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로베르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었는데, 호아킨 폰트라는 인물이 자기 딸의 친구이자 젊은 시인인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지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그런 문학은 넘쳐 난다.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내 생각에는 그것이 최고의 문학이다. 슬플 때를 위한 문학도 있다. 기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지식에 갈증을 느낄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절망할 때를 위한 문학이 있다. 이 마지막 문학이 울리세스 리마와 벨라노가 하고 싶어 한 문학이다. 곧 알겠지만 심각한 오류이다. 예를 들어 평온하고 교양 있고 대체로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성숙한 독자, 즉 평균적인 독자를 생각해보자. 책과 문학지를 구매하는 사람을. 자 그 사람이 여기 있다. 그 사람은 차분할 때를 위해, 평온할 때를 위해 쓰인 문학을 읽을 수 있다. 또한 터무니없거나 유감스러운 공모(共謀) 없이 비판적인 눈으로 그리고 냉철하게 다른 모든 종류의 문학을 읽을 수 있다. (...) 사람이 평생을 절망하면서 살 수는 없다. 몸이 결국 말을 듣지 않게 되고, 고통은 결국 견딜 수 없어지고, 총명함은 차가운 세찬 물줄기 속에 사라진다. 절망하는 독자는 결국 책과 멀어지고, 필연적으로 절망만 하는 사람이 된다. 아니면 절망을 치료한다! (...) 광맥을 고갈시키지 말라고! 겸허해지라고! 미지의 땅에서 찾아 헤매고 방황하라고! 그렇게 하되 빵 부스러기나 하얀 조약돌 같은 생명줄은 유지한 채! (《야만스러운 탐정들 1》, p. 321)
기존 문단의 질서에 맞서 자신들만의 문학을 꿈꾸던 반항심 가득한 청년들에게 건넨 조언이었다. 물론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는 않았지만... ㅋㅋ 내가 그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호아킨이 최고의 문학이라고 말한 ‘평온할 때를 위한 문학’을, 특정한 감정 하나에 독자를 붙들어 두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문학으로 읽었다. 그리고 이 말은 꼭 문학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벨라노와 리마를 향해 던진 호아킨의 문학적 조언이 다 와닿는 것은 아니었다. 절망에 깊이 잠긴 문학이 어떤 독자에게는 오히려 자신의 감정을 마주하게 하는 통로가 되어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오게 만들기도 하니까. 단단히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 곳도 갈 수 없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게 돼버린 이들에게도, 언젠가 문을 열면 자신을 기다려 줄 곳이 남아 있기를 바란다. 이건 어디까지나 독자인 내 바람일 테다. 모든 종류의 문학을 한 발짝 거리를 두고 읽을 수 있을 만큼 자유롭고 성숙한 독자는 아닌, 그저 취향에 맞는 책을 집어삼키는 내게는 어둠 속을 방황하더라도 결국 삶으로 돌아올 ‘생명줄’을 쥐고 있으라는 당부의 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사실 늘 평온하기만 한 사람이 있을까 싶다. 아마 호아킨이 말한 평온함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라기보다, 온갖 고통의 소요를 치르고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닐지. 지금의 나에게는 내공에 가까운 말이다.
예전에는 특정한 감정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 중 하나로 문학이 내게 이용당하곤 했다. 이제는 어떤 감정 속에 있더라도 그것을 조금 더 넓게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만들어준다. 그 감정에만 오래 머물지 않게 해준다고 해야 할까. 그 고마움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붙들고 읽어 나가는 것뿐이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변할지는 알 수 없다. 삼십삼 년을 살아오며 어설프게나마 깨우친 것이 몇 있긴 해도 (진짜 있기나 한 건지...), 정말 앞날만큼은 알 수가 없다. 그건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와도 모를 일이지. 그리고 오늘의 이런 건전한 생각(?)이 앞으로도 그대로 유지되면 좋겠다만, 온갖 것을 다 쏟아부어도 ‘영 오늘은 날이 아니구나!’ 싶은 개떡 같은 날은 또 따라붙기 마련이다. 그런 날에는 화려한 수식어구가 필요치 않은, 그저 글을 썼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던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읽고 마음을 헤아려보며, 잠깐 내 사정은 잊고 몰입한다. 그러다 문득,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 그 어떤 틈새가 내게도 있었던 거구나 싶어 ‘이만해도 됐지 뭐’ 하며 지나간다. 그렇게 지나가진다. 그러고는 다시 책을 편다.
돌고 돌아 7월에 산 책 이야기다. 이놈의 손가락이 인내라는 것을 몰라 장바구니를 비우고 또 몇 권 품에 들였다. 책을 고르는 일은 늘 그렇다. 읽고 싶은 마음은 앞서고, 참는 마음은 늘 한발 늦는다. 책 선택의 고민을 덜고, 또 다른 세계로 쉽게 발을 들일 기회를 얻는 일은 언제나 반갑고 귀한 일. 이번에도 먼저 읽고 좋은 리뷰를 남겨주신 알라디너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소박한 땡투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앞서 호아킨의 문장 하나를 붙잡고 이야기가 길어졌으니, 새 책 이야기는 가볍게 남겨야겠다.
토니 모리슨 《가장 푸른 눈》, 《솔로몬의 노래》
누군가의 상처를 개인의 불행으로만 남겨두지 않고, 그 뒤에 놓인 사회와 역사의 그림자까지 드러내는 작품은 늘 내 책장 한 켠을 차지한다. 그중에서도 흑인 여성 작가들의 작품에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다. 그동안 만나봤던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식민지의 기억과 여성의 목소리를, 글로리아 네일러는 흑인 여성 공동체의 삶을, 옥타비아 버틀러는 SF라는 장르를 통해 인간과 사회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이번에는 토니 모리슨이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한 시대를 담아내는 소설, 역사와 인간이 얽힌 이야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보스니아의 드리나강 위에 놓인 한 다리가 무슨 이야기를 한다는 걸까. 시작은 다리를 둘러싼 오래된 전설과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부터 천천히 풀어낸다. 오스만 제국 시절 세워진 그 다리는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이 살아가고 사라지는 시간을 지켜봤고, 제국이 바뀌고 전쟁이 휩쓸고 지나가는 시간도 묵묵히 견뎌냈다. 수백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킨 다리라면, 웬만한 역사책보다 더 많은 사람의 삶과 시간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이 다리가 간직한 것은 거대한 역사의 기록만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이 기억하고 이야기로 남긴 순간들, 그리고 그들이 잊어버린 시간까지도 함께 품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사람들이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고 전설로 바꿀 수 있는 것들만을 기억하고 다시 곱씹어 이야기하는 법이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여러 가지 자연 현상들에 대해 무관심하듯 그렇게 특별한 흔적을 남기는 법도 없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갈 뿐인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건드리지도 그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는 법이니까. (p. 32)
알라 알아스와니 《야쿠비얀 빌딩》
1934년 아르메니아인 사업가 하굽 야쿠비얀이 카이로 중심가에 지은 10층짜리 유럽풍 건물. 처음에는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호화롭게 살아가던 최고급 아파트였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모습도 달라졌다. 1952년 이집트 혁명 이후 외국인과 상류층 사람들이 떠나고, 일부 공간은 사무실이나 병원, 임대 공간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과거 하인들이 머물던 옥상에는 값싼 거처를 찾는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또 하나의 서민 사회가 만들어졌다.
처음 만난 인물은 자키 베다. 상류층 명문가 출신이지만 혁명 이후 집안이 몰락하면서, 한때 꿈을 펼치던 엔지니어링 사무실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신세가 되었다. 여자를 좋아하고 음담패설을 즐긴다. 그리고 그런 그를 20년째 ‘주인님’이라 부르며 모시는 아바스카룬이 있다. 그렇다면 건물 꼭대기에는 어떤 삶이 펼쳐지고 있을까. 라크아를 행하는 모습, 침대에서 있었던 일을 부끄러움 없이 이야기하며 웃는 여자들, 그리고 빵 한 덩어리를 얻기 위해 고단한 하루를 버텨내는 사람들. 그곳에는 팍팍한 삶 속에서도 잠시나마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대단하지 않은 작은 순간들을 붙잡으며 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곤소곤 대는 소리,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는 모습, 기침 소리,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기도문 소리와 함께.
쥴퓌 리바넬리 《세레나데》
소설의 주인공은 서른여섯 살의 마야 두란이다. 그녀는 지금 보스턴행 비행기에 올라 노트북을 펼쳤다.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을 생각이다. 마야는 석 달 전으로 돌아가 그날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스탄불 대학에서 외국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을 하는 마야는 어느 날 독일 출신의 87세 미국인 노교수 막시밀리안 바그너를 수행하게 된다. 늘 그랬듯 튀르키예를 소개하고 손님의 편의를 도우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른손에는 바이올린 케이스를, 다른 손에는 여행 가방을 든 노교수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와 침묵이 조금 마음에 걸린다. 그러던 순간, 교수가 묵을 숙소로 향하는 택시 뒤를 계속 따라오는 수상한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온다. 뭐지? 공상하는 재미로 살아가는 마야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바빠진다. 이 교수가 혹시 스파이는 아닐까. 뒤따르는 차는 정보국 차량은 아닐까. 갑자기 요원들이 들이닥쳐 교수를 납치하는 것은 아닐까. 온갖 상상을 펼치던 마야. 대체 왜 그녀는 몇 달이 지난 지금 그날의 이야기를 꺼내 글로 남기려 하는 걸까.
나는 모든 걸 다 털어놓을 셈이다. 이렇게 다 이야기하고, 내가 목격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야 내 고통도 극복될 테고, 삶도 단순해질 테니까. (p. 10)
마리아나 엔리케스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최근에 라틴아메리카 문학을 몇 권 읽었던 터라 이쪽 작품들도 두루 살펴보던 중, ‘라틴아메리카 고딕 리얼리즘의 대가’라는 소개에 이끌려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작품을 집어 들었다. 아르헨티나의 어두운 역사와 오늘날의 사회 문제를 공포라는 장르에 녹여낸 열두 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실제 아르헨티나에서 벌어진 방화 살인 사건을 모티브로 한 표제작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부터 읽어봤다.
“뭘 알고 싶어 하는 거죠?” 실비나가 물었다.
“음, 분신 의식이 언제쯤 끝날지 알고 싶어 하더구나.”
“언제쯤 끝날 걸로 보세요?”
“얘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하지만 나는 말이다, 영원히 안 끝나면 좋겠어!” (p. 342)
어느새 웬만한 일에는 쉽게 놀라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실비나 역시 거창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버스에서 소매치기가 자신의 가방 속을 들여다볼지 두려워 빈자리가 생기면 안도하는, 어디에서나 마주칠 법한 평범한 여성이었다. 그런데 그런 실비나가 개인의 사건을 넘어 국가 폭력의 문제까지 마주하며 여성들의 연대 속으로 한 걸음씩 들어간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선뜻 앞에 서지는 못했던 이들이라면, 실비나를 어렵지 않게 따라갈 수 있다. 연대는 처음부터 특별한 사람들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사회에서는 자기 몸으로 저항하게 되고, 세상이 끝내 듣지 않는다면 사람은 결국 몸으로 말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알고 있었고, 또 알려고 했을까. 세상이 보내는 신호들을 남의 일처럼 지나치고 또 하나의 끔찍한 사건 정도로 넘겨버리면서, 당장 내 앞의 현실을 살아내는 데 바빴던 내 얼굴도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왜 많은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선택까지 했는지, 왜 마리아 엘레나는 끝나기를 바라야 할 이 의식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는지. 그 앞에서 나는 아직 불에 타지 않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이었다.
H. P.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공포 소설은 이상하게 손이 잘 안 갔다. 시청각적 자극 없이 활자만으로 과연 어디까지 몰입을 끌어낼 수 있을까, 늘 반신반의했다. 그런 작품이 있다고 해도 뭘 알아야 읽어볼 거 아닌가. 주구장창 고어만 늘어놓으며 사람 기분만 더럽게 만드는 공포보다는, 밤에 괜히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덮고 싶게 만드는 그런 공포를 원하던 차에 이 책을 발견! 여름이 가기 전 늦은 밤에 펼쳐볼 생각이었는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가장 짧은 작품들 위주로 분위기만 먼저 느껴봤다.
꼿꼿한 자세로 감정 기복 없이 읽어 내려가다가도, 분명 별 타격감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읽는 도중이나 마지막 문장에 다다를 때 등을 훑고 가는 싸한 무언가가 있었다. 공포를 빌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으로 이끄는 작품도 있었다. 난 이게 더 좋았다. 그 끝에서 마주한 기괴한 절망과 나도 모르게 흘러나온 조용한 탄식. 나처럼 장르 소설과는 거리가 있는 독자에게도 의외의 재미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총 14편 가운데 「랜돌프 카터의 진술」, 「에리히 잔의 연주」,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 「아웃사이더」까지 네 편을 먼저 읽었는데, 가장 오래 남은 건 마지막에 읽은 「아웃사이더」였다. 비명을 내지르게 만드는 공포가 아니라, 마치 피아노의 마지막 단조 화음을 쾅 하고 내리친 뒤, 그 울림이 한동안 가슴에 머무는 듯한 느낌에 가까웠다.
과거를 망각한 덕분에 편안해지기는 했어도 내가 아웃사이더라는 것만은 언제나 기억하고 있다. 이 시대와 인간들 틈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낯선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거대한 황금 아치 너머에 있던 그 괴물에게 뻗은 내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유리 표면이 만져졌을 때부터 깨달은 사실이었다. (「아웃사이더」, p. 109)
오노레 드 발자크 《잃어버린 환상》, 《골동품 진열실》
시작은 《사촌 퐁스》였다. 고구마 줄기의 끝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최근에 고른 《골짜기의 백합》도 시작부터 영 마음을 움찔거리게 했다. 아무래도 이번이 끝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래, 고민할 필요가 뭐가 있나. 읽으면 되지.
《잃어버린 환상》 1권의 시작을 알리는 니콜라 세샤르. 읽고 쓰는 능력이 없어 식자공이나 교정자의 역할은 할 수 없었던 수습 인쇄공 출신의 그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거대한 변화 속에서 뜻밖의 기회를 얻는다. 국민공회의 법령을 빠르게 유포해야 했던 시대적 필요 덕분에 ‘어쩌다 보니’ 인쇄업 면허를 받고, 인쇄소 사장까지 되었다. 하지만 정작 인쇄소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글을 읽고 다룰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이 운이 따르면 문짝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가. 때마침 몰락한 귀족 모콩브 백작이 그의 앞에 나타난다. 자신의 신분을 숨겨야 했던 백작은 살아남기 위해 인쇄소 감독관으로 일하게 되고, 세샤르는 그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서로 전혀 다른 위치에 있던 두 사람이 시대의 변화 속에서 뒤섞인 과정을 흥미롭게 따라가던 중에 한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가난이 끝나면 탐욕이 시작되는 법이다.” (p.21)
뒷이야기가 궁금하지만, 읽다 보면 끝이 없으니 함께 고른 《골동품 진열실》을 펼쳤다. 이번에는 프랑스의 작은 지방 도시 알랑송, 아직도 옛 귀족 사회의 공기가 짙게 남아 있는 곳으로 들어간다. 앞서 읽어본 《잃어버린 환상》과 마찬가지로,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뒤 부르봉 왕정복고를 거치며 사회 질서가 새롭게 자리 잡아가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세상은 이미 신흥 부르주아가 돈의 힘으로 세상을 움직이는 시대로 바뀌었건만, 발자크는 가장 먼저 혁명으로 몰락한 데그리뇽 가문을 보여준다. 많은 것을 잃었는데도 데그리뇽 후작은 여전히 과거 귀족의 명예와 품위를 붙들고 살아가고, 그 곁에서는 충직한 집사 쉐넬이 현실을 묵묵히 떠받친다. 아직은 인물들을 하나씩 소개하는 단계인데, 발자크 표 각성 한 방 기대 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