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장렬한 비애,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자연 앞에서 누추한 나는 너무나 부끄러운 존재였다. 부끄러움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그토록이나 오래 기다려온 사랑 앞으로 걸어 나가고 싶지 않다. 저 바다가
푸른 눈 뜨고 지켜보는 앞에서는 더욱. - P219

단조로운 삶은 역시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지난 늦여름 내가 만난 주리가 바로 이 진리의 표본이었다.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행복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라는 중요한 교훈을 내게 가르쳐준 주리였다. 인간을 보고 배운다는 것은 언제라도 흥미가 있는 일이었다. 인간만큼 다양한 변주를 허락하는 주제가 또 어디 있으랴. - P229

무참하게 무너진 이 노인은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몇 달에 한 번, 혹은 몇 년에 한 번 집에 돌아오던 아버지는 저런 모습이 아니었다.
슬픈 일몰의 시간에 어둠을 등에 지고 들어오던 아버지의 쓸쓸한 귀가는, 그 풍경 속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 있었다. 저녁바람에 날리던 검은 머리칼, 깊숙한 곳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는검은 눈동자, 구겨진 바지 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아버지가 움직일때마다 아슴아슴 풍겨져 나오던 저 먼 곳의 냄새......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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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하고 맑은 공기를 코로 깊게 들이마시며 따뜻하게 내리 쬐는 햇살에 내 등도 내어주고 향기마저 고소한 커피는 호로록 호로록 마시며 여유로운 하루를 보내는 상상을 한다. 핸드폰 속 대기질 ‘나쁨’ 소식이 현실을 알려주는 지금.


슈테판 츠바이크에 매료되어 다시 그의 책을 두권 구매하였다. 아직 북타워에서 얌전히 나를 기다리는 책들을 보며 당분간은 ‘장바구니에 넣어만 둬야지.’하고 맘 먹었는데 어지럽혀진 마음을 비워내듯이 구매 버튼을 눌러 자발적으로 장바구니를 말끔히 시원하게 비워냈다. 다만 지름신에게 굴복 당해서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물건을 구매한 것이 아니라는 것과 더불어 나를 매료시킨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이 곧 온다는 기대감으로 가득 찬 지금. 그럼 됐다. 찡긋.


점잖은 말투로 차분하게 들려주는 말들 속에 그의 유머가 취향저격이다. 2주 전에 읽었던 <감정의 혼란> 속에서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졌다가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교수님을 두고 그의 제자 롤란트가 “ 병마개 위에 달린 병뚜껑처럼 그는 느닷없이 잽싸게 튕겨나간 후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혼자 빵 터졌었다. 무슨 뜻으로 말하는건지는 알겠으나 내가 상상한 느긋하고 고루해 보이는 모습의 교수님이 병뚜껑처럼 뾰~옹!! 하고 냅다 사라졌다가 돌아오는 모습이 만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지길래 진중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책 내용 속에서도 혼자 끅끅 거리며 웃게 만드는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작정하고 의도한 유머가 아닌 자연스럽게 베어나오는 그 매력.(자주 보여주는건 아니라서 더 매력 있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상황들 속에서도 능수능란하게 감정들을 휘어 젓다가 우아하게 실크를 펼치는 듯한 기술적인 묘사가 주는 섬세함. 그래서 현재 상품 준비중이라는 주문 현황이 날 너무 설레이게 한다. 또 찡긋.


작년 이맘때쯤을 떠올려보니 많은 변화가 있더라.
여러 일들을 겪고 난 이후로 점점 더 염세적으로 변하여 책을 읽어도 눈길이 가고 손길이 가는 것은 분명 소설은 아니었다. 그런데 확실히 이제는 분야의 폭이 조금씩 넓어짐을 느낀다. 그건 나의 심적 변화가 있음을 뜻하는게 아닐까? 긍정적으로 와닿았다.


여러모로 뒤숭숭한 3월도 차근히 열심히 잘 살아 내야겠다. 그럼 해준 것은 하나 없어도 저절로 우리를 위해 예쁘게 피어주는 꽃들과 함께 더 화사한 4월을 안정적으로 지내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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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잊을 수 없는 것들은 언제나 뒤에 남겨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서 과거를 버릴 수 없는 것인지도. - P191

"이게 바로 구절초, 우리가 흔히 들국화라고 부르는 꽃들의 진짜 이름은 구절초야. 쑥부쟁이 종류나 감국이나 산국 같은 꽃들도 사람들은 그냥 구별하지 않고 들국화라고 불러버리는데, 그건 꽃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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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이모와 외할머니의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아련히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는 것을 느끼면서 잠 속에 빠져드는 기분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다. 어머니가 울거나 소리치지않고 오랜 시간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어린 안진진의 외갓집 나들이였다. - P132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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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부른 일상 이야기>

“ 엄마, 나 택배로 시킬 거 있는데 혹시 필요한 거 있어?“
” 봄동이랑 오이랑 상추랑 깻잎. 묵무침이나 해 먹을까?“
” 왜? 또 아빠가 묵무침 해달라고 했어? 묵 쑤느냐고 괜히 엄마 힘만 드는데 그냥 두지......”

나는 안다.
어차피 엄마는 마음속에서 이미 며칠 전에 냉동실에 자리차지나 하고 있는 녹말가루로 묵을 쑬 계획을 세웠다라는 걸. 그 불을 지피게 한 것은 아빠라는 것도.
(눈치가 조금 없을 뿐. 그저 본능에 충실했을 뿐.)

“ 녹말가루가 냉동실 자리차지나 하고 있어서 그냥 대충해서 먹어치우지 뭐.”
모든 엄마들의 국룰1탄처럼 묻는게 묻는게 아니다. 누군가의 의사 따위는 필요없는 그저 혼잣말을 크게 하는 것 뿐이다.

엄마가 부엌에서 분주하게 이것저것 만들어내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우리집의 쩝쩝박사 아빠는 그저 해맑게 기대와 행복으로 가득 찬 얼굴을 하고, 난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이미 벌써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해진다.
(아빠는 엄마가 쉬는 걸 못 견디는 유전자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내방으로 들어오는 그릇 달그락 달그락 소리들로 내 귀가 상당히 괴롭다.)
둘다 저렇게 웃어가며 꽁냥꽁냥 맛나게 해 먹겠다는데 뭐가 그렇게 안 내켜서 나는 불만인걸까. 심보 참 고약하네.
휴...할말하않...

굉장히 안 내킨다.
우리집에 엄마들의 국룰 2탄 ‘대충해서 먹어치우기’ 가 선포되면 응답하라 1988 덕선이 엄마가 강림하시고 맛있게 딱 한번만!!먹고 깔끔하게 잘 먹었습니다!!로 끝나는 법이 없다.

나는 안다.
분명히 세숫대야만한 거대한 크기의 그릇에서 묵무침이 까꿍 하고 있을거라는 걸. (날 먹어치워줘~~~~냠)

엄마 힘들까봐 염려되서 뭔가 해볼까? 하는 액션만 나와도 일단 정지!!제어부터 들어가는 내가 대단한 효녀인줄.
이렇게 열을 내는 이유는 늘 언제나 남은 녀석들을 먹어치우는 처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 나도 안다.
이렇게 곁에서 엄마가 해주는 음식 맛있게 먹는 순간 조차가 엄청나게 귀하고 소중한 것이라는 걸.
우리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역시나 내 실력 죽지 않았네!! 하면서 얼마 전 나름 요리라고 말하기엔 뭐하지만 내가 만든 찌개가 생각보다 엄마가 만든 찌개보다 맛이 꽤 괜찮게 나와서(지금 생각해도 신기방기)너도 놀라고 나도 놀라 엄마를 당혹스럽게 만든 그 사건이 단순 우연의 헤프닝이 될 기회를 주는 것이라는 걸.
그리고 일상의 행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어느하나 당연한게 아니라는 것을.

나는 배부른 일상을 보냈다. (여러의미로)

그리고 나는 봤다.
이미 진작에 예고한 거대한 세숫대야 묵무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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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5-03-04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까이 살면 조금 얻어 먹고 싶은 비주얼입니다.
곰돌이님의 마음은 아는데 주책스럽게 넘 맛있어 보여요.
집에서 직접 묵을 쑤면 계속 저어야 하잖아요!
어머님, 힘드셨을 것 같아요^^
얼마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나 울컥했어요^^

곰돌이 2025-03-04 19:03   좋아요 1 | URL
처음 받아보는 댓글에 깜짝 놀랐어요^^ 맛있어 보인다는 말씀을 얼른 전달하였습니다.(무지 좋아하시네요.^^ 칭찬에 목마르신 쉐프님이라서요.) 페넬로페님 울컥 하신 마음에 저의 닿지 못하는 손 부끄럽지만 살포시 얹어 드려봅니다.

숲노래 2025-03-04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곰곰이 보면 머잖아 ‘엄마손 집밥’은 가뭇없이 사라지리라 봅니다. ‘엄마손 집밥’이 사라진 자리에 ‘아빠손 집밥’이 깃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집밥 시늉 시킴밥(배달요리)’이 차지할까요?

곰돌이 2025-03-04 19:02   좋아요 0 | URL
숲노래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 아빠손 집밥은 이번 생에는 어려울 거라 확신합니다. 상상만으로도 뒤치다꺼리로 분주해지네요.^^ 솜씨는 없지만 흥미는 있어서 조금씩 실력을 연마하고 있는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될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