짠돌이들이 있다. 김생민처럼 돈을 아껴서 부자가 되자는 게 아니고 돈이 필요없다는 사람들이다. 아니 주변의 에너지를 아끼다 보니 돈은 저절로 들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나는 지금껏 환경 문제같은 거대한 명제에 누가 신경을 쓸까 생각했었다. 인간이란 동물은 상상력은 부족한 데다 이기적이라 당장 자기 실생활에 영향이 없으면 신경을 끄기 마련이다. 중동의 내전에 진정으로 마음 아파하는 한국인이 얼마나 될까. 이제는 6.25가 발발했을 때 이탈리아나 프랑스 사람들의 심정을 알 것 같다. 그냥 무관심이다. 하지만, 몇 번의 미세먼지 대란을 겪고 나니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고맙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에 창문을 열어놓지 못했으니 말이다. 물을 사먹는다는 것, 미세먼지 때문에 외출을 할 수 없다는 것 등 점점 상상속의 디스토피아가 현실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후쿠시마 오염수 어쩌고 하는데 아마 죽기 전에 더한 꼴을 볼까 걱정이다. <노 임팩트 맨> 콜린 베번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여년 전 이 사람이 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정말 신선했다. 아마 그 때까지는 우리가 전기나 기타 문명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고, 그것 없이 산다는 생각은 아예 아웃오브안중이었던 까닭이다. 콜린 베번은 몇 권의 책을 저술한 저술가이고 그의 아내 미셸 콘린은 <비즈니스위크> 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이제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딸 이사벨라, 유기견 보호소에서 입양한 프랭키와 말 그대로 일 년 동안 지구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살아가기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콜린의 통찰은 기후 변화 같은 거대 주제 앞에서 우리가 무기력을 가장한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일상의 조그만 것들을 바꾸기 시작하면 그 영향은 과연 어느 정도 일까? 네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느냐는 질문에 콜린은 정답을 내놓았다.( “올바른 행동을 한다는 것이 곧 성공입니다. 실패는 당신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데 하지 않았을 때, 그때 있는 거예요.”:반다나 시바가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 중) 우리가 영화에서 곧잘 보던 평범한 뉴요커가 갑자기 세련된 뉴요커답지 않은 짓을 시작하니, 주변의 관심이 상당했나 보다. 대안 운송, 로컬 푸드, 티비 없애기,밤에 전등 끄기 등 지금은 그나마 익숙한 행동들이 여기 처음 등장한다. 따지고 보면 <노 임팩트>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딘가에서 그 옛날 아메리칸 인디언이 얼마나 반환경적이었는지 지적한 글을 본 적이 있다. 콜린 베번도 세탁기 사용만은 살짝 여기서 제껴놓았다. 콜린 베번의 퍼포먼스가 현실적이라기 보다 상징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마크 보일의 말마따나 <프리스킬링>을 하려고 이 책을 몇 번 읽었는데 이상하게 기억에 남지 않는다. 10여년 전 뉴욕이 배경이라 우리의 실생활과 차이가 나기 때문인 것 같다.(플라스틱 안 쓰는 인터그랄 요가 같은 상점이 한국에 있나?) 이 책은 완결된 답을 제시하기 보다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렇게 쓰레기를 만들어 내며 소비하고 있을까? 편리함을 통해 우리 삶은 과연 풍요로워졌을까? 우리는 그냥 군비경쟁하듯이 경제성장의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삶을 파괴하고 있는 것 아닐까? 콜린 베번은 환경보호의 차원을  삶의 통찰로 연결시킨다. 뭐 나는 뉴요커가 아니니 모르겠다만, 자기가 아는 돈 잘 버는 여피 친구들은 전부 불행하다나 뭐라나.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실험을 하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따 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든 한다. 지금까지 평범한 뉴욕시민이었던 저자가 느낀 두려움이, 목장 안에 사는 양떼처럼 무사태평하게 사는 나에게 똑같이 느껴졌다. 이 사람의 근황이 궁금해서 검색을 해보니 이제는 자기계발강사 비슷한 것으로 변신한 것 같다. 물론 여기서도 주제는 ‘진보적인’ 내용이긴 하다. 아쉬운 것은 아내 콘린과도 관계가 변한 것 같다. 동명의 다큐에서 티격태격하면서도 같이 난관을 극복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는데,(강신주 박사의 말: “여행할 때 짝이 있으면 좋은데...”) 이제는 헤어진 것 같다. 딸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도배해도 아내 사진은 딱 한 장 뿐이다. 한명의 배우자와 같이 오래 산다는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더불어 책의 부록에 수록되어 있는 국내의 환경단체 사이트를 방문해 보니 썰렁해서 씁쓸하다. 환경은 아직 이 나라의 주제가 아닌가. 환경보호라는 주제는 최종적으로 근본적인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까지 이 나라 사람들은 그런 면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좀 더 하드코어한 쪽이라면 마크 보일의 <돈 한푼 안쓰고 일년 살기>가 있다. 이 사람은 뉴욕에 산 게 아니라 아예 브리스톨 근교 시골농장의 이동주택으로 이사해 살았다. 콜린 베번처럼 로컬 푸드를 돈 주고 산 게 아니라 로컬 푸드를 재배해 먹었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커리어를 쌓는 과정에서 환경파괴를 목도하고 전향을 했다고 한다. 자급자족하는 기술을 <프리스킬링>이라는 것을 통해서 배웠다는데 <노 임팩트 맨>기간 동안 화장지 없이 살았다는 콜린 베번도 뜨악하지만, 이 사람의 돈 없는 1년도 무한도전에 가깝다. 예를 들면, 겨울에 바닷물에 뛰어들어 목욕하기. 겨울에 이불이 얼어붙어도 그냥 버티기, 버섯으로 종이하고 잉크 만들기 등등....글자그대로 완벽한 자급자족이다.(인프라는 무시하기로 한다.)  콜린 베번의 화장지 안 쓰기도 나에게는 넘사벽이지만, 마크 보일은 오늘도 내가 마음껏 쓴 수세식 화장실에 엄청난 적개심을 드러낸다. 그에게는 도시라는 것 자체가 태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현대문명의 근본은 전부 석유로 만들어진 ,언젠가 망할 문명이다. 이건 나도 알지만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다. 입는 것, 자는 것, 먹는 것 까지 석유가 쓰이지 않은 것이 없다. 석유가 없으면 나는, 우리는, 전부 X된다. 마크 보일은 <프리스킬링>이라는 커뮤니티를 구성해 공짜식량 구하는 법, 로켓스토브 만드는 법, 퇴비 화장실 만드는 법 등등의 기술을 익힌다. 나 역시 이 책에서 프리스킬링을 좀 배워볼까 하고 훏어봤지만, 콜린 베번의 경우처럼 남는 건 없었다. 비누풀로 비누 만드는 법이니 개암 채집하는 법이니 해 봐야 10여년 전 영국이 배경이니 현재의 실공간과 맞지 않는 것이다. 예전에는 버튼 하나로 해결했을 일을 마크 보일은 꾸준한 인내심을 가지고 해 낸다. 그런 마크 보일에게 한순간 한순간이 자신의 삶을 위한 시간이 되어 버린다. 워라벨이라는 말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이건 회사원과 자영업자의 차이점같은 거겠지. 좀 과장하자면 자영업자에게는 모든 시간이 “자신을 위한 시간”이다. 하이데마리 슈베르머, 다니엘 수엘로 같은 동류 짠돌이들의 이름도 등장하는데, 아직 국내에 번역된 책은 없다. 콜린 베번이 따 당할까 봐 두려워 한 것처럼 마크 보일도 여친과 헤어진다. 외로움을 달래지 못해 공개 애인구함 광고까지 냈다는데 음, 남의 일 같지 않다. 더 무서운 건 지금도 독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저자의 돈에 대한 철학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대체로 동서양의 현자들이 말하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안 중 하나가 ,공동체와 연대의 윤리다. 돈과 시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른 곳에서 자원을 확보할 수 밖에 없는데, 그게 공동체이고 거기서 필요한 덕목이 회사로 대표되는 기존의 권력구조가 아니라 연대라는 윤리인 것이다. 우치다 타츠루의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고미숙의 <호모 코뮤니타스> 등등. 이러한 공동체에서는 시장의 원리인 교환이 아니라 상대방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무상증여가 바탕이 된다. 마크 보일의 생각도 이런 맥락인데, 저자는 우리가 하는 쇼핑이라는 행위자체에 이미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다고 본다. 소비하는 대상과 그 소비자가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쁘게 포장된 스테이크는 한 때는 살아있는 생물이었다. 그리고, 그런 쇼핑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돈인 것이다. 만약 교환이 목적이 아니라 단지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무언가를 제공한다면 돈이 필요할까? 약간 <시크릿>류의 우주의 법칙이지만 저자는 선의를 베풀면 반드시 그 선의는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가장 확실한 노후대책은 저축이 아니라 공동체의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애기다. 저자의 비젼은 대도시가 아닌 수백명 정도의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 책을 저술할 당시에는 인터넷으로 <프리이코노미>라는 이름 아래 이런 작업을 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게 streetbank 라는 다른 브랜드와 합쳐진 것 같다. 저자의 최근 근황은 지금 아일랜드에서 월든 같은 생활을 하며 자신의 생활을 <The Way Home>이라는 책으로 낸 것이다. 솔직히 저자의 공동체 비전이 성공했는지 저간의 사정이 궁금하다. 사랑보다 돈을 외치는 냉소적인 사람들은 아마 실패를 원할 테지.난 하루키의 소설 1Q84가 먼저 떠올랐지만.

 

앞의 두 짠돌이는 약간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고나 할까. 무엇보다 콜린 베번이나 마크 보일 모두 약간 이벤트성이 있었다. 둘 다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일정기간 동안만 이런 생활을 한 거다.(마크 보일은 이후 3년간 같은 생활을 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런 극한 작업을 하지 못하는 우리로서는 그들이 특별한 위인처럼 보이거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 법도 하다. 그런 면에서 이나가키 에미코가 오히려 친근하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같은 동양인이니 생활방식도 비슷해 짠돌이 기술도 어느 정도 실전투입이 가능할 것 같다. 게다가 거창한 포부나 비전보다 “저는 원래 이럴 생각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이정도 까지 와 버렸어요. 그런데, 정말 좋아요., 당신도 한번 해 보세요. 정말이라니까요”라는 식으로 애기한다. 이나가키 에미코는 후쿠시마 원전사태를 보며 처음 절전을 결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걸 실천하는 동안 예전에는 결핍이라고 느꼈던 순간에서 다른 풍요함을 발견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 “무엇 없이도 충분히 사는, 아니 더 풍요롭게 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 더 많은 자유를 만끽하게 되었다는 애기다. (결국 회사까지 그만두는데 그건 <퇴사하겠습니다>라는 책에 나온다). 노 임팩트도 아니고 노 머니도 아니지만, 지속가능성은 훨씬 뛰어나고 발전 가능성도 있다. 물론 누군가에는 이것도 미친 짓일 것이다. 냉난방 없이, 냉장고 없이 사는 삶이니 말이다. 결국 우리가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을 어느 수준까지 설정하느냐의 문제 같다. 누군가는 결핍의 하한선이 자동차나 멋진 집이겠지만, 이런 짠돌이에게는 그런 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삶의 조건인 것이다. 이나가키 에미코는 겨울의 추위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삶의 조건으로 생각하고 ,결국 추위와 같이 공존하기로 결정한다. 대신 추위가 주는 삶의 묘미를 음미하는 쪽을 택한다. 콜린 베번은 이사벨라가 구토로 시트를 더럽히자 결국 세탁기를 사용한다. 그에게는 그 순간이 결핍이 비참으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과연 어디까지 삶의 한계점을 내릴 수 있을까. 내 생각으론 인간은 자신이 견뎌야 한다고 작정하면 웬만한 건 견딘다는 것이다. 인간은 나치수용소에서도 중동의 내전에서도 어쨌든 살아남는다. 이 짠돌이들이 내세우는 팁은 한계점을 내릴수록 누릴 수 있는 자유는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콜린 베번과 이나가키 에미코가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편리함이 우리가 삶을 음미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다. 일이 바빠 테이크 아웃 음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은, 우리가 왜 일하는가 하는 이유를 아리송하게 한다. 세탁기로 빨래를 돌리는 것에는 빨래라는 일이 기본적으로 재미없고 무가치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정말 우리가 입을 옷을 시간을 들여 손으로 빠는 일이 무가치하고 재미없기만 한 것일까? 어쩌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좋아한다 싫어한다라는 느낌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환경에 따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일과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우리가 어쩔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좋아한다”라고 나중에 합리화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나가키 에미코의 어린 시절은 한창 일본 경제에 버블이 치솟던 시절이었다. 그 때에는 더 큰 집, 더 맛있는 음식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을 수 있었지만, 장기불황의 일본에서 이나가키 에미코는 소박한 음식에서 더 큰 행복을 찾는다.

 

바야흐로 –적어도 나에게는- 삶의 기준점이 변해야 하는 시기 같다. 예전같으면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행복의 기준, 행복의 가치관을 이들 짠돌이들은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삶을 찾으라고, 이제 남들처럼 살지 말라고, 네가 알고 있는 행복의 가치관은 유통기한이 끝났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지점에서 헷갈리는 사람들을 위해 콜린 베번은 발빠르게 자기계발 프로그램을 내놓았다.(자기 말로는 상호 계발이라고 한다.) 사이트를 흘긋 봤는데 음, 꽤 비싼 걸, 하긴 노 임팩트 맨도 계속 살아가긴 해야 하니까.

 

ps 조금 결이 다르기는 하지만, 젊은이들이 공감할 수 있는 사례로는 <봉고차 월든> (켄 일구나스, 문학동네)이 있다. 학자금대출에 허덕이며 정규직에 목매던 Y세대가 고통의 시대에서도 어떻게든 자신만의 삶을 꾸려나간 사례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의 저자에게도 “구리다”고 할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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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핵가족 붕괴에 대한 유쾌한 묵시록"  처음엔 영화 "기생충"에 관심이 없었는데 남산강학원 홈피에서 이 문구를 보고 별안간 호기심이 들어 관람했다. 포스터의 느낌은 엄청 그로테스크하고 엽기적이었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한국적 유머"라는 느낌이 들었다. "플란다스의 개"의 잔혹업그레이드 성인버전이랄까.  봉준호의 관심은 처음부터 계급이 아니었을까 싶다. 플란다스의 개 개봉시 인터뷰에서 봉준호가 계급에 따라 개를 대하는 태도가 틀리다라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마 키노일 듯). 개의 항문에 쇠꼬치를 들이대는 장면에서 경악하는 사람은 샤방하게 차려입고 영화관 온 언니더라는 애기다. 플란다스의 개에서도 일방적인 악인은 없다. 집안에 기생하는 타인이라는 컨셉트는 에릭 파이의 "나가사키"라는 소설에서 먼저 나왔다. 마음에 남은 것은 송강호와 가족이 탁상 밑에 숨어 있을 때 이선균이 부인과 소파에서 관계하는 장면이었다. 감독은 왜 그 장면을 넣을 걸까. 부부관계는 사적인 장면이기 때문에 누군가가 그걸 엿듣는다 라는 설정자체가 자극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래도 봉준호 감독인데 단순히 관객을 자극하기 위해 쌈마이 같은 짓을 하진 않았을 테고, 내 나름 해석을 해 보자면, 아마 이 장면부터 송강호의 빡이 돌지 않았을까 싶다. 송강호와 윤여정이 처음 만나는 장면에서 약간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는데 송강호는 아마 윤여정을 성적 상대로 느끼지 않았을까. 그런 감정이 흐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이선균과 부인의 응응 장면을 함께 했으니 분명 자신이 수컷경쟁에서 진 듯한 패배감이 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부부의 성관계장면은 자녀에게 들켜선 안 되는 금기장면이다. 이선균부부는 이 금기를 충실히 지키며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 하지만, 가족과 탁상 밑에 숨어있는 송강호는 이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 즉 그는 한 마리의 수컷으로서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도 패배한 것이다. 이선균이 퇴근하자 개들이 전부 그의 꽁무니를 쫓는 장면에서 드러나듯 그는 여느 중산층 가부장의 돈벌어다 주는 기계이미지가 아니라 집안을 장악하고 있는 확실한 가장이다. 이러한 이중의 패배감이 마지막 파국을 불러온 것 아닐까. 어쩌면 이 영화는 실패한 가부장에 관한 영화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든다. 송강호와 지하 거주자 모두 처음에는 알파 메일인 이선균과 일종의 브라더후드를 만들어 내려고 한다. 송강호는 첫 대면에서 “중년남성의 고독”운운 하고 지하거주자도 박사장님 감사합니다 하고 자기만의 세레모니를 한다. 하지만, 이선균이 송강호의 냄새를 말할 때 이선균은 송강호를 브라더후드로 받아들일 의사가 없음을 밝힌다. 마지막 아수라장에서 자기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송강호는 차키를 달라는 이선균에 말에 차키를 꺼낸다. 차키를 넘기는 것이 자기 딸의 죽음을 의미하는데도 말이다. 하지만, 이선균이 코를 싸매는 순간 다시 송강호는 이선균과의  브라더후드에 참여할 수 없음이 드러나고 그걸 확인한 송강호는 폭발한다.실패한 가부장은 진짜 가부장을 살해한다. 그리고, 송강호의 뒤를 이어 실패한 가부장이 될 그의 아들은 돈을 벌어서 아버지를 구출하겠다고 다짐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영화를 본 모든 관객이 알고 있다. 만약 이 영화가 불편하다면 마지막에 살해당한 이선균이 자본주의 한국사회에서 그렇게 잘못한 게 없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이선균이 차라리 송강호에게 "야 이 색히야 좀 씻고 다녀"라고 소리라도 질렀으면 송강호의 행동이 더 납득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말없이 코를 감싸쥐었을 뿐이고 냄새난다는 말도 송강호가 없는 줄 알고 한 말이었다. 누가 송강호가 자기 집 탁상 밑에 숨어있다고 상상했겠는가. 진정성없는 태도가 더 문제라고 할 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보자.  자신의 상관이 진정성있게 같이 회식하자고 할때 기뻐하며 동의하는 직장인이 얼마나 될까. 이선균처럼 선을 확실히 정하고 룰을 지키면 약속된 대우는 보장하는 상관을 지금 신세대들은 선호하지 않나? 버스를 탄 냄새나는 노숙자를 피한 경험은 나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아직 나는 차가 없지만, 아마 자차 소유자들 중 이선균같은 부자가 아니더라도 지하철 타본지 오래된 사람,꽤 될 걸? 돈 많아서 구김살 없이 사는 게 부러워할 일이지 폄하할 일은 아니다. 결국 감독의 시선은 송강호에게 가 있는데 우리의 경험은 오히려 이선균 쪽에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뉴스룸장면에서도, 만약 뉴스룸에서 저 기사를 봤다면 송강호를 또라이사이코 정도로 여기며 무서운 세상 정도의 감상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송강호의 시선을 쭉 따라온 관객은 평소에 자신이 하는 반응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일종의 인지부조화에 빠지는 것이다. 근데 남산강학원 홈피처럼 이제 핵가족 붕괴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강사가 핵가족제도를 계속 공격했던 고미숙씬데 여기서 갈등의 단위가 가족인건 맞다. 이선균 가족, 송강호가족, 가정부 부부. 가족이 여기서 부각되는 장면은 가정부부부가 송강호가족을 벌세우며 아빠,엄마, 아들, 딸 이런식으로 호명하는 장면인데 음, 어떤 사회경제적 함의가 있는 걸까. 이 장면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는 건 가정부 부부인데 그 이유는 상대 역시 가족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엄마, 딸, 아들이라는 이유로 이들의 역할과 의미는 이미 만만한 상대로 고정되어 있다. 남산강학원 홈피 문구와 달리 영화가 그리 유쾌하진 않다. 극장에서 영화본게 정말 오랜만인데,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마지막 영화로 삼고 싶진 않다. 봉준호 입장에선 그냥 한번 만들어 본건데 알아서 칸에서 상 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이 영화와 핵가족 붕괴가 어떤 관계인지 아시는 분께는 한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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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인간학 - 약함, 비열함, 선량함과 싸우는 까칠한 철학자
나카지마 요시미치 지음, 이지수 옮김, 이진우 감수 / 다산북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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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철학에 대한 내용을 깊이있게 전개하지는 않는다. 현대사회의 대중을 비판하는데 니체라는 도구를 사용한 것 뿐이다. 니체는 칸트를 늙은 너구리 정도로 폄하했는데 반면 칸트주의자인 저자는 니체를 소심한 찌질이 정도로 묘사한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강신주 박사의 말이다. 강신주 박사는 "네가 강의하는 대로 살고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고 한다. 여기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이고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말할 수 있다"는 애기다. 책에서는 사자처럼 울부짖는 니체가 실생활에서는 엄청나게 소심하고 예민했다는 것은 이미 다른 학자들도 누누이 말하고 있는 바 초인이 되어야 한다는 니체의 애기가 더 절절한 이유는 그가 초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마도 악플러같은 키보드워리어를 보면서 저자는 니체가 말하는 "선량한 약자"를 떠올렸나 보다. 선량한 약자들은 자신이 약하기 때문에 선량하다고 믿고, 때문에 자기비판정신이 결여되어 있다. 그는 그만큼 태만하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자신만의 신념이나 미학이 없다. 자신의 신념이나 미학을 지키기엔 타인과의 갈등을 견딜 만큼 강하지 않기 않기 때문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보다 신체의 보전이고 그것을 위해선 자신의 성실성은 언제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지메 당하는 동료를 모른 척하다 그 동료가 죽으면 울음을 터뜨리는 약자를 생각하면 된다. 읽다 보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모습이 언뜻언뜻 겹친다. 현대사회의 대중이라면 누구든지 이 책에서 비판하는 "선량한 약자"의 속성을 조금씩 가지고 있을 것이다. 논지 자체가 엄청나게 주도면밀하게 펼쳐지지거나 니체의 철학을 전개하지는 않지만 읽고 나면 시원한 사이다 한 잔 마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니체의 사상이 원래 기존의 권위를 비아냥대는 가벼움이 있는데다 책장도 쉽게 넘어가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물론 드문드문 저자의 통찰도 있으니 그런 것도 챙겨두면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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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수업 - 나를 넘어 나를 만나다
박찬국 지음 / 21세기북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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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워낙 책들을 안 읽어서 해당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소싯적에 한 번쯤 빠지는 작가로 소설가는 이상이나 하루키, 철학자는 니체가 있는 것 같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은 둘째 치고, 책표지는 얼마나 익숙한가! 게다가 니체처럼 설왕설래하는 철학자도 드물터, 누군가에게는 삶을 찬양하는 생명의 철학자로 누군가에는 매독걸려 끝내 발광한 미치광이의 헛소리다. 아마도 니체강의의 최고라고 알고 있는 고병권씨는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 문학적인 강의를 한 것 같고, 아마 정통파 연구자라고 하면 가장 다빈도로 등장하는 저자가 박찬국씨같다. 쉬운 문장으로 쓰여진 책인데 결코 쉽게 넘어갈 수가 없다. 하나하나의 문장에 저자가 오랫동안 고민한 니체의 모습이 압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쉽게 설명하는 사람이 진정한 대가라고 “니체의 철학은 승화의 철학이다” “세계는 힘들이 자신을 고양하기 위해 투쟁하는 장소다”  등 자신이 얻어낸 니체철학의 정수가 담겨져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니체의 고갱이는 “힘에의 의지”다. 인간의 행복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결핍이 채워지며 생기는 행복인데 이는 필연적으로 권태를 불러온다. 니체가 고무하는 행복은 자신이 강화되고 고양되는 힘에의 의지가 증가할 때 느끼는 행복이다. 그런데, 이 힘에의 의지는 자신의 극복을 전제로 한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고통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어떠한 불운이나 폭력, 불행과 고통까지 자신의 강장제로 삼아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자- 박찬국씨가 그리는 니체의 초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한계가 있는바 필연적으로 니체는 자살을 긍정할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하지만 쉬운 문장으로 쓰여졌지만 곱씹어 읽어야 한다. 그럴때에만 이 책의 내용이 와 닿을 것 같다.    


    p.s. 단일한 세계관으로 세상을 설명한다는 것이 이제는 위화감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그렇게 매끄럽게 설명될 리가 없지 않은가. “힘에의 의지” 역시 추상적인 하나의 개념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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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하겠습니다
이나가키 에미코 지음, 김미형 옮김 / 엘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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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다시 차가워지고 있다. 이제 물에서 나와 뭍으로 가야 할 때인지 다시 마음이 혼란스럽다. 새삼스레 아프로헤어 아즘마 생각이 난다. 아프로헤어 아즘마가 남들이 목매는 아사히신문사를 왜 그만 뒀느냐고? 저자에겐 이게 가장 큰 노후대비였기 때문이다. 저자는 회사의 본질을 두 개로 정의한다. “돈”과 “인사”.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을 시장에서 돈으로 사서 메운다. 지금 우리사회에서 돈이 없다는 것은 숨쉴 공기가 부족한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인사. 사람들이 직장을 떠나길 두려워하는 것은-고미숙씨의 말을 빌리면- 삶의 현장을 확보하고 싶기 때문이다. 요새 1인가구가 회사를 안 다니면 생사확인이 안 될 가능성도 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회사를 통해 해결한다. 그리고,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월급은 언제나 적고 승진은 항상 아는 놈이 먼저 한다. 저자는 그나마 남들이 부러워하는 안정된 정규직 생활에 나름 풍족한 소비생활을 하다 마흔에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이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언젠가는 회사에서 나갈 테고 그땐 어떡하지?  저자가 택한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먼저 돈. 자신의 욕망을 줄이고 돈에 대한 의존성을 줄이는 것 . 궁색이 아니다. 욕망은 제어될 수 없다. 하나의 욕망이 다른 욕망을 제압할 수 는 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소비의 쾌감을 제압하는 다른 쾌감은 자신이 무엇인가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독립심이다. 또한 지금껏 무심히 혹은 귀찮게 여기며 지나쳤던 사소한 순간들을 음미하는 쾌감이다. 물론 심하기는 하다. 냉장고, 선풍기 없이 사는 게 지금 가능한가. 히라카와 가쓰미는 지금껏 인류가 자신의 한계를 확장하며 자유를 확보해왔다고 한다. 우리는 1시간만에 제주도에 갈 수 있고, 지금 여기서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통화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제 오히려 “할 수 없는 것”에서 자유를 찾는다. 겨울에 난방이 되질 않아서 화로를 껴안고 있는 자신에게서 재미를 느끼고 밤에 전깃불을 켜지 않는 대신 벌레소리를 들으면 풍류를 느낀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에서 무엇의 가치는 그것을 얻기위해 투입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저자에게는 이제 이틀에 한번 가는 목욕탕도 큰 오락거리이다.    
 다음으로 인사. 회사사회는 결국 인간을 수단으로 대하는 사회라고 저자는 말한다. 때문에 저자에게 필요한 것은 “연대”의 윤리다. 저자에게 일은 타인과 관계를 맺는 수단이다. "백수론"을 강조하는 고미숙씨는 "내발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마 어떻게 읽으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애기 같기도 하다. 나는 이 말을 돈이 되지 않아도 자기 내부의 이니셔티브를 따라라 정도로 이해하고 있다. 반면 <바보의 벽>의 요로 다케시는 일이란 세상의 구멍을 메우는 것이라고 한다. 만약 좋아하는 일만 하라면 자기는 해부학은 때려치고 곤충수집만 하겠다는 거다. 이런 태도에는 고미숙씨의 "내발성"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라는 요소가 있다. 저자는 일이란 "타인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삶의 정의가 각자 다르겠지만 결국 기본적으로 가정 현실적으로 봤을 때 삶이란 의식주를 해결하면서 타인과 어떻게 관계맺느냐인 것 같다. 그리고, 권력구조로 점철된 회사를 나온 저자에게 타인은 자신의 목적을 만족시킬 수단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하나의 개체이다.   
 더불어 저자는 자신의 순간을 소중히 했다. 이냥저냥 회사에서 시간을 보내며 월급루팡을 하는 것 보다 좀 더 밀도 있는 삶의 순간을 보내길 원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자부심과 당당함을 가지기도 쉽지 않은 것 아닐까. 저자의 충고는 이거다. “언제든 회사를 그만둘 수 있는 체력을 길러라.”
  50대의 여성이 이렇게 활기발랄 귀염모드 일 줄이야. 거기다 아프로 헤어까지! 어쨌든 응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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