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만큼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읽고 쓰기를 꾸준히 이어 나가는 중이다. 예전에는 생각도 못 하던 일이다. 키보드 위로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글만 떨어트리던 손가락이었다. 나의 사적인 속내를 담아본다? 그건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졸음 참는 거다) 덜어내고 비워내는 것에 조급해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의 감정이라도 일단 담아보자는 마음으로 그렇게 ‘쓰기’를 시작했다. 뚝딱거리던 손가락이 서서히 괜찮아질 때쯤이었을까. 권여선 작가의 책을 읽는데, 머릿속에서 뭔가 불이 번쩍했다.

오래전 젊은 날에, 걸리는 족족 희망을 절망으로, 삶을 죽음으로 바꾸며 살아가던 잿빛 거미 같은 나를 읽고 이해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니, 그런 사람을, 나를 알아본 그 사람을, 내 등을 두드리며 그러지 마, 그러지 마, 달래던 그 사람을 내가 마주 알아보고 인사하고 빙글 돌 수 있었다면. (<각각의 계절>, p. 241)

쏟아내든지, 그것도 아니면 주변을 좀 살펴보든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물어물 말만 흐리다가 곁에 있는 애먼 사람들만 안절부절못하게 만들면, 아니, 그대로 이 순간을 흘려보내면 나중에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론 시간에만 맡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그건 스스로가 잘 안다. 그렇게 읽고 쓰면서 스스로를 추슬러 보고 난 뒤에서야 “독서는 경이로운 애도” (<작은 파티 드레스>, p. 9)라는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을 깊이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적다 보니 영 분위기가 우중충해질라 한다. 어쨌든! 역시, 책은 옳다. 쓰는 것도 그만큼. 때론, 그보다 더.

6월에 고른 책 이야기로 넘어가야겠다. 내 보석함에 모셔놓은 알라디너 분들의 글을 훔쳐보다가 발견한 책 몇 권, 그리고 최근에 읽은 것 중 더 읽어보고 싶은 작가의 책 몇 권을 책장에 채워봤다. (감사의 마음은 땡투에 담아...) 더운 여름날 시원한 물 한 잔만큼이나 맛있는 찍먹의 순간! 물음표를 달고 짐작과 궁금증이 부풀어 오르는 딱 이 타이밍만의 재미를 즐기며, 이번에도 앞부분 느낌 정도만 남겨본다. 아님, 좀 더 길게.



이반 곤차로프 <오블로모프>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기행 작가인 이반 곤차로프의 작품이다. 이제껏 읽어온 소설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른 특질을 지닌 주인공의 모습이 독특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1850년대 러시아를 시대적 배경으로 둔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삼십 대 초반의 남성, 일리야 일리이치 오블로모프다.

딱 부러진 이념도 없는 것이, 무언가에 몰입할 만한 인물로는 보이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처럼 생각이 얼굴에서 산책을 하고, 눈 안을 휘저으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반쯤 벌어진 입술에 내려앉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이마의 주름살 사이로 숨어버렸다가 이번엔 어디론가 아주 자취를 감춰버리곤 한다. (...) 단 한 순간 피곤도, 따분함도 그의 얼굴에서 온화함을 내몰지는 못한다. 그 온화함은 얼굴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p. 11)

저자는 그 온화함이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며 아름답게 포장해 주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안다. 그 온화함은 지갑에서 나온다는 만고의 진리를... 돈 많은 백수임이 틀림없다! (아닌가?) 한참 사회활동을 할 법한 나이에 누워있는 게 일상인 데다가 따분함을 느낄 만하다가도 다시 유턴해서 곧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온화함을 내비칠 수 있다? 게다가 “모든 근심은 한숨으로 해결되고 무관심과 졸음 속에서 기력을 잃고 만다 (p. 12)”고 하니 혼자 속 끓여대면서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어 보이고! 좀 낡긴 했지만, 신축성 좋은 잠옷에 부드러운 신발까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흠, 그러면 그렇지. 가세가 기울었다고는 하나 하인까지 둔 지주였다. 그런데 집 안 꼴이 말이 아니다. 사방에 쌓인 먼지는 기본이고, 거미줄에, 널브러진 접시와 먹다 흘린 빵 부스러기까지. 나름 최소한의 질서는 있는 건지, 오블로모프가 하인 자하르를 부른다. 잠시 후, 오랜 관성과 고집으로 단련된 기존쎄 같은 기운을 풍기며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얼굴의 자하르가 등장한다.

“집구석 한번 깨끗하다. 먼지 하며, 너절한 게, 맙소사! 저기, 저 구석 좀 보란 말야. 하는 일이 뭐야, 도대체….”
“아니, 하는 일이 뭐냐니유….” 자하르가 억울하다는 투로 툴툴거렸다. “애쓰구 있잖유. 사는 게 뭔지! 먼지두 훔치구, 청소두 거의 매일 하는디….”

“청소해, 구석의 쓰레기도 치우고. 그럼 빈대니 하는 것들도 없어질 거야.”
“치워봐야 또 쌓일 텐디유 뭐.”

160여 년 전의 러시아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모습은 뭐,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또 이런 사람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는 거니까. 그런데, 이 소설의 저자 이반 곤차로프는 공무원 생활을 오래 했는데 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한 독특한 이력까지 있다. 그 말은 오만가지의 인간을 겪어봤다는 말씀?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다들 기를 쓰고 달리는 격동의 19세기 러시아 한복판에서, 왜 하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웠을까.



아모스 오즈 <유다>

<나의 미카엘>이 워낙에 유명했지만, 딱히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를 읽게 됐는데, 아주 좋았다. 강력한 스파크를 일으키는 감정은 아니지만, 어떤 경계에서 부유하는 인간의 두려움과 머뭇거림의 기억을 공유하는 동안 생각지 못한 동질감이 느껴졌고, 마음이 쓰였다.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노력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건 여전히 유효하기에. 그리고 이 책을 골랐다.

부친의 사업 실패와 연인과의 결별로 마음이 고달픈 스물다섯 살의 슈무엘. 어딘가 불안정하지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그는 원래 ‘유대인들의 눈에 비친 예수’라는 제목의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중이었으나, 어쩔 수 없이 학업을 중단한 상태다. 아모스 오즈 문학의 중요한 무대인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둔 점이나, 슈무엘이 드나드는 사회주의 서클의 논쟁과 스탈린에 대한 담론을 담은 장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 흐르던 예루살렘 지식인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듯하다.

학업과 사랑이 동시에 흔들리며 삶의 방향을 잃은 슈무엘은 예루살렘을 떠나려고 이사를 준비하던 중, “인문학을 공부하는 미혼 남학생, 역사를 잘 알고 있으며, 상대방의 기분을 헤아리는 세심한 대화가 가능한 분, 저녁마다 다섯 시간 정도 학식이 깊고 지적인 일흔 살 장애인 남성에게 말동무를 해 주시면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고 소액의 월급도 지급함. (p. 26)” 이라는 광고를 읽게 된다. 그리고 어딘가 오래된 상처와 침묵이 배어 있는 고택에서, 까다롭고 논쟁을 즐기는 노인 발트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발자크는 늘 읽어보고 싶으면서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는 작가였다. <사촌 퐁스>를 읽고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쳤을지 모른다. 이번에 고른 <고리오 영감>은 ‘인물 재등장 기법’이 최초로 도입된 소설이라고 한다. 안 그래도 <사촌 퐁스>를 읽을 때 재등장하는 인물이라는 소개와 함께 줄거리가 펼쳐질 때마다, 나 혼자 초면이라 우두커니 눈만 끔벅거렸는데, 이번에는 재회의 기쁨을 느껴볼 수 있겠구나. 뭐, 딱히 더 만나고 싶은 인물은 없다만... ㅋㅋ

19세기 프랑스를 담고 있는 이 소설의 앞부분만 슬쩍 들여다보자면, 보케르 부인이 운영하는 하숙집이 등장한다. 주변 지형을 시작으로 냄새부터 내부 벽지 무늬, 가구와 바닥 상태 하나하나 묘사가 길고 빽빽하다. 하숙집 부동산 매물 실사 보고서를 읽는 기분이다. 나의 인내심이 책 읽을 때만큼은 진득함을 유지하기에 참 다행이 아닐 수가 없다. 뒤이어 이 퀴퀴한 3층짜리 하숙집을 채우고 있는 세입자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고향집의 기대를 한 몸에 안고 파리에 상경했다는데 어딘지 모르게 눈빛이 번뜩이는 법대생 라스티냐크, 털털하고 유쾌한 척하지만, 언뜻언뜻 구린 구석과 서늘함을 풍기는 근육맨 보트랭, 그리고 이 하숙집의 공식 샌드백이자 조롱거리이면서도 바보처럼 허허거리기만 하는 의문의 노인, 고리오 영감까지. 저마다 사연 있는 얼굴을 한 사람들이 층수별로 방값에 맞춰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는 이곳은 돈이 전부인 파리 사회의 축소판과도 같다.

말라붙은 심장과 텅 빈 두개골 가운데서 어느 것이 보기에 더 끔찍스러운지 누가 결정할 수 있을 것인가? (p. 12)

그리고 똑같이 19세기 프랑스를 다룬 <골짜기의 백합>을 골라봤다. 우선 펼쳐 든 앞부분의 공기는 <고리오 영감>의 음울하면서도 퀴퀴한 파리 골목과는 전혀 딴판이다. 펠릭스라는 남성이 자신의 연인 나탈리에게 보내는 편지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함께 있어도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자주 상념과 침묵에 잠기던 펠릭스의 모습에, 나탈리는 그의 과거가 궁금해진 모양이다. 과연 그녀에게 지난날을 고백하는 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탈리가 원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오래 묻어둔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꺼내 들기로 한다.

그렇게 펠릭스는 자신의 과거를 적어 내려간다. 갓난아기 시절 시골 보모 손에 맡겨진 일부터, 좀 자라서는 형과 누이들의 지독한 괴롭힘, 부모의 따뜻한 눈길 한 번 받지 못한 채 온 집안의 애정을 철저히 박탈당했던 유년기의 외로움과 불행까지. 더욱 착잡해지는 것은, 펠릭스가 악바리 같은 정신적 저항력을 키워내며 버텨 왔다는 점이다. 부모의 방임 속에서 혼자 차별받는 펠릭스의 모습 위로, 실제 발자크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과 <사촌 퐁스> 속 퐁스의 지독한 결핍이 겹쳐 보여, 이게 또 하나의 맴찢 포인트! ㅠㅠ 편지에 담긴 뒷이야기들이 어떤 내용일지 아직은 모르지만, 당장은 내가 나탈리라면 펠릭스의 편지를 읽자마자 안쓰러운 마음에 일단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을 것 같다.

내 안에서만 갇혀 살아야 하는 가혹한 운명을 바꾸려 얼마나 노력했던가! 열정적인 마음이 오랫동안 품은 희망들이 하루 만에 무너진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 (p. 17)

이런 가시 박힌 장벽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감정의 뿌리가 너무도 깊어서, 또 어머니의 사랑을 포기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그녀에 대한 거룩한 외경심은 버릴 수가 없어서, 우리가 더 나이 들어서 그녀를 정당하게 심판하게 된 그날까지 너무나 어리석게도 그녀를 계속 사랑했다. (p. 26)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행복과 불행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 그저 나에게 달려 있었다. 이를 깨닫는 데 무려 육십 년이나 걸리다니. 나는 버림 받았고, 고독하고, 당신을 너무나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어도 당신은 나의 정신적인 지주다. 공포스럽기는 하지만 표류하지 않기 위해 떠내려가는 뗏목을 억지로 붙잡는 일은 하지 않겠다. (...) 내 마지막 기회라고 할 이 원고 앞에 나는 홀로 섰다”

이 차갑고도 고독한 고백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바르셀로나(발카르카)라는 현재와 500년 전 중세 수도원, 그리고 1690년 대재앙의 과거가 경계를 허물듯 뒤섞이며 시점이 바뀌고 교차한다. 온통 까맣게 타버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숲, 그 황량한 잿더미 속에서 돈이 될 만한 나무 밑동을 기를 쓰고 찾아내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중에서도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뛰어난 눈을 가진 자키암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배경이 아닐 것만 같은 느낌을 주는 자키암과 그의 아버지의 대화가 이어진다.

“아무리 네가 악기용 목재를 찾아내는 데 최고의 실력을 갖추었다지만, 아들아, 이 저주받은 집안의 넷째 아들아, 우리가 절대 팔지 않을 가장 훌륭한 재질의 단풍나무보다 더욱 소중한 것은 너의 목숨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앞에 닥쳐올 고난으로부터 너를 지킬 수 있는 길이야.” (p. 19)

결국 숲을 떠나야만 하는 자키암의 가혹한 운명. 그리고 소설의 서두를 연, 죄의식에 짓눌린 한 노인의 서글픈 참회. 이 두 줄기의 서사가 내 머릿속에 맞물리면서 묘한 불길함과 먹먹함을 풍기더니, 어느새 시선은 잿더미가 된 숲을 빠져나와, 골동품 수집에 광적으로 집착하는 아버지 ‘펠릭스 아르데볼’이 지배하는 바르셀로나의 무거운 저택으로 넘어온다. 그리고 이 숨 막히는 그늘 밑에서, 앞서 등장한 노인의 유년 시절이었을 소년 ‘아드리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위안이 필요한, 펠릭스의 고독한 아들의 모습으로.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으로 키워내기 위해 분주한 사람처럼 보이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묘하게 차갑다.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어린 아드리아가 아버지의 만족을 충족시키기 위해 사는 게 너무나 익숙해 보였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첫머리에서 만난 그 고백이 괜히 더 아프게 읽힌다. 아직 어설픈 짐작으로 베일을 걷어내듯 읽고 있지만, 소설 속 역사적 사건, 인물들의 대화, 그리고 그 안에 감도는 공기들이 뭔가 거대한 한 지점을 향해 차곡차곡 쌓여 가는 듯한 느낌에 기대감이 끌어올려지면서 묘하게 흥분되고, 얼른 다음 장을 넘기고 싶게 만드는 맛이 있다. 다만, 오는 길이 잘 닦인 아스팔트 길 같지만은 않았다는 것.



저번 5월에 구매한 책 리스트(사촌퐁스, 마왕, 딩씨 마을의 꿈, 아메리카의 비극 등)가 ‘인간 욕망 파멸 세트’였다면, 6월은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 같다. 이미 상처를 안고 있거나, 후회하고 있거나, 멈춰 서 있거나, 과거에 붙들려 있는 모습으로. 하긴, 맨날 도파민이나 터지는 탄탄대로 같은 인생사가 세상에 어딨나 싶다. 결국은 덜컹거리는 이야기들 속에서 내 삶의 어느 한 조각을 발견하게 되니, 또 읽고 또 끄덕이고 또 어딘가를 돌아보게 되는 것이 아닐지.

인간이 지상에서 거주하는 것은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것은 그저 단순하고 일상적이며 진부한 삶일 뿐이다.(...) 우리에게 부여된 운명은 실패하는 것이며, 모든 예술과 학문에서, 그리고 가장 본질적으로는 삶이라는 순수한 예술 안에서 실패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실패야말로,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취다. (<횔덜린의 광기>, p. 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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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inbass 2026-06-28 04: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을유출판사 책이군요. 을유 표지는 언제봐도 고급지다는.

곰돌이 2026-06-28 05:40   좋아요 1 | URL
그쵸! 을유는 색감도 고급스럽고 디자인도 깔끔해서 저도 좋아요. 종합적으로 만족도가 높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