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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있어 ㅣ 초록달팽이 동시집 5
이정인 지음, 채승연 그림 / 초록달팽이 / 2023년 11월
평점 :
『한 아이가 있어』/ 이정인 동시집/ 초록달팽이/ 2023
누군가의 글을 읽으면 그 사람이 보이기도 한다. 평소 알던 사람이라면 더 그렇다. 평소 사용하던 말투, 생각, 생활방식이 그대로 글에 스며들기 때문에 이름을 가리고 봐도 누구 글인지 골라내 웃게 되는 일도 있다. 초록달팽이에서 이정인 시인의 신간 동시집 『한 아이가 있어』가 출간되었다. 동시집을 펼쳐 읽다가 순간 미소가 번진다. ‘누가 뭐래도 이정인 시인 동시집이잖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이정인 시인을 잠시 소개하자면 2010년 동시 「긴 말 짧은 말」 외 11편으로 푸른문학상을 받고 동시를 쓰기 시작해 동시집 『남자들의 약속』, 『아이스크림 눈사람』, 『살구나무 편의집』(공저)이 있다. 동시 「남자들의 약속」은 초등 6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렸고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과 2023년에는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받았다.
본문에 나온 몇 편을 옮겨본다.
길모퉁이에/ 엉엉 울고 서 있는/ 엉겅퀴가 있어//참새가 위로했지// 내가 날아가서/ 나비를 불러올게// 내가 알아가서/ 너를 다정히 바라보아 줄/ 아이를 데려올게// 그러니까 울음 짹, 그쳐// 지금 한 아이가/ 참새가 종종대다 간 자리/ 멋쟁이나비가 고요히 앉아있는/ 보랏빛 엉겅퀴를 바라보고 있어// - 「한 아이가 있어」 전문 (12~13쪽)
바라봐 준다는 것, 곁에 있어 준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때가 있다. 엉겅퀴가 참새와 나비 덕분에 씩씩하게 살아갈 힘을 얻은 것 같아 읽은 이의 마음도 따스해진다. 한 아이는 이정인 시인 자신이 아닐까. 첫 페이지에서 표제작으로 실린 「한 아이가 있어」를 읽을 때, 나타난 이정인 시인이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까지 한 아이의 모습으로 가만히 보고 있는 느낌이다.
동그랗고/ 말랑말랑한/ 귤새가 날아온다// 교실 위로/ 머리머리머리머리머리 위로/ 투명 날개를 펼치고 날아온다// 누군가 낚아채 가지 않을까/ 마음이 조마조마/ 하지만 착,/ 내 손에 앉았다// 앞자리 서빈이가 보낸/ 향기로운 귤새/ 잘 키워야지// - 「귤새」 전문 (17쪽)
제주도에서 배 타고 온 귤새가 겨우내 우리 집 부엌 한 귀퉁이에서 부화는 꿈도 꿔보지 못한 채로 박스째로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의 “머리머리머리머리머리 위로” 날려 보냈으면 체중계에는 덜 올라가도 됐을 텐데.
여기저기 굴러다니던/ 돌을 주워와/ 꽃밭 앞에 놓았다// 꽃밭에 물을 주면서/ 돌에 묻은 흙과 검불을/ 깨끗이 씻어주었다// 돌에도 얼굴이 있었다// 얼굴이 하얗게 빛이 난다/ 이마가 햇살에 눈부시다// - 「돌 얼굴」 전문 (77쪽)
어쩌다 밖에서 뭔가 주워올 때가 있다. 그때 집에 가져와 빡빡 문질러 씻는데 그러면 제법 멀건 모양을 드러내는 걸 보면서 만족해하곤 한다. 빛이 나는 돌 얼굴을 상상하니 꽃밭과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이 든다.
콩을 심으니/ 배가 불러서 좋고// 꽃을 심으니/ 마음이 불러서 좋다는// 논 주인 할아버지가/ 올해는 논둑에/ 꽃모종을 냈다// 이슬비가 와서 거들었다// 그다음은/ 꽃이 알아서 했다// 꽃이 꽃을 피우고/ 꽃으로 논둑을 덮고//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을/ 꽃으로 바꾸었다// 꽃이 꽃에게 속삭인다// 예뻐// - 「꽃이 한 일」 전문 (84~85쪽)
“그다음은/ 꽃이 알아서 했다”라는 구절에 유난히 마음이 오래 머문다. 어느 정도 키우면 스스로 하는 아이들처럼 그 꽃이 주변 환경과 분위기를 바꾼다. 저 논둑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다 마음이 꽃 같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눈에도 들었겠지.
그동안 펴낸 동시집에도 이정인 시인의 매력이 많았지만, 이번 시집은 상상의 세계가 끝없이 펼쳐진다. 요즘처럼 찬 바람 불고 추운 날 이정인 시인의 신간 시집 『한 아이가 있어』에 퐁당 빠져 보는 것도 좋겠다. 가보지 못한 상상의 나라도 데려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