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구도에서 동네를 담으면 마치 한국의 어촌이 아니라 꼭 일본의 영화 속에 등장하는 풍경처럼 보인다. 나는 아파트에 살지만 밑으로 조금만 영차영차 달려오면 바닷가가 나온다. 매일매일 바닷가에서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건 매일 변하는 바다의 흐름을 볼 수 있어서 어쩌다가 보는 바다보다는 훨씬 ‘재미’ 있다.


저기로 가면 바닷가인데 해안이 타원형으로 대략 500미터 정도의 작은 백사장이 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우리나라에 해안을 따라 있는 수많은 해수욕장이 있지만, 뭐랄까 국가의 등록? 아니면 인정? 받은 해수욕장이 따로 있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등록이 되어 있는 해수욕장은 시즌에 돌입하면 국가에서 고운 백사장을 깔아주고 정비를 해주는 것으로 안다. 해운대도 시즌에 돌입하기 전에 엄청난 규모의 모래가 백사장에 깔린다.

여기도 6월부터는 아주 분주하다. 아, 오늘부터 좀 덥군, 하며 땀이 흐르는 어느 날 포클레인이 여러 대 등장하여 논을 갈듯 해안을 갈아엎고 모래를 깔고 다지고, 소나무와 야자수를 정돈하고 해안을 깨끗하게 정리를 하기 시작한다. 여러 개의 공영주차장 중에 한 곳의 공영주차장이나 텐트를 펼치는 곳은 무료다.

그리고 해안을 따라 가다 중간 쯤 해안에서 그 앞의 퍼브와 카페까지 10미터도 안 된다. 그래서 여름이면 해안에서 덱체어를 깔고 맥주를 마시다가 수영복을 입은 채로 카페로 들락날락한다. 바닷가이니 당연하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수영복을 입은 채로 편의점에 들어가고 앉아서 라면을 먹고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는 것이 여름의 해변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구에서는 10년 전부터 해안의 주택과 해안 거리를 정비에 들어갔다. 제주도처럼 거대한 야자수를 계획하며 야심 차게 스무 종의 야자수와 소철을 심었지만 10년 동안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 뿌리를 박고 제주도만큼 무럭무럭 자라지 못한 것이다. 해안에 가득하던 소나무를 뽑고 야자수를 심었다가 자라지 못하는 여러 종의 야자수를 빼고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 그러기를 몇 년이 흘렀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영화 속 외국의 해변은 보기 좋긴 하다. 시원한 차림의 사람들과 바다가 보이는 퍼브에 앉아서 피나콜라다 같은 걸 마시며 석양을 보고 지는 해가 야자수에 가려져 있는 모습들. 하지만 꼭 그런 모습을 따라 해야만 할까. 소나무를 흔히 볼 수 있어서 별로라고 생각하겠지만 소나무도 종류가 많고 소나무도 소나무 나름의 멋을 가지고 있어서 여기 해안가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소나무를 전부 흰머리 뽑듯 뽑아서 거기에 야자수를 심어 10년이 지나는 동안 야자수는 야자수대로 상처를 받았다.


거대 제조회사 때문에 외국인과 그들의 가족이 살고 있어서 여름이면 외국인들이 아주 많이 해변에 나온다. 그들은 대체로 5월 말부터 훌렁훌렁 벗고 해안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그들은 몸매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따지지 않는다. 늘어진 뱃살은 늘어진 대로 드러내고 아이구 오늘 햇살이 참 좋구만. 하며 누워서 책을 읽거나 맥주를 마신다.


저녁이면 퍼브에 모여들어 사부작사부작 이야기를 하며 맥주를 홀짝인다. 모두가 이때만큼은 즐겁고 행복하다. 이상하지만 영국인들이 많이 오는데 그런 날에는 우리도 술이 되어서 오아시스를 크게 튼다. 그리고 테이블에서 ‘스탠 바이 미’를 크게 부르면 도미노가 되어 모두가 스탠 바이 미를 부른다.


야, 너 이 노래 어떻게 알아?

야, 아마 내가 너 보다 너의 나라 노래에 대해서 더 많이 알걸.

하며 우리와 영국 사람들이 또 한데 뭉쳐서 비틀스 이후 블러, 스웨이드, 버브 따위를 주절주절 이야기한다. 불과 몇 년 전인데 매일 축제 같은 일들이 여름에는 펼쳐졌다. 지금은 제조업이 기울면서 그 많던 외국 기술자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갔고 코로나가 덮치면서 이런 분위기는 전부 소멸했다.

바닷가를 도는데 선거철이라 그런지 여기저기서 대통령 후보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상반된 사람들이 이쪽저쪽에서, 그래 어디 두고 보자 식으로 대치를 한다. 이전에도 선거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세대별로, 나이대로, 성별로 양극으로 갈라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각자 진영에서 자주 듣는 말이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이다. 요즘에 이 말처럼 듣기가 별로인 말이 있을까 싶다. 정의는 이기는 게 맞다. 그러려면 정의는 이긴다고 말하는 쪽? 단체? 조직이 정의로워야 한다. 이렇게 말을 하는 단체는 그 반대에 있는 단체는 정의롭지 않다고 정의해버린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것들이 타인에게는 잘못된 것일 수 있고, 내가 좋다는 하는 것을 타인은 싫어할 수 있고, 내가 하는 말로 인해 타인이 피해를 볼 수 있는데 근래에 ‘정의는 이긴다’고 말하는 쪽은 전혀 그런 분위기는 없다. 나와 다르면 안 좋은 것,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가 정의니까 우리가 이긴다, 라는 식이다. 모두가 말 끝에는 정의가 이긴다는 말로 마무를 해버린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이 말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말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와 같다.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말은 사실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우리’라고 하는 교집합 속의 개개인은 자꾸 바뀌며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이 밀려 나갔기에 새로 들어온 책임자는 당연하게도 그 책임을 이전 책임자에게 떠 맡기고, 떠난 책임자는 지금 책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결국 책임을 지는 사람의 합당한 사과나 처우를 받지 못한 채 그대로 흘러가 버린다.


정의는 이긴다는 말이 요즘처럼 모호하고 불분명하게 들리는 것이 착각이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얼버무리는 말로 끝을 맺으면 그들을 응원하는 사람들, 구독자들, 팬들이 그 말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집결한다. 모호한 끝맺음은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 정의는 이긴다고 하는 말에, 그 정의가 우리가 알고 있는 정의인지는 의문이 든다.


사실 내가 바라는 대통령, 정당이 집권당이 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왜냐하면 집권 5년 동안 꽃밭에 호황기를 누릴 수는 없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다. 어느 나라던, 어느 정당이든, 누가 대통령이 되었던 늘 그랬다. 내가 바라지 않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야당이 되어야 집권을 잘 못 했을 때 욕이라도 실컷 할 수 있는 빌미가 된다. 자신이 원하는 정당이 집권당이 되었는데 제대로 못했을 때 반대쪽만큼 욕을 시원하게 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무너지면 같이 무너지게 된다. 정치는 마약과 같아서 내가 믿는 정치인과 정당이 잘못되어서 무너지면 다른 정치인을 응원하면 되는데 대부분 그 정치인을 따라 같이 무너진다. 사람들은 내가 바라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여당이 되었을 때 축배를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렇기에 내가 바라는, 편드는 당이 집권당이 되어서 정책의 구멍이 나서 내가 불이익을 당해도 쉽게 욕을 하지 못한다.


그럴 바에는 내가 바라지 않는 쪽이 대통령이 되고 집권당이 되었을 때 나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실컷 욕이라도 하고, 요즘은 그것으로 구독자가 모여들어 수익도 올릴 수 있다. 일반인들 대신에 욕을 실컷 해주니까 구독자들이 우르르 몰리게 된다. 반사이익 같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어쩌면 같은 교집합 속에서도 정권이 바뀌지 않는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계속 욕을 하고 수익의 달콤한 맛을 계속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집합 속의 사람들이 서로 물어뜯고 이렇게나 깔아뭉개고 있는 현실이 요즘이다. 질 좋은 대결구도를 보는 건 어쩐지 먼 세계의 일처럼 느껴진다.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 라는 말은 참 허울 좋은 말이다. 정의는 이긴다고 말할 때 그 정의가 정말 정의인지 사람들에게 확인을 시킨 다음에 그런 말을 해줬으면 좋겠다. 그것이 안 된다면 사람 이름을 ‘정의’라고 지어라. 그리고 격투기나 권투 같은 운동을 열심히 해서 링 위해서 맞붙어 이겨라. 그러면 정의는 이긴다가 된다.

바닷가를 돌고 나서 영차영차 열심히 달리면 현대 백화점이 나오는데 그 주위가 전부 호숫가다. 아마 우리나라 백화점 중에 월요일에 쉬고 노조가 있는 백화점은 여기 현대 백화점만 그런 걸로 알고 있다. 소문에는 백화점을 증축(인지 신축인지 모르겠다. 원래 오래전부터 있던 현대백화점 자리에 허물고 새로운 현대 백화점을 지었다)할 때 다른 지역의 거대한 백화점처럼 짓지 말고 그 주위의 조경에 신경을 쓰자,라고 해서 6층? 7층 정도로 짓고 그 일대가 이렇게 호수다. 그래서 볕이 좋은 날에는 여기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기가 너무 좋다. 근처에서 칼스버그를 사 와서 홀짝이며 소설을 읽는 그 맛이 있다. 하지만 역시 코로나 이후에는 모든 것이 멈췄다.  


밑으로는 예전의 바닷가 사진들

최애 맥주 칼스버그


여름의 바닷가 퍼브는 늘 이렇게 북적였다


문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금요일 저녁에는 늘 파티다


여름에는 모히또를 마셔줘야지


퍼브에서 책 읽는 사람이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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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자영의 이 한 마디가 자영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리고 자영은 우리 모두의 마음이 투영된, 이 세상에 없을 법한 있는 인물이다.


이 영화는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이다. 이는 2시간 30분이나 되었던 영화 ‘미드나잇 버스’를 볼 때와 비슷하다. 결은 다르지만 느낌은 비슷하다. 미드나잇 버스는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재미라고는 세상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재미가 없는데, 그런데 너무 재미있게 봐버렸다. 그저 보다 보니 인간관계에 대해서 깊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좋다. 영화는 마치 나에게 자신의 어깨를 내밀어주며 그래, 기대고 싶으면 기대도 좋아. 괜찮으니까.라고 해주었다. 너무 하릴없이 흐르는데 그 사이사이에 ‘인간’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그리고 그 인간 속에는 ‘나’라고 존재가 있다.


이 ‘연애 빠진 로맨스’가 그렇다. 남녀 연애 이야기인데 반짝반짝 빛나는 햇살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직면에 청춘 남녀의 이야기가 너무 적나라하다. 처한 상황이며, 내뱉는 언어며, 사상, 생각이며 모든 것이 너무 현실적이다. 그래서 너무 비현실적인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 ‘한번자영’과 ‘빠구리’가 나누는 대화를 나의 주위는 하지 않는다. 편협한 나의 입장에서 이런 대화는 영화적 허용으로 가능하다고 생각이 들뿐이다. 영화의 대사는 ‘멜로가 체질’의 영화 버전이라는 생각이다. 속에 있는 말을 가까운 사람에게 하지만 이렇듯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언어로 구사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박우리(빠구리)가 함자영(한번자영)과의 경험을 바탕으로 칼럼을 쓰지만 영화를 보면 그 반대적 개념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소설을 써놓고 그 소설을 바탕으로 세상에 튀어나온 캐릭터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그렇다.


로맨스 영화가 대체로 로코물로 빠지는데 이 영화는 그 길을 버리고 현실적인 감정을 다룬다. 영화는 상황보다는 대사가 그들을 대변한다. 마치 오래 전의 비포 선 셋 시리즈를 보는 것처럼. 두 사람은 만나서 술을 마시며 쓸데없지만 쓸모없지는 않은 이야기를 엄청나게 한다. 이는 곧 이야기를 하려면 만나야 하고 그리고 마주 보고 앉아서 술잔을 기울여야 한다. 요즘 이렇게 하기가 더없이 멀어져서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장면들이 마음에 든다.

대화는 끊임없이 빠구리 얘기와 소중이 얘기와 직설적인 문제를 논한다. 그 사이에 사랑과 연애는 빠져있다. 영화는 분명 현실적인 감정을 대사로 전부 토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주를 7병이나 마신 자영은 너무 예쁘고 볼 빨간 사춘기의 안드로이드처럼 세상에 없을 법한 인물처럼 보인다. 뭐야 보통 이렇게 마시면 남자건 여자건 찰흙을 벽에 던져 흘러내리는 얼굴인데 너무 비현실적이잖아. 어차피 로코가 아닌 연애가 빠진 로맨슨데 개판으로, 더 망가져도 되잖아.

그러는 와중에 자영이 하는 말, 맨 처음 저 위에서 한 말 “여기 안 외로운 사람 있어? 외로우니까 만나는 거지”라는 말을 들으면 현대인에게 너무나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혼자이면 당연히 외롭다. 그런데, 옆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도 외롭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


자영이 한 말을 유튜브 ‘1분 과학’의 말을 빌려 다시 해 보면.



과학자들이 환각제를 먹은 사람들의 뇌를 스캔을 하니 뇌가 엄청나게 활성화가 되어서 반짝일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특정 부분이 비활성화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부분이 DMN이라는 부분인데 디폴트 디멘션 어쩌고, 이 부분은 나, 자신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활성화가 된다. 나의 과거, 나의 미래, 나의 사랑, 나의 어떤 것, 나에 대해서 생각을 할 때 활성화가 된다. 기능적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느낄 때 여러 감각으로 느낀다. 이 감각들이 우리 몸속에서 전기신호로 바뀌어서 뇌 속으로 들어오는데 그 전기신호들이 서로 섞이지 않고 잘 구분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DMN 부분이다. 그런데 환각제를 먹으면 이 DMN이라는 부분이 꺼져 버린다. 그래서 ‘나’라고 하는 부분도 뇌에서 사라지게 된다. 즉 자아가 소멸된다. 그래서 환각제를 먹은 사람들은 기존의 모습에서 벗어난다. 자아가 꺼져 버려서 그렇다.


그런데 어린이들은 이 DMN이라는 부분이 비활성화되어 있다. 어린이도 자아가 꺼진 상태에 가깝다. 어린이들은 나는 뭐가 좋아,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어린이는 자신의 이름을 붙여, 교과니는 이게 좋아, 교과니는 여기에 갈래,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을   자아를 통해서 본다. DMN 꺼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렇다자아가 있기 때문에이성적으로 본다우리의 원점은 자아다원점을 그려놓고 세상을 보기 시작하니까 착한 사람나쁜 사람좋은 사람 같은 구분을 지어서 보게 된다그런데 사실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착하거나 나쁘거나 하는  우리가  만든 것이다 ‘라고 하는 원점에서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안에 들어갈 사람들을 구분해서 보기 시작했다 사람이 착한지 어떤지 모르지만 내가 카테고리를 만들어서  사람은 여기에 넣고 사람은 저기에 넣어서 구분을 한다그리고 나의 잣대로  사람은  착한 사람 착한 사람으로 지정해버린다.


그런데 DMN이 비활성화가 되면 그런 구분이 없어진다. 즉 자아가 없어지면 이런 잣대가 소멸한다. 이는 사람에게만 경계를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 물건, 자연으로 확대된다. 평소 같지 않게 하늘이 너어어어어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다. 자아가 살아 있으면 하늘이나 꽃이 제아무리 많아도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하늘을 보면서 막 울고, 눈물을 흘리며 아름답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에르메스를 보면 감동을 한다. 하지만 DMN이 비활성화가 되면 물질과 정신의 경계가 사라진다. 선입견이 없어지기 때문에 하늘이 말도 못 할 정도로 감동으로 다가온다.


환각제를 하지 않아도 비활성화되어 있는 어린이를 보자. 어린이는 선입견이 없고 욕심이 없고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그냥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재미있고 즐겁고 행복하다. 하루하루 모든 것이 신기하고 질문이 많다. 왜 달이 나를 계속 따라오는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부른 배를 부여잡고 있는 엄마와 형아 사진을 보며 왜 나는 잡아먹었냐면서 울고 불고 난리를 친다. DMN가 비활성화가 되어 있어서 그렇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가 가장 행복하다.


그런데, 그런데

어린이를 벗어나 찌든 생활을 하는 어른이라도 비활성화되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는 경우가 있다. 그게 바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자영이 술에 취해, 하는 대사에 접근할 수 있다.


진짜 사랑이라는 건 나보다 상대방을 더 위하고 중요하게 생각할 때를 말한다. 진짜 사랑이라는 건 엄마가 아이를 사랑하는 것을 진짜 사랑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엄마는 자신보다 아이가 훨씬 더 소중하고 아이에게 바라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엄마와 아이의 사랑에는 엄마라는 자신은 개입하지 않고 아이만을 생각하는 사랑을 하게 된다. 이게 가능하다. 아이가 기뻐하면 내가 기쁘고, 아이가 슬퍼하면 내가 슬프고, 심지어 말도 안 되지만 아이가 아프면 내가 아프기도 한다. 즉 엄마의 자아, ‘나’라는 영역이 아이에게 확장이 된 것이다. 엄마들이 아이를 낳으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고 하는데, 이는 엄마의 세상이 그 아이까지 확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인끼리 이런 사랑이 가능하지 않는다. 예쁘고 착한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지만 그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쁘고 착한 이미지를 사랑하는 것이다. 내 잣대로 구분해서 카테고리에 넣은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그 이미지가 깨지면 그 사람이 싫증 나고 미워지고 심지어는 헤어지기도 한다.


아마 똘아이 같은 영화 속 자영은 이미 첫사랑을 사랑하면서 배신을 두 번이나 당하며 이 모든 것을 유전자처럼 습득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랑이 빠진 그 자리에 활활 타오르는 관계만으로도 외로움을 극복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이 안 외로운 사람이 어딨냐고 자영이 술에 취해 말한다. 인간이란 한 이불에 같이 들어도 결국 잠은 혼자 들어야 하는 외로운 존재다. 혼자서는 외롭다. 당연하지만. 그러나 옆에 사랑하는 이가 있어도 외롭다면 이는 인간이 풀어야 할 숙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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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숟가락 떠먹으니 미미하게 장어의 비린 맛이 끝에 맴돌았다. 묘하지만 그 맛이 좋다. 민물생선의 그 미미한 비린 맛은 평소에 잘 맛볼 수 없기 때문에 어쩌다가 먹게 되면 그 맛을 음미한다. 말 그대로 비린내를 음미하게 된다. 이런 미미한 비린 맛은 늘 먹는 음식의 맛에서 벗어났기에 먹을 수 있을 때는 음미한다. '음. 미.' 하는 것이다. 맥주도 벌컥벌컥 마시기보다 음미하는 게 더 맛있게 느껴진다. 기묘하지만 음미 속에는 음식의 맛 그 이외의 것도 맛볼 수 있다.


장어탕은 옆집에서 먹어보라고 준 것이다. 옆집 아주머니는 요리를 잘한다. 식당에나 가야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집에서 직접 한다. 뚝딱 뚝딱 잘 도 한다. 웍도 없는데 탕수육 같은 것도 곧잘 만든다. 육개장도 집에서 재료를 가지고 다 만든다. 장어탕도 장어를 직접 손질해서 장어탕을 만든다. 전문가도 아닌데 이 정도로 비린 맛을 잡아낸다. 옆집 아주머니는 일을 하고 돌아오면 매일 지치지 않고 요리를 한다. 어떤 날은 선지 해장국을 만들어서 한 냄비를 얻어먹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이렇게 국이나 탕 종류의 요리를 주로 하는 이유는 소주를 마시기 위함이다.


매일 소주를 마시는데 빈속에 마실 수 없어서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술을 너무 마셔서 병원에서 알코올 중독 초기 증상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정신진료도 받아야 했다. 겉으로 보면 멀쩡하지만 아주머니는 속에서부터 점점 피폐해져 갔다.


아주머니에게는 아들이 한 명 있다. 어릴 때부터 똑똑하고 엄마를 위하는 아들이었다. 남편은 굴지의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세 명이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그 시간이 행복이라는 걸 당시에는 잘 느낄 수 없었다. 행복이란 늘 순간이며, 행복은 늘 비슷한 옷을 입고 있다. 추상적이며 손에 들어왔다 싶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 있다.


인사성이 밝은 아들은 동네 어른들을 보면 인사를 하고 공부도 잘하고 똘똘한 얼굴로 잘 컸다. 여기까지 읽고 아들이 반전을 할 거라고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들은 끝까지 저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갑니다. 반전이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거 미리 알려드립니다.


아들이 중학생이 되었을 때 전교에서 1등 아니면 2등이었다. 담임은 과학고에 보내자고 했다. 아주머니는 너무 기뻤다. 아들이 과학고에 가고 싶어 했다. 과학고에 다니려면 집에서 떨어져서 기숙사나 그 근처에서 다녀야 했다. 여기에는 과학고가 없기에 아들을 기숙사에 보내기로 했다. 아들은 고등학교 3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했다. 방학에도 자주 집으로 오지 못하고 명절에나 되어야 오곤 했다. 아들은 과학고 내에서도 성적이 좋아서 카이스트에 진학이 되었다.


카이스트에 합격한 소식을 듣고 기뻐하시던 아주머니가 생각난다. 아들은 카이스트에서도 연구에 몰두해서 교수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았다. 그러는 동안 아들은 입대를 하게 되었다. 충성. 아들이 군대에 갈 때 아주머니는 눈물을 보였다. 아들이 군대에 가고 나니 새삼 집이 텅 빈 것 같았다. 남편의 퇴직도 이제 1, 2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아들은 휴가를 받으면 집으로 와서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전했다. 그리고 일이 주 정도 되는 휴가기간에 며칠씩 학교에 가서 필요한 무엇을 잠시 하고 왔다. 휴가에서도 연구에 관한 무엇을 하고 왔다. 아주머니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러웠다. 아들은 시간이 갈수록 연구하는 게 재미있었다. 제대를 하고 복학을 한 이후에는 더 학구열에 불타올랐다. 그럴수록 집으로 오는 간격이 길어졌다.


아들에게 여자 친구가 생기면서 조금씩 아주머니는 아들과 멀어진다는 느낌을 절실하게 받는다. 학교 마지막 학기에 남편은 퇴직을 하고 타지방으로 일을 하러 가면서 집에는 아주머니만 남게 되었다. 아들이 졸업하기만을 기다렸다. 졸업을 하면 집으로 돌아오리라 기다렸다. 하지만 아들은 졸업하면서 미국으로 박사를 따기 위해 연구원으로 가게 되었다. 교수들의 추천을 왕창 받았다.


미국으로 가기 전에 아들은 집으로 와서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를 다녔다. 옆에 아주머니는 웃고 있었지만 깊은 주름이 눈에 띄었다. 아주머니는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깜깜한 집의 불을 켜야 한다. 누군가 집에서 반겨주거나 있지 않다. 아주머니가 요리를 해서 나에게 주는 이유는 내가 잘하는 장점을 살려 졸업사진을 가지고 벽시계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는 집에서 자신을 반겨주는 건 이 시계밖에 없다며 나에게 늘 고맙다며 탕이든 찌개든, 요리를 하면 이렇게 늘 먹으라고 준다. 어떤 요리는 요리를 해서 덜어서 주는 게 아니라 그 요리를 그대로 주는 경우도 있다. 요리를 왕창 해서 아주머니는 먹지 않고 나에게 먹으라고 준다. 그런 요리를 음미하면 짜지 않으면서 짜고, 달지 않은데 달다.


아주머니는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가끔 아주머니의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런저런 말을 하기도 한다. 이상해졌다느니 대꾸도 안 한다느니. 어느 날은 아주머니와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되었는데 담배냄새가 몸에서 많이 났다. 넓은 공간에서 피우는 것이 아니라 좁고 갇힌 공간에서 재빠르게 피워야만 나는 냄새.


장어탕 잘 먹었습니다.


시래기를 넣었는데도 비린내를 못 잡았어.


아니에요, 제 입에는 아주 좋았어요.


또 요리하면 먹어 줄 거야?


제가 언제 안 먹었던 적이 있어요? 너무 맛있게 잘 먹었는걸요.


아주머니는 언젠가부터 만나면 하던 아들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 시래기를 만나 뜻밖의 상승작용을 한 장어탕 덕분에 추운 겨울이 따뜻해졌다. 오늘은 해가 떴지만 냉기에 햇빛이 먹여버린 날이다. 이런 날이 겨울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된다. 오전인데도 글씨가 선명하게 쓰일 것 같은 입김이 새하얗게 나오는 날이다. 후 하. 일부러 입김을 내 본적이 언제였더라. 어떤 음식에는 남모를 사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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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1-09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유, 빈둥지증후군요. 어쩌나...
어떤 분이 하는 음식엔 그런 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군요.
무결점에 가까운 자식이 언제나 좋은 건 아니네요.ㅋ
웃프네요.ㅠ
그 아주머니 마음을 다 잡고 새로운 뭔가를 붙드시면 좋을 텐데,..
물론 교관님께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의미는 있겠습니다만
그냥 차선인 것 같기도하고...

교관 2022-01-10 12:25   좋아요 1 | URL
아주머니는 미용실을 하시는데, 앞으로는 괜찮아지겠죠. 그럴거라 생각합니다 ㅎㅎ 아들이 결혼을 하면 또 어떤 인생이 펼쳐질지도 모르고 ㅎㅎ 감사합니다. 스텔라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stella.K 2022-01-10 14:25   좋아요 0 | URL
아유, 제가 교관님께 새해 인사를 안 했군요. 교관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바라는 소망 다 이루시길 바랍니다 . 고맙습니다.🤗

얄라알라 2022-01-09 19: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처음엔 장어로 국도 끓이는 구나...하며 별 생각 없이 읽다가
아주머니께 나는 담배 냄새 문장에서 슬픔이 확 올라오네요. 저도 stella. K님 표현처럼 웃프다 해야할지...슬픔이 더 큽니다.

교관 2022-01-10 12:27   좋아요 1 | URL
슬픔은 늘 가까이 도사리고 있다가 틈이 보이면 그 틈으로 잘도 기어 들어오는 것 같아요 ㅎㅎ 얄라알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이 코로나가 빨리 끝나기를
 





1920년대 단평은 그 시기에 드물게도 자신의 오페라 무대를 가지고 자신이 만든 노래로 자신의 공연을 했다. 삭막하고 차가운 중국 땅에 뜨거운 오페라를 알리고 싶었던 단평.


오페라는 인간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사랑하는 사람의 손길 같은 것이었다.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고 외로움을 안아 줄 수 있는, 인간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이 오페라였다.


단평은 무대에서 그런 오페라를 불렀다. 온 마음을 다해 저 사람에게 나의 마음이 전달할 수 있게 노래를 불렀다.


단평을 좋아하던 운언은 단평의 공연을 늘 보러 왔다. 단평도 운언을 사랑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꽃보다 아름다웠고 태양보다 뜨거웠다. 단평은 사랑하는 운언을 위해 ‘야반가성’을 작곡하려 하지만 완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 꼭 ‘야반가성’을 완성해서 당신 앞에서 불러 주겠소. 단평은 운언에게 약속한다.


단평과 운언의 사랑은 아름다웠지만 신분을 넘은 사랑을 했기에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 위험했고, 너무 험난했지만 너무 사랑했다. 사랑이란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을 아름답게 위태위태하게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사랑은 나날이 뜨겁게 불타올랐다.


하지만 운언은 집에서 점찍어 놓은 곳으로 혼인을 가게 되었다. 운언은 그게 싫어 도망가려다가 붙잡히고 만다.


그날 밤, 한 무리들에 의해 단평의 극장은 불에 타고 단평은 죽는다.


팔려가다시피 시집간 운언은 그 집에서 처녀가 아니라는 이유로 남편에게 폭력을 당한다. 때리고 또 때리다가 운언을 쫓아내고 만다. 운언은 불타버린 극장에 매일 와서 단평을 기다리다 미쳐간다.


그렇게, 그렇게 10년의 세월이 흐른다.


10년 후 1936년이 되어 다 쓰러져가는 극장에 새롭게 나타난 극단이 공연을 하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이 엉망이었다. 실력이 검증되지 않으니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었다.


공연에서 주인공 역의 위청은 노래 실력 때문에 고민이 많다. 그때 위청에게 의문의 남자가 암막 뒤에 나타나 로미오와 줄리엣을 공연하라고 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릴 것이다.


그 의문의 남자는 죽은 줄 알았던 단평이었다. 단평은 10년 전 불에 타 죽은 게 아니라 한 무리의 남자들이 운언과 단평의 사랑을 방해하기 위해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극장에 불을 냈던 것이다. 단평은 염산 때문에 얼굴의 반이 흘러내렸지만 죽지 않고 극장에 숨어 ‘야반가성’을 완성시키고 있었다.


위청은 대면하지 않았던 단평의 말대로 로미와 줄리엣을 공연하면서 고음이 되지 않는 부분은 단평이 무대 뒤에서 대신 불러주었다. 단평이 노래를 부를 땐 운언을 생각하며 슬픔을 가득 채워 설움과 그리움을 담아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르며 단평은 눈물을 흘린다. 얼굴의 반이 없는 단평은 매일 미친 여자의 모습으로 극장에 나타나는 운언 앞에 나타날 수가 없었다. 반이 흘러내린 얼굴로 앞에 나설 수 없어서 죽고 싶었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았다. 운언에게 한 약속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단평은 얼굴의 반이 날아가 버렸고 운언은 정신의 반이 날아가 버렸다.


위청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운언은 위청을 죽은 단평으로 착각한다. 사랑에 눈이 멀어 미쳐갔지만 운언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없었던 단평은 위청을 통해 운언에게 야반가성을 들려 주려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못마땅하게 여겼던, 단평의 얼굴에 염산을 뿌린 조 씨가 운언에게 총을 쏜다. 총을 맞고 쓰러진 운언을 보고 그들 앞에서 단평은 절규한다. 마침내 운언 앞에 나타난 단평은 반이 없는 얼굴로 10년 동안 운언을 위해 만든 ‘야반가성’을 불러준다.



밤이 깊어서야 나와 당신은 비로소

영혼을 활짝 열고 꾸밈없는 마음을 내어 놓습니다

부드러운 입맞춤은 한밤중에

음악이 되어 당신의 마음에 다가갑니다

별님에게 간청합니다

달님이 증인이 되어 주세요

일생을 다해서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언젠가는 제 소망이 이루어져서

당신과 함께 영원을 찾아 날아갈 것입니다


반만 살아있는 얼굴의 단평과 두 눈이 보이지 않는 운언은 세상의 고통과 불행을 다 짊어지고 행복한 길을 떠난다.


사랑은 그런 거라고 알려 주었던 단평과 운언의 사랑이야기 ‘야반가성’이었다.


https://youtu.be/SaVIEThrg_M

유튜브 목소리큰겁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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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채 같지 않은 잡채도 잡채다. 잡채는 뜨거울 때 먹으면 맛있다. 중국집에서 잡채밥이 맛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상하게도 잡채밥이 짜장밥이나 짬뽕밥보다 맛이 덜 할 것 같은데 더 맛있다. 그러면 식으면 맛이 없냐면 또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식은 잡채를 더 좋아한다. 딱히 이유는 없다. 그저 뜨거운 모든 음식은 뜨거울 때 먹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빨리 먹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식은 음식은 될 대로 돼라,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먹을 수 있어서 좋다. 식은 잡채에 고추냉이를 뿌려 킁 하며 먹는 맛이 있다.


잡채라는 이름이 재미있어서 찾아보면 잡채의 한자는 갖가지 ‘잡(雜)’과 야채의 ‘채(菜)’다. 그래서 원래 잡채는 갖은 나물과 소고기나 돼지고기를 잘게 썰어 양념에 무쳐 볶은 음식이라고 나와있다. 그러니까 요즘에 먹는 잡채처럼 당면은 소거되어 있던 음식이었다. 그럼 언제부터 당면을 넣어서 볶은 이 음식을 잡채라고 했을까.라고 찾아보니 시대를 건너 올라가야 한다. 이야기를 하려니 너무 길다. 궁금한 사람도 없겠지만 궁금하면 검색해보기 바람요.


잡채를 먹다 보니 얼마 전에 본 일드 ‘나를 위한 한 끼 ~포상밥~’의 11화가 생각난다. 거기에 잡채가 나온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지방에서 도쿄로 올라와서 혼자서 우당탕탕 적응해가는 이야기를 서술한다.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 상처럼 맛있는 한 끼와 함께 그것을 잘 버무렸다.


11화에 한국 음식에 대해서 나온다. 막걸리도 팔고 부침개도 파는 일본 내 한국 주점에서 한국음식을 먹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면서 동료가 주인공을 위해 한국 음식을 잔뜩 시켜준다. 밑반찬이 우르르 나올 때 주인공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온다며 바가지를 씌우려는 것 아니냐고 한다. 그러자 동료는 다이죠부요 라면서 원래 한국 식당에서는 밑반찬을 이렇게 준다고 한다. 이 부분은 고로 상도 한국으로 몇 번 왔을 때 자주 경험한 일화들이다.


주인공의 동료는 막걸리, 동태전, 잡채, 보쌈, 순두부찌개를 주문한다.

동료가 순두부는 알지? 이태원 때문에 유행했잖아,라고 한다.

사진출처 네이버 블로그 진매료


그러면서 주인공은 맵찔인데 매운 음식에 도전을 하면서 한국의 순두부가 너무 맛있다는 것을 알고 그동안 먹어보지 못한 자신을 나무란다. 그리고 이렇게 매운 한국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처럼 자신의 일에도 도전을 하면 알게 되는 게 있다면서 공모전에 도전하는 내용이 11화이다. 포상밥 11화에서는 한국 음식과 한국 드라마를 한꺼번에 라이킷했다.


이런 모습은 와카코와 사케에서도 주인공 무라사키 와카코가 일본 내 코리아 타운의 순자네 식당에서 부침개를 먹고 맛있다고 소리를 지른다.

어째 한국과 일본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꽤나 어려울 것 같지만 문화는 사실 이렇게 늘 교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일본의 예능에서도 비대면이지만 이미 박진영이 나와서 혹독한 일본 예능계 방송인들을 놀라게 했고, 며칠 전에는 이정재가 나와서 일본 예능계 연예인들을 또 놀라게 했다.


박진영이 출연했을 때는 일본 연예계에서는 가장 영향력 있고 여장남자로 유명한 마츠코 디럭스와 대화를 했다. 마츠코 디럭스는 혐한 연예인으로 아주 유명했다. 한국 연예계를 깔아뭉개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해왔다. 한국의 아이돌은 일본의 모습을 베낀 것이 아닌가, 라며 한국을 쏘아 부쳤다. 그러던 그? 그녀? 가 언젠가부터 일본 아이돌은 왜 블랙핑크처럼 될 수 없는가? 라며 일본 연예계에 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왜 일본 아이돌은 아저씨들 앞에서 악수회나 하며 돈을 벌고 있어야 하나, 라며 일본을 꼬집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박진영과의 비대면으로 박진영의 연예계에 대한 철학을 듣게 된다. 박진영의 이야기를 듣는 마츠코 디럭스는 그만 귀엽기까지 해 버린다. 박진영의 똑 부러지는 말도, 철저한 생활방식도 듣는 마츠코 디럭스의 눈이 하트가 된다. 또 마츠코는 어떤 프로그램에서는 일본에서는 전혀 없었던 맛으로 일본에 상륙한 교촌치킨을 맛보는 그런 프로그램인데 한 조각을 먹고 방송을 이어가야 하는데 맛있다며 그 자리에서 테이블에 올라온 조각들을 다 먹어 치우느라 방송이 매끄럽지 못하기도 했다.


https://youtu.be/B1Gv0n2Im5A

오키나와 생존기록(류큐남자)



우리나라와는 달리 아침 방송의 파워가 대단한지, 방탄이들의 소식도 나올 때마다 대대적으로 소개를 한다. 그저 소개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방탄이들에 대해서 패널들 전부 감격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특히 일본은 방탄에 대해서 연일 보도를 하며 방탄의 행보에 일각을 세우며 초를 다투며 방탄의 소식을 전하는 느낌이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건 일본과 문화교류가 활발해졌다고 생각하지만, 그래서 문화 개방이 오래전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지만 라디오에서 자드의 노래를 들을 수는 없다. 한일 양국의 정치인들이나 혐한 우익 일본인들과 사이가 안 좋을 뿐이지 문화적으로는 너무나 활발하게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쿠사마 야요이의 전시는 한국에서 거의 최고이며 가장 고가에 팔리기도 했다. 일본의 가장 잘 나가는 녀석 스다 마사키도 양익준과 함께 영화도 찍었다. 이렇게 서로 어울려 같이 영화를 찍은 건 많다. 우리는 개방이라고 말은 하지만 전혀 개방이 되었다고 와닿지 않는다.


공부도 못하고 전공을 살리지도 못했지만 건축 디자인에는 관심이 아직도 많다. 좋아하는 건축가가 안도 다다오인데 일본에 가서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보며 돌아다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안도 다다오는 세계적인 건축가로 그의 책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다. 딱딱하지 않고 재미있다. 안도 다다오는 쌍둥이로 권투를 하다 도쿄의 좁은 땅 위에 좁은 집이지만 그 안에서는 넓게 사용할 수 있는 집을 지어야지 하며 건축가의 길로 들어섰다. 그래서 안도 다다오는 정식 코스 같은 것을 밟지 않고 세계적인 건축가가 되었다. 그런 일대기는 너무 재미있다. 또 안도 다다오의 수업을 들으러 한국인들도 많이 간다. 꼭 학생이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런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 우리나라에도 있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의 특징이라면 이게 분명 사람이 지은 건축물인데 그 안에 있으면 자연 속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늑하다는 것이다. 기이하고 또 기이한 건축가다. 그런 건축물이 제주도에 있다. 섭지코지의 글라하우스와 유민 미술관, 본태 박물관이 안도 다다오가 설계를 했다. 오래전에 한국에 대유행이었던 노출 콘크리트의 시초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디자인과 그림을 좋아한다면 제주도에 갈 때 바글바글 거리는 곳에 가서 줄 서서 문어나 사 먹지 말고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을 구경하라고 한다. 가보면 좋으니까. 그리고 예전의 지드레곤의 카페였던 몽상 드 애월에 가서 거기서 트레이시 애민의 작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돈과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트레이시 애민이 지디에게 선물해준 자신의 작품이 거기에 떡 허니 걸려 있다. 트레이시 애민의 작품은 실제로 잘 볼 수 없기에 가서 보는 것만으로도 땡큐다.


아무튼 이렇게 문화적으로는 열심히 교류를 하고 있다. 근데 유독 우리나라 방송가만큼은 이상하게도 고립적이라는 기분이 든다. 하루키를 초대해도 될 법하지만 이제 코로나에, 하루키도 나이가 많아서 그럴 가망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고작 노래 정도도 라디오에서 들을 수 없다. 그저 노래일 뿐인데도 ‘안 돼!’라는 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라디오에서 러시아 노래나 북유럽 여러 나라의 노래도 나온 적이 거의 없다. 기껏 가요와 팝송, 프랑스 노래 몇 곡이 나올 정도다. 이상해도 너무 이상하다. 나의 나라를 사랑하는 건 좋다. 하지만 국뽕에 취해서 일본 사람들은 아직도 시디를 넣는 노트북을 들고 다닌다거나 중국인들은 똥으로 뭔가를 해서 먹는다, 식의 이야기를 하는 건 정말 이상하다.


사실적 무엇인가를 말하려면 감정에 기대어 감성적으로 말하지 말고 제대로 알고 말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포상밥에서 보쌈 수육이 저렇게 나오다니. 여기 보쌈집에서 제대로 먹여주고 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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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2-01-06 15: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잡채처럼 여러 주제들이 잘 버무려졌네요.

교관 2022-01-07 11:32   좋아요 0 | URL
의식의 흐름대로 가버렸네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