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리나 강의 다리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39
이보 안드리치 지음, 김지향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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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지르. 오스만 제국의 고위 관료를 가리키는 이 말은 마을 아이들에게 대단하고, 어마어마하고, 환상적이고 묘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대베지르에 오른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가 16세기 후반 비셰그라드에 다리를 세우게 한다. 지금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동쪽, 서로 다른 믿음과 풍습을 지닌 사람들이 한데 살아가던 작은 마을이다. 이보 안드리치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다리를 세우는 일이 처음부터 마을 사람들에게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가난한 농민들은 강제로 노동에 끌려 나왔고, 누군가는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라야’라 불리던 일반 백성들, 그중에서도 기독교 농민들이 특히 고통을 겪었다. 잠 못 이루는 인부들 사이에서 몬테네그로 출신의 남자가 구슬레(발칸 지역의 전통 현악기)를 꺼내 콧소리 섞인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장면이 생각난다. 농부 한 사람은 마구간 밖에서 터키인들이 오는지 망을 보고, 나머지는 노랫말을 되뇌며 잠깐 노래에 홀린다. 경쾌한 가락이 이어지자, 축 늘어져 있던 사람들도 잠시 모든 걸 잊은 것 같다. 노래가 고된 노동을 덜어주지는 못했겠지만, 그 순간만큼은 다른 무언가에 지친 마음을 맡길 수 있지 않았을까.

다리 주변으로 집이 늘고 카사바라 불리는 작은 읍내에는 장터가 선다. 기독교도 아이들은 세례를 받으러 다리를 건너고, 무슬림 아이들은 다리 주변에서 물고기를 잡으며 친구들과 논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과 다리 한가운데 작은 광장 같은 카피야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구경하다 보면 낯설기만 했던 이곳이 어느새 가까워진다.

흥미를 끌 생각은 없어 보이는 무심한 표지. 지난번 같은 출판사(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이반 곤차로프의 <오블로모프>를 읽고, 책도 사람마냥 생긴 걸로 판단하면 안 되겠구나 싶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그렇다. 오스만 제국 시절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기를 거쳐 1차 대전까지, 굵직한 역사가 다리 위를 지나가는 사이사이에 여러 에피소드가 담겼다. 일일이 세어보진 않았지만, 책 소개 글을 보니 그 숫자가 무려 200여 개라고 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다 눈에 불을 켜고 읽을 수야 없기에 별 감흥 없이 책장이 넘어가는 순간도, 페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까워 남은 분량을 손으로 만지작거려 가며 읽는 순간도 있었다.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18세기 후반, 비셰그라드에 큰 홍수가 닥친 날 밤이다. 물을 피해 높은 지대로 올라온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마을의 한 집, 널찍한 1층 방에 모여든다. 사람들을 대피시키느라 바빴던 이들부터 상인과 성직자, 무슬림과 기독교인, 유대인까지 다 뒤섞여 있다. 처음엔 사람 구하고 대피시키는 일을 의논하다가, 밤이 깊어지자 커피와 발칸의 전통주 라키야를 나누며 눈앞의 재난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꺼낸다. 평소에는 한자리에 모일 일이 드물었을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한다. 불안과 걱정을 농담으로 숨기고 잠깐의 평온 속에서 시린 몸을 녹여보는 거다. 다른 이야기들에서도 종종 보이는데, 카사바 사람들은 웬만한 소란쯤은 먼 산 보듯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으면 또 한편으론,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지는 거겠지 싶기도 했다.

인생살이에 지치고 걱정이 태산 같은 백발의 아버지들이 그들의 생애에서 가장 크고 쓰라린 사건이었던 그 ‘대홍수’에 화제가 미칠라치면 언제나 활기를 띠고 갑자기 말이 많아졌다. 그들이 다시 재산을 복구하고 집을 다시 지어 15년 또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간 뒤에는 이 ‘홍수’도 엄청나고 끔찍하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정다운 것으로 회상되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도 살아있는 그 세대의 인간들 사이를 정답게 묶어주는 하나의 정겨운 유대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극복해낼 수 있는 공동의 불행으로 그것만큼 사람들은 서로 친밀하게 결속해주는 것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p. 107)

단지 그들과 그들 세대에게는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는 그런 이야기들이 그렇게 꼬리를 물고 계속되었다. 모두 순수하지만 또 아름답고 힘겨웠던, 카사바에서 산 모든 사람의 일반적인 회상들이었던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은 예전에 있었던 얘기들로 그들과 가장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지만 오늘 이렇게 환상적인 원을 만들게 된 이 밤의 드라마와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p. 114)

나는 이런 대목이 좋았다. 어디 기록에 남을 일도 아닌데, 거기 살던 사람들한테는 두고두고 입에 올릴 하루였을 법한 이야기들.

누군가는 사랑하고 다투고, 누군가는 지난날을 곱씹고, 누군가는 내일이 두렵고, 또 누군가는 별것 아닌 이야기를 꺼내며 웃는다. 그 사이에는 민족의 독립과 민중의 해방을 두고 정치가 먼저냐, 당장 하루를 살아내는 일이 먼저냐며 한바탕 논쟁을 벌이는 학생들도 있다. 세상은 몇 번이고 달라지고 사람들은 그 변화에 휩쓸리기도 하지만, 좀처럼 변하지 않는 풍습과 기질을 붙들고 “사람이 얼마나 빨리 가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어디를 가는지 어떤 일로 가는지가 중요하다”며 제 속도로 살아가는 이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하나씩 그려지는데, 별일을 다 겪으면서도 살아가는 모습이 때로는 기막히고 서글프다. 모순되게도 문장은 참 아름답게 읽혔다. 별 가득한 밤하늘 밑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한평생을 살아낸 노인 옆에 앉아서,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를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랄까. 이놈의 불은 대체 언제 다 타는 거야 싶다가도, 막상 마지막 장작이 타닥 소리를 내며 무너지고 불씨마저 사그라들면 괜히 장작 하나쯤 더 얹고 싶어지는 그런.

눈앞에 풍경이 펼쳐지고 인물의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해서 장면이 그려지는 것과는 조금 다른, 그 시대가 문장 안에 그냥 들어앉아 있는 느낌. 이런 책을 방구석에서 세상 편한 자세로 읽을 수 있다는 것. 이 정도면 꽤 소박한 근사함 아닌가? 그런데 점점 마음이 착잡하다. 이 책이 세상에 나오고 거의 반세기가 흐른 뒤, 비셰그라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서다. 1992년, 보스니아 전쟁. 한때 같은 다리 위에 모여들던 사람들이 살던 곳에서 말이다. 대홍수의 밤에 둥글게 모여 앉은 사람들을 보며 잠시 가슴 한구석을 데워보기도 했는데, 그들이 아직 모르는 일을 나 혼자 알고 있는 채로 끼어 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래도록 이웃으로 살아왔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었고, 함께 살았다고 서로를 다 이해했던 것도 아니었을 테다. 대홍수 장면이 더 오래 내 마음에 남는 것도 그래서인 것 같다. 그 밤에 오가던 웃음과 훗날 그곳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이 좀처럼 한데 겹쳐지지 않는다. 다 현실 같지가 않다. “땅과 권력과 인생관과 질서를 위해서” 그토록 많은 것을 걸고 서로를 밀어내는 동안에도 시간은 곁을 스치듯 지나가고 있다.

“과연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한단 말인가?” (p. 196)

이제는 기억하는 사람도 드물어진 이야기들, 아니, 나 먹고사는 일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 속에서 모든 집착과 이런저런 압박을 내려놓아 본다. 그리고 어쩔 도리 없는 여러 재앙 앞에서, 가련하고 애달프긴 해도 ‘기꺼이 웃어넘길 수 있는 힘’을 보여주는 인간의 모습에 숨을 돌려본다. 그러는 동안 내가 붙들고 있던 것들이 잠시나마 전부는 아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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