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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누고? ㅣ 문학세계 현대시인선(시선집) 220
안윤하 지음 / 문학세계사 / 2023년 8월
평점 :
안윤하 시집 / 『니, 누고?』 / 문학세계사 / 2023
문학세계사에서 출간된 안윤하 시인의 신간 시집 『니, 누고?』를 받아 들고 보니 제목이 참 정겹다. 마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이 약간은 투박하면서도 호기심 한껏 드러낸 그런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니, 누고?』라는 제목 때문인지 각 편마다 등장하는 화자를 찾아보는 재미가 이 시집에는 있다. 연작시와 소제목을 단 시가 많아 그 눈여겨 읽어보게 된다.
안윤하 시인은 1998년 《시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집 『로마에서 게걸음 걷다』 냈으며, 대구예술상을 수상했다. 대구시인협회 사무국장, 대구문인협회 부회장을 지냈으며 현재 대구예총 《대구예술》 편집위원, 대구문학디지털화추진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붉디, 붉다가 목이 쉬어가는 단풍잎이/ 가지를 붙잡았던 손가락을 하나씩 편다// 결단의 순간, 손가락을 외면한다// 마지막 비명은 짧을수록 좋다//
-「집으로 가는 길 1」 전문 (27쪽)
갈수록 낮이 짧아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 자꾸 뒤돌아본다// 어스름 내려앉은 벽화 속/ 졸고 있는 파리처럼/ 정지된 시간들// 오고 감이 다 씁쓸하다//
-「집으로 가는 길 2」 전문 (28쪽)
가지에/ 새끼손가락으로 매달려/ 훅, 날려갈/ 찬 바람이 맵다// 이제, 메마른 초침을 놓아주고/ 봄 여름 가을/ 계주의 마지막 주자처럼/ 겨울로 달려간다// 골목을 돌아/ 깜깜한 집으로 돌아간다// 쓰리다, 명치 끝이// 겨울 망막에/ 첫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집으로 가는 길 3」 전문 (29쪽)
세 편의 연작시 「집으로 가는 길」에서 이미지가 선명한 붉디붉은 단풍잎에서 하나의 생이 희미해져 가는 모습이 1에서 3까지가 마치 그러데이션 기법처럼 표현되어 있다. 단풍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고 바래져 가는 삶, 인간의 한 생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돌아보게 한다. 돌고 도는 게 자연의 법칙이라지만 뒷모습은 언제나 쓸쓸하다. 그러나 그 뒷모습도 아름답게 만드는 게 사람이고 또 시가 아니겠는가.
술을 마시면 슬프기도 전에/ 왜 눈물이 날까/ 알코올에 최루탄을 버무려 놓은 걸까. 끓는 송진에 지핀 불, 그을음의 꼬리가 길다/ 힘 빠진 손발 위로 뚝 떨어지는 눈물을. 손끝으로 찍어 혀로 맛을 보면 열기의 맛이다/ 가장 먼저 북받쳐 오르는 건 입술/ 꽉 다물고자 해도 자꾸 열려서/ 입으로 들어온 뜨거운 숨은 횡격막을 달군다. 그러니까 술은 어금니를 꽉! 깨문 꽃이다/ 소리 내지 않아도 증폭되는 물의 보폭이다/ 낮은 곳을 향해 흘러가다가 고함치는 반전의 환각/ 나르시스의 폭포에 내어놓은 얼굴이 부끄러워/ 두 손으로 두 눈 감싸 쥐게도 한다/ 날숨 뱉어낸 탁자 바닥에 이마를 대고/ 등줄기 들썩이다가/ 미소 띤 가면까지 젖는다//
-「몸에 가둔 말, 술은」 전문 (56쪽)
사람을 제대로 알려면 술을 먹여 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때로는 술이 자신 안에 억압된 자아를 해방시켜 놓기 때문이다. 늘 쓰고 있던 가면까지 벗어던지게도 한다. 술을 마시면 다양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반전의 환각’이 그런 것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누가/ 깜깜한 밤하늘에/ 바늘로 구멍을 뚫었나// 꼼짝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의 굴레 속에서/ 은행 카드는 천장을 뚫고 나갈 숨통이었다// 숨통이 트여/ 빛이 새어들고/ 일어설 용기가 일어서고/ 살아갈 지표가 반짝거려/ 터널 끝은 빛의 통로가 되리// 막다른 골목 끝에서/ 어둠 속에 묻혀본 사람들아/ 밤하늘에 바늘구멍을 뚫어 보라// 답답한 가슴에/ 숭숭 구멍을 내어/ 타래실처럼 풀려나오는 별빛을 잡고/ 당겨 올려라/ 두레박 속의 당신을//
-「별_여자의 삶은 소설책 열두 권이다 16」 전문 (100쪽)
소제목이 재미있다.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책으로 엮는다면 소설책 몇 권은 된다는 말을 한다. 삶이 너무 단조로워도 재미가 없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도 멀미 난다. 제목만 봐서는 희망적이고 반짝이는 삶을 떠올리게 하는데 「별」에서는 환한 데서 웃고 떠드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용카드나 사채에 자신의 생이 저당잡혀 빠져나오려고 몸부림치는 또 다른 삶을 읽을 수 있다. 빛을 따라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언젠가는 밝은 곳으로 나오는 날이 있을 거라고 하고 싶다. 결국 자신을 구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추석이 코앞이다. 고향 가면 누구나 한 번씩은 들을 “니, 누고?” 시인이 미리 건네는 추석 안부 인사 같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출간했을 『니, 누고?』, 다양한 생이 읽히는데 긴 추석 연휴에 찬찬히 읽어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