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4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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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하고, 동시에 저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 그들에게 감동하였습니다. 제가 상처를 입을 때마다 제가 상처를 준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니까요.”

이 소설은 화자인 극작가 ‘커더우’가 이제는 아흔 살이 된 산부인과 의사 고모 ‘완신’의 삶과 자신의 고향인 가오미 둥베이향을 회상하며, 되짚어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수도 있는 순간들을 편지로 써 그가 존경하는 ‘스기타니 요시토’ 선생님께 보내고, 마음속 깊이 묵혀둔 감정들을 손끝에서 흘려보내듯 써내려간 이야기가 희곡 <개구리>로 탄생한다.

서양 의학을 배운 혁명 열사로 부상자들을 치료해 준 지하 병원 창설자인 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업을 잇고자 위생학교에 들어가 열여섯 살에 졸업한 고모는 위생소에서 의료 활동을 하며 신식 조산 훈련에 배치되었고, 그 뒤로 고모가 받은 아이가 모두 1만 명이라고 한다. 어린 나이에도 만만치 않은 경력에 빼어난 미모까지 겸비한 고모 자랑에 ‘나’의 입은 침이 마를 새가 없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처벌받던 시절인 문화 대혁명(1966년~1976년)이 시작되기 전, 동맹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이 적대 관계로 전환해 전운이 감돌고, 공중에서는 비행훈련으로 비행기 굉음이 자주 들려오던 시골 마을에서는 손목시계를 가진 사람도 흔하지 않았으며, 까만 이를 드러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얀 이를 자랑하는 고모였으니 어린 조카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지 말할 필요도 없다. 화자 스스로 과시욕이 있다고 고백한 바, 출신 성분 좋은 집안 식구들 이야기라면 사흘 밤낮도 부족하다.

국가 생산력이 향상되고 경제가 번영하면서 출산율도 덩달아 높아졌다. 고모는 당시 매우 귀했던 자전거로 곳곳을 누볐고, 신식 분만으로 새 시대를 열어야 했던 분위기 속에서 전문적인 의술 없이 산모와 아기의 안전과는 동떨어진 늙은 산파들 사이에서 전도유망한 의사이자 당찬 여성이었다.

이 소설의 화자 ‘나’를 받아준 것도 고모다. 엄마 뱃속에서 거꾸로 선 바람에 발부터 나올 위급한 상황이었으나, “처음이 아니니 혼자서 찬찬히 낳아 보려무나.”라고 말했던 할머니가 밑도 끝도 없이 마당에 나가 북 치고 장구를 치면서 아이들은 떠들썩한 걸 좋아한다며 지들이 안 나오고 배기냐는 소리만 하고 있는 통에 ‘나’는 세상 구경도 못 할 위험에 처했고, 구시대적인 풍습을 철석같이 믿는 할머니를 밀어내고 한 줄기의 빛과도 같은 신식 의술로 출산을 도와준 고모는 생명의 은인이 아닐 수가 없다.

직설적으로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저자의 방식은 내가 미처 고통을 받아들일 마음을 준비할 새 없이 충돌하듯 맞닥뜨리게 하여 흠칫 놀라기도 하고 종종 속에서 뭔가가 자꾸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내 나라, 내 고향에서 벌어진 ‘들추어 내서 말하는 것이 난처하고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일들’을 사람들에게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그 누구도 억압할 수 없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고모가 씩씩거리면서 말했습니다. 정말 이상하네. 여자가 딸을 낳으면 남자는 우거지상이 되던데. 소가 암송아지를 낳으니까 남자 입이 헤벌어지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암송아지는 자라면 다시 새끼를 낳잖아!
고모가 말했어요. 사람은요? 여자아이도 커서 시집을 가면 아기를 낳잖아요?
아버지가 말했어요. 그거야 다르지.
고모가 말했어요. 뭐가 달라요? (p. 56)

남존여비 사상에 찌든 사회에서 볼 수 있었던 보편적인 불행을 담은 현실을 눈에 담아야 하는 것도 고통이라지만, 기술이 있어 굶어 죽을 일은 없는 고모는 큰소리라도 뻥뻥 치는데 그러지도 못한 여성들이 버텨낸 삶을 상상하면 가슴이 갑갑했다.

어느덧 사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이제는 옛날 1960년대 시절의 이야기도 한낱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 ‘나’의 큰형 막내아들의 항공대학 입학을 축하하는 자리에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로 시끌시끌한데, 어디선가 우렁찬 목소리로 일흔이 다 된 고모가 가족들을 향해 한 마디 던지며 등장한다.

아니, 왜 이렇게 큰 등을 켜고 그래? 할머니 하신 말씀 생각 안 나? 컴컴해도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진 않는다고. (p. 80)

평생 타향을 전전하다가 이제야 친정에 온 고모의 모습에서 예전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웠고, 어째 가족들도 예전처럼 고모 주변을 둘러싸고 칭송하던 모습과는 달리 영 탐탁지 않음을 은근히 내비치는 것이 분명 복잡한 사연이 있는가 보다.

‘나’는 살아온 세월이 녹록지 않은 고모 이야기를 소설로 쓰려고 준비해 왔음을 알리며, “하나도 적지 않고, 둘은 적당하며, 셋이면 많다.”라는 구호와 함께 산아 제한 붐이 일어났던 1965년 말, 고모가 공산당 소속 당원으로서 강제성을 띤 산아제한 정책 계획 생육 지도자로서 정책을 짜고, 지휘하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 온 이야기부터 결혼까지 이어지진 않았지만, 고모가 젊은 시절 만난 ‘왕샤오티’라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조종사가 타이완으로 망명하는 바람에 고모가 반동분자라 의심받는 이야기 등등 붉은 깃발이 바다를 이루던 시절의 이야기가 쉼 없이 쏟아졌다.

때때로 백절불굴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순진무구한 동네 사람들이 무척 진지한 태도로 당연한 이야기를 껄껄 웃으며 나누는 모습에 웃는 것이 실례가 될 것만 같은 잔웃음을 짓게 될 때도 있다.

위안 형님도 대단하시죠. 사천 동생이 말했어요. 위안 형님은 우리 샤좡 시장에서 판을 벌이고 점을 치는데, 별명이 ‘신선거사’예요. 우리 큰어머니 댁 암탉이 없어졌는데 위안 형님이 육갑을 짚어 보더니 말했어요. 오리는 물가로 가고, 닭은 풀밭으로 가니 풀숲에 가서 찾아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정말 풀숲에서 찾은 거 있죠? (p. 183)

한숨 돌리고 나니 어마어마한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다.
고모는 계급 의식이 강한 사람이었지만, 계획 생육 정책을 무너뜨릴 수 있는 일은 사회주의 기본 사상을 흔드는 일이라며 출신 성분이 좋은 사람들이 루프 시술, 정관 수술, 중절 수술을 어떻게든 피하려 하자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는 듯이 한 마디로 정리한다.

물이 든 그릇은 반듯하게 들어야 한다. (p. 197)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출산을 도우며 안전하게 아기를 받던 고모의 양손은 권력의 지휘 아래 탄생의 고귀함을 알리는 대신 생명의 흔적을 지워야만 했다.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지금의 삶을 운명이라 여기듯 충성스러운 공산당원으로서 맡은 계획 생육 사업에 광기로 보일 만큼 최선을 다했고, 그 방법은 참혹했다. 나 역시 원칙을 중요시하는 직에 종사하다 보니 불합리함 앞에 그녀가 홀로 감수했을 내적 갈등과 차마 드러내지 못한 괴로움을 모를 수가 없었지만, 길이라는 것이 저쪽으로 가다 보면 이쪽으로도 오게 마련인 것을 왜 그리도 잔혹하게 보이면서까지 다른 방향은 보지 않고 자신을 증명해 내려 하는 건지 참담하기만 했다.

고모는 산모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건강한 아기를 안겨줄 때 순수하고 순결한 감정으로 희열을 느꼈던 사람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때 여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자 존경받았던 고모였고, 어찌 보면 시대와 나라를 잘못 타고 나서 겪어야 했던 일로 온갖 욕을 얻어먹고 있으니 조카인 ‘나’의 시선에서 읽히는 수많은 감정 안에 고모를 향한 연민의 시선이 느껴졌고, 그런 고모의 뒤를 죄책감에서 비롯된 괴로움이 바짝 쫓았다.


누구나 후회가 많은 삶을 살아가면서 죄책감 없이 사는 사람은 없을 것 같다.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고 남들과 똑같이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모습이 이기적으로 비칠 때도 있겠지만 인간이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며 극복하려고 했던 인물과 달리 죄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번민으로 잠 못 이루던 시절조차 잊히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양심과 공감 능력마저 상실한 인간의 이면을 들여다볼 때는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목숨이 걸린 일을 우연한 사건 혹은 소소한 일로 치부했던 사람의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슬프고 비참한 남의 불행에 “자업자득이죠.”라고 말하는 모습에 나는 부작용만 남긴 야만적인 강제 정책에 대해 분노한 것만큼이나 화가 났다. 본질적인 권리를 무시당한 타인의 고통에 아픔을 느끼고,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사람이라면 말이다.

국가적, 사회적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이 작품을 통해 여러 인간 군상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다. 다만, 한낱 먼지인 나의 감상을 조심스레 말해보자면 저자의 솔직한 서술에 기대감이 점점 커져 이 소설의 줄거리와는 상관없이 무언가가 나오겠지... 나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얻지 못한 채 끝이 난 느낌이다. (또르르)

다음에는 모옌의 또 다른 소설 <열세 걸음>을 읽어보려 하는데, 의미심장한 표지부터가 이미 진입 장벽의 높이를 세워주지만 마음의 준비가 끝나면(?)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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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10-01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돌이 님껜 한방이 없었나봅니다.^^
<열세 걸음> 저도 기억해 두겠습니다.

곰돌이 2025-10-01 21:57   좋아요 1 | URL
기대감이 대기권을 뚫고 올라갔었나 봐요ㅎㅎ 모옌의 작품을 읽어봤다는 경험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시간이었어요. 그레이스님처럼 다양하게 읽어봐야겠어요!!

rainbass 2025-10-02 0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우지는 못했지만 생명을 아는 구식산파가 더 많이 죽였을까, 배웠지만 생명을 수단으로 본 이모가 더 많이 죽였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꽤 두꺼운데 잘 읽혔던 책이네요. 나오겠지...나오겠지..곰돌이님의 엄청난 글이 나왔잖아요~ 👍

곰돌이 2025-10-02 06:21   좋아요 1 | URL
중문학을 많이 접하지 못한 편인데, 굳이 취향으로 따져본다면 읽어본 것 중에 류전윈의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재밌게 읽었거든요. 전 좀 더 따뜻함을 얻는 걸 좋아하는가 봐요. 앗, 그리고 남겨주신 댓글 마지막 줄은 블러 처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ㅎㅎ (식은땀)

새파랑 2025-10-04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장사진이 너무 멋집니다 ㅋ 서재가 도서관 급이네요~!! 전 아직 중국문학은 손이 안가더라구요....

곰돌이 2025-10-04 20:57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감성과는 조금 벗어날지도 모르겠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읽어볼까? 하는 마음이 드실 때, 류전윈 <말 한 마디 때문에>를 추천합니다! 책장은 어쩌다가 깔맞춤까지 하며 정리를 하는 바람에 흔적을 남겨봤어요! 느낌 아시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