한 힘을 가진 ‘시바’가 콧방귀를 뀌며 말한다.

“그렇게 시시껄렁한 것들을 어디다 쓰겠냐? 다들 먹고 살기도 바쁜 판국에. 지랄염병, 이 오이코 녀석아, 난 이제 너희 협회라면 신물이 난다. 재물과는 아무 상관도 없잖냐.” (p. 44)

인도는 빠른 경제 성장으로 불균형과 빈곤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다. 시바의 시선으로 볼 때, 부잣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살림의 낙관적이고 감상적인 태도에 호의적일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얻게 되는 권리를 위해 싸워야 하는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는 빈민굴의 냄새와 치열한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온도를 알지 못하는 자본 계층에 속하는 살림에게 괴리감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덩치만 컸지 아직도 열한 살인 살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혈안이 되어 속이 조용할 날이 없고 안팎으로 괴롭다. 외삼촌 댁에서 유배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제는 온 가족이 파키스탄으로 건너가야 한단다. 이렇게 처음으로 내 나라라고 말할 수 없는 북녘 도시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

파키스탄 군인이자 정치가인 ‘아유브 칸’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제 쿠데타라는 단어만 들어도 두드러기가 날 것 같다) 총리가 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기까지 살림의 눈앞으로 폭력, 부패, 탐욕, 빈곤이라는 독립의 자식들이 줄을 지어 등장했다. 또 한참 이야기에 푹 빠져 읽고 있는데, 그런 나를 훤히 들여다보는 사람처럼 능구렁이 같은 살림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지금까지 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자세히 설명하는 데 소홀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나의 청취자가 감정이입의 능력을 가졌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p. 122)

어휴 못 말린다, 정말...
이처럼 독자와 호흡을 같이 함으로써 인물과의 정신적 교감이 깊어지고, 이 감정적 연결은 소설을 더욱 생동감 있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게 한다. 지루해질 만하면 살림이 또 곁길로 새거나 음란 마귀가 씌어 쓰잘머리 없는 소리를 던지고 가는데, 우리가 이해해 줘야 한다. 이 녀석은 지금 사춘기를 겪고 있다. 그러나 누울 자리를 보고 뻗는다고 신들의 인구수조차도 국민의 인구수와 맞먹는다는 이 나라는 조용할 날 없이 어수선하여 사춘기 따위는 명함도 못 내민다. 불쌍한 녀석...


또다시 봄베이로 돌아온 살림의 가족.
살림은 탄생과 함께 인도의 운명과 함께한다고 밝혔으니, 변화가 있다는 건 분위기가 영 심상치 않다는 뜻이다.

1962년 10월 20일, 국경 문제로 인도는 중국과 군사적 충돌을 벌였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중국은 위기를 맞이했고, 제3세계 싸움에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인도와 중국이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전쟁이 터진 것이다. 60년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이 분쟁과 관련하여 얼마 전 “일부 희망적인 합의가 있을 것”이라는 인도 무역부 장관의 기사를 읽었다. 내 나라 문제도 어수선하지만, 참 무력감을 느끼는 순간이다. 기적처럼 고통을 순식간에 벗어던질 수 있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지만, 질긴 잿빛 운명이 참 길기도 길다.

살림의 가족들이 비극에 대처하기 위해 자기만의 방법을 찾아나가는 모습은 다양했다. 불안으로 인해 악화하는 갈등 속에서 겪는 고통에 대한 공감 때문인지 각자의 사정을 떠나 사람에 대한 연민이 느껴졌다. 어쩌면 불행했던 어린 시절도 이제는 흘러간 세월만큼 담담하게 다가오고, 가족들을 향한 측은지심이 그 당시에는 뾰족하게 올라갔던 송곳도 자취를 감추게 하여, 글을 써 내려가는 살림의 펜 끝이 뭉툭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파리처럼 무력했지만 파리보다 더 어리석었다. 거미줄에 걸렸는데도 오히려 기뻐했기 때문이다. (p. 149)


중국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신앙보다는 상업의 윤리를 중시했던 살림의 집은 어머니의 요구로 봄베이에서 다시 파키스탄으로 향하게 된다. 위기에 처한 파키스탄 정부가 특효약으로 눈길을 둔 것은 전쟁이었고, 인도와 중국과의 분쟁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1965년에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다. 이쯤 되면 인도 현대사 전체가 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말하는 살림의 비애감이 만들어 낸 주장도 이해할 수밖에 없다. 사방에서 집이 터지고 무너지고, 구원의 희망도 없고, 얻기 위해 빼앗아야 하는 이 전쟁은 휴... 6년 후에 또다시 일어난다.

살림이 들려주는 참혹함을 조용히 듣고 있는 그의 연인 파드마의 두 뺨에 눈물이 연실 주르륵... 주르륵... 그녀와 독자의 무거운 마음을 달래줌과 동시에 뻔한 전개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지 혹시라도 의문을 품을지 모를 사람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그 걱정은 하지 말라는 듯 친절한 살림이 한 마디 덧붙인다.

“내 이야기는 아직 안 끝났어! 감전 사고와 열대우림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고 골수가 흐르는 들판에 우뚝 솟은 머리통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도 남았단 말이야. 앞으로 아슬아슬한 탈출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고 비명을 지르는 첨탑에 대한 이야기도 나올거야. 간단히 말해서 아직도 다음 상영작과 개봉박두가 수두룩하다 이거야. 부모가 죽으면 인생의 한 장이 끝나지만 그때부터 새로운 장이 시작되는 법이니까.” (p. 227)


책 읽기 전 맨 앞에 있는 ‘차례’를 들여다봤을 때, 도대체 무슨 제목이 이럴까?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다 읽고 다시 들여다보니, 제목만 봐도 머릿속에 줄거리가 떠올라서, 오! 이거 참 포인트를 잘 잡아서 정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찌나 섬세한지 독자의 기억 저장 능력을 염려하여 줄줄이 이어지는 폭풍 같은 이야기를 종종 요약해 줌으로써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척척 들어맞게 해 준다.

저자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활용한 표현이 맨정신으로는 살 수 없을 만큼 비현실적이었던 세상을 떠올리며 말하는 사람의 심정이 어땠을지를 더 생각해 보도록 해주었던 것 같다.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신화와 전설 등과 뒤섞여 있어도 허구와 환상으로 들여다볼 수가 없는 이미 드러난 뼈아픈 역사를 담고 있어서인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서 혼란스러움과 위화감 대신 오히려 ‘본질’을 들여다보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끔찍한 상황을 처참하게 그려내기보다는 순수한 아이가 단순하게 풀어내는 과정을 거쳐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그간의 삶 속에서 겪은 마법처럼 여겨질 만한 비극을 감당하면서 고통 없는 평화와 실낱같은 희망을 꿈꾸고 좌절하다가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이 총칼을 들이대는 사실적인 표현보다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았나 싶다.

서로를 향한 불신과 적대, 그리고 침묵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읽으며 살아가야 했던 가혹한 경험으로 살림이 점점 매사에 초연해지는 현상을 들여다보는 것은 슬픔과 참혹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살림은 그 고통스러운 꿈과도 같은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사랑이 결여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일으켜 세워 준 초월적 힘이 무엇이었는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가장 멋진 기적은 사랑이었다. (p. 130)

다 읽고 나니, 후련하기보다는 아쉽다.
달콤한 디저트를 좋아할 것 같은 한쪽만 검은색 렌즈를 끼운 안경을 쓴 살만 루슈디의 노여움과 울분 가득한 장황한 수다는, 늘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내려놓는 순간 또다시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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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지 2025-09-23 11: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첫 구절에 많은 상념이 밀려오니, 문득 서글퍼지네요.

곰돌이 2025-09-23 12:24   좋아요 1 | URL
저도 갱지님처럼 서글픈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변화되지 않은 삶 속에서 받아들이는 마음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제 삶과 덧대어 들여다보는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고요. 너무 우울해 말라는 듯이 재밌게 입담도 풀어주는 데, 왠지 그게 더 애잔하더라고요!!
 

샬럿 우드의 <상실의 기도>를 방금 받았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이 있지만, 조금만 훑어볼까 싶어서 펼쳐봤다. 계속 읽고 싶게 만드는 느낌이 든다. 속이 시끄러울 때, 방해받고 싶지 않을 때, 소란스러움 없이 차분한 마음으로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잔디는 없고 그냥 흙먼지 쌓인 죽은 풀밭이다. (p. 16)

나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묘비, 기계로 자르고 광택을 낸 그 두 개의 돌덩이 앞에 섰다. 묘비의 색깔과 디자인, 그 위의 글자들은 부모님 누구의 흔적도 간직한 듯 보이지 않지만 분명 내가 결정하고 승인했을 것이다. (p. 16)

나의 외면은 변하지 않았으나 내면의 모든 것이 곤두박질치던 기억. 마치 내 안에서 모래톱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던. (p. 17)

마치 알알이 묵주처럼. 마치 내 몸의 뼈 이름을 하나하나 되새기듯. (p.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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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9-15 19: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따끈따끈한 신간이네요. 잘 모르는 작가라서 이런 책은 먼저 읽은 분의 리뷰가 항상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부커상 좋아요. 부커상 출신 작품들 왠만하면 괜찮더라구요.

곰돌이 2025-09-15 20:44   좋아요 1 | URL
앞부분만 조금 읽어봤는데 불편한 느낌이 없고 편하더라고요.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 싶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흠.. 표현력이 부족해서 답답해요!!) 바람돌이님이 아마 잘 알아채 주실 거라 생각합니다!!ㅋㅋ

바람돌이 2025-09-15 20:45   좋아요 1 | URL
이야기를 계속 들어보고싶은게 제일 핵심이죠. 훌륭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