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CVRE4znbyc [Movie OST] 라스트 레터 Last letter 2020 ラストレター Main Theme, Melody Project


이와이 슌지 감독의 ‘라스트 레터‘는 개인적으로 2년 전에 본 중국 버전이 더 와 닿았다. 이와이 슌지는 똑같은 영화를 어째서 두 번 연출했을까. 어떻든 재미있는 건 배우 '모리 나나'는 중국 버전에도, 일본 버전에도 다 나온다. 일본 버전에는 조연으로 소개되고 중국 버전에는 주연으로 소개된다.


중국 버전의 라스트 레터를 봤을 때 이 영화는 러브레터를 지나 수많은 시간을 거쳐 영화를 보는 지금의 사람들에게 나침반 같은 방향을 느끼게 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라는 게 한 인간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시절이 있고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죽을 것처럼 슬퍼하지만, 그렇기에 이 지옥 같은 매일을 견딜 수 있다고 이와이 슌지의 영화는 꼭 말한다.


그 속에는 그리움이라는 기묘한 감정이 있어서 힘이 들 때 그 그리움이라는 감정이 등장하여 등을 두드려 주기도 하고 슬퍼하는 가슴을 안아주기도 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몹쓸 놈의 선배가 하는 말처럼 사람의 인생을 고작 소설책 한 권으로 다 담아낼 수는 없다.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추악한 것이 인간이지만 반면에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도 인간이니까.

일본 버전 속에는 안노 히데야키도 나온다. 누군지 다 알겠지만 에반게리온의 원작자이다. 그가 만든 영화 ‘신 고질라’를 나는 재미있게 봤는데 그 영화 속에서 고질라를 소거하고 거기에 ‘핵’을 대입하면 대번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영화였다. 이와이 슌지 월드 속에 쭈욱 같이 했던 마츠 다카코도 나오고, 러브 레터의, 역시 선배였던 토요카와 에츠시도 나온다. 감성 돋는 풍성한 연출로 그리움이라는 게 화면 가득 나오지만 아무튼 개인적으로 중국 버전이 더 가슴을 적셨다.

일본 영화계를 보자면 이렇게 이와이 슌지의 창작 각본으로 만든 영화는 일본 극장에서 소외되고 있다. 돈이 되지 않는다. 점점 더 영화 쪽 문화는 악화되어 가고 있다. 공각기동대의 오시미 마모루는 귀칼의 돌풍에 대해서 회의적인 입장을 냈다. 그러면서 한국의 영화산업에 대해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당연하게도 일본에서는 그 자식 공각기동대 하나 빼고 뭐 만들어 낸 놈이지? 그런 놈이 왜 지껄이고 있냐, 라는 반응이 대부분이다.

오시이 마모루는 봉 감독이 ‘옥자’를 만들 때 촬영장에 와서 감탄을 하고 돌아간 이력이 있다. 오시이 마모루와 비슷한 생각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도 가지고 있다. 고레에다 감독의 ‘파비안느에 관한 진실’이 프랑스에서 상을 받고 해외에서 화제가 되었는데 그때 아베 정부가 전혀 언급이 없는 것에 프랑스 언론이 너도나도 그 사실을 신문에 실었다. 그제야 아베가 고레에다에게 축전을 보냈는데 고레에다 감독이 반사했던 일도 있었다.


일본은 감독과 배우들의, 그러니까 신인 감독과 신인 배우들의 무덤이, 무덤 정도가 아니라 아무튼 지옥 같은 곳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와이 슌지가 이미 중국 버전의 ‘라스트 레터’를 만들었지만 일본 배우들을 데리고 다시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 라며 만들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자국의 영화산업이 엉망진창이 되어 가는 것에 조금이라도 뭔가를 하고 싶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본은 귀칼이 돌풍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일본도 한국의 웹툰을 엄청나게 보고 있다.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일본의 영화가 몰락해가는 것에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나 좋아하는 이와이 슌지 감독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계속 보고 싶잖아. 지금까지 나온 영화를 다 봤는데 앞으로 나올 영화가 당연하지만 보고 싶으니까.



편지 하나로 이렇게 가슴 조이는 판타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이와이 슌지에게 놀랐고 영화를 보면서 속수무책으로 빠져들어가는 나 자신 때문에 놀랐던 영화.


첫사랑(에게 쓴)

편지(를)

소설(로 적어서)

만으로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서 겸허하게 받아들이기까지의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마음의 자세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던 영화.

무엇보다 코를 훌쩍거리게 되는 영화.


편지 하나로 가슴 뻑뻑한 판타지를 만들어내는 이와이 슌지는 마술사 같다. 정말 오랜만에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정을 느꼈다. 러브레터를 볼 때보다 스웨터 두 장, 만큼의 더 한 감동이 가슴에 꽉 차 들었다. 이와이 슌지가 영화를 계속 만드는 한 나는 이 가슴이 꽉 차는 감정의 끈을 놓치지는 않을 것 같다. 


허접한 시나리오를 써 놓은 게 있는데 영화를 찍고 싶다고 강렬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였다.


이와이 슌지는 이런 음악을 어떻게 만들어낼까. 릴리 슈슈에서도 언두에서도 피크닉에서도 하나와 엘리스에서도 립반 윙클의 신부에서도. 마지막 편지에서 흐르는 음악 역시 머리보다는 가슴의 골 사이를 잔잔하고 깊게 파고든다.


 - 2019. 2. 9


2년 전 2월에 본 라스트 레터는 그런 감정을 가져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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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이 책은 책이 아니라 이 책을 구입했을 때 딸려오는 ‘덤’으로 안에는 포스트잇이다. ‘덤’은 에세이의 종류별로 다 있었는데 나는 포스트잇 같은 걸 쓰지 않아서 이거 하나 남기고 다 나눠 준 것 같다. 크기가 아이폰 4 만하다.

뒷면을 보면 문학동네의 자랑이자 기둥인 신형철의 평론이 있다. 그걸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신형철은 평론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글을 적어낸다. 그래서 신형철의 평론을 읽고 있으면 지루하지 않고 글을 읽는 동안 다른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지 않는다.

그런데 평론도 문학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평론가는 신형철이 처음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요컨대 배철수가 라디오 디제이 중에서는 팝의 으뜸으로 손꼽히지만 배철수 이전의 팝 디제이가 있었다. 이종환이 그랬고 더 전에는 이백천이 있었다. 또 드렁큰 타이거의 아버지도 있었다.

그런 것처럼 평론도 거슬러 올라가면 김현 평론가가 있었다. 과거형으로 말하는 건 죽었기 때문이다. 김현을 말하려면 기형도를 말해야 하고, 기형도와의 재미난 일화들을 얘기해야 하지만 너무 길기 때문에 넘어가자. 기형도는 과작의 시인으로 머릿속에는 수많은 시가 있지만 머릿속이 시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작품으로 만들지도 않았고 발표도 하지 않았다. 언젠가 김현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시작노트를 슬쩍 들춰본 일이 있었다. 알아보기 힘든 깨알 같은 글씨로 가득 차 있었고, 군데군데 암호나 기호 혹은 스케치 같은 것도 곁들여져 있었다. 기형도는 그 노트에서 마치 보물을 캐내듯 시를 뽑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시를 몹시 잘 적었음에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공모에도 내지 않고 그랬다. 그런 기형도가 시를 모아 모아서 들고서 그만 파고다 극장인가 거기서 피를 쏟고 죽고 말았다.

그때 기형도의 시를 모아서 시집을 낸 사람이 김현 평론가였다. 김현이 기형도 시집의 제목을 ‘입속의 검은 잎’으로 지어서 문지사를 통해 발표했다. 김현이 기형도의 시집 제목을 그렇게 지은 것은 본인도 기형도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가 김현 평론가도 죽고 만다. 김현의 평론을 읽어봐도 문학이라 할 만큼 일반인이 다가갈 수 있게 써놨다.

여하튼 그런 신형철이 하루키의 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문장은 정말, 그야말로 하루키식 문학적이다. -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나는 한 번도 그를 싫어하는데 성공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무라카미가 썼다 해도 공장 방문기 같은 것은 읽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보기 좋게 당한 느낌이다. 깜짝 놀랄 만큼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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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안 통하는 한국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말이 통하는 외국사람도 있다. 요즘은 코로나 덕분에 일을 마치면 바로 귀가하지만 집에서 그저 잠만 잤던 나는 코로나 그 이전에는 일을 마치고 조깅을 하고 난 후에는 집 근처의 백색소음이 가득한 곳에서 책을 좀 읽거나 쓰고 싶은 글을 조금 쓰다가 들어갔다. 카페보다는 주로 맥주 한 잔을 하면서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그러던 중에 그날이 오픈인 퍼브가 있었다. 집 근처이고 분위기도 좋아서 그대로 들어갔다. 아뿔싸 그런데 주인이 외국인이 있었다. 내가 주로 마시는 맥주는 칼스버그인데 칼스버그가 없어서 기네스를 마셨다. 오오 근데 기네스의 맛이 뭐랄까 편의점에서 캔으로 파는 기네스의 맛보다 좋았다. 아주 진하고 깊은 맛이 났다.


나는 회귀성이 강해서 한 번 갔던 곳을 줄곧 찾아가는 경향이 있다. 일단 한 번 발을 딛게 되면 그 옆에 더 나은 곳이 생겨도, 더 괜찮은 뷰가 있는 곳이 나타나도 쉽게 발길을 돌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도 늘 그랬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에도 늘 가던 비디오 가게가 있었다. 아주 작은 곳으로 동네에 처음 생긴 곳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에 그 옆에 아주 큰 비디오 가게가 생겼다. 모두가 다 그곳으로 갔지만 나는 그 좁아터진 곳으로 가서 비디오를 빌려 봤다. 주인아저씨와 오래되었기에 가서 비디오 제목을 말하면 바로 탁 찾아 주었다.


그래서 일 년 정도 뒤에 친구와 함께 내가 늘 가는 작은 비디오 가게에 같이 갔다. 친구도 간 김에 거기서 비디오를 빌리고 나도 빌렸는데 나는 VIP로 등록이 되어 있어서 그 날은 무료로 빌릴 수 있었다. 굉장히 기분이 좋았다. 정말 대접받는 기분이 들었다. 학창 시절에는 늘 가던 레코드 가게만 가게 되었다. 노래가 파일로 존재하기 전에 거대한 백화점 레코드 점이나 대형 마트 안의 레코드 점도 좋았지만 늘 가던 곳의 어떤 그런 분위기가 있다. 그 분위기는 나를 꼭 안아준다. 서점도 그랬다.


일을 마치면 나는 그 바로 가서 기네스를 한 잔 주문하고 그다음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주인은 웨일스 출신의 아저씨로 이름은 좐(존)이었다. 당연히 매일 가니 매일 인사를 하고 매일 맥주를 마시며 매일 알아듣지 못하는 이야기를 조금씩 주고받았다. 한 달 정도 뒤에 좐 아저씨는 나에게 “너 때문인지 여기 오는 손님들이 혼자서 와서 맥주를 마시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며 보라고 하는 것이다.


집 근처에는 굴지의 제조업 회사가 있고 그 회사에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아주 많다. 아파트 근처에는 외국인들이 사는 사택과 아파트가 많아서 동네에는 외국인 반, 한국인 반 정도의 인구비율을 보인다. 다른 퍼브에 비해서 좐 아저씨의 퍼브에 가면 90%가 외국인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통 아메리칸이나 잉글랜드는 없다. 대체로 러시아, 체코, 아프리카의 외국인들이 많다. 온 가족이 함께 이곳에 온 외국인은 회사에서 위치가 좀 되는 기술직의 사람이고, 혼자서 온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동북, 동남아시아 인들은 없다. 그들은 대체로 저 끝으로 가면 방파제가 나오는데 거기의 어선에서 모두 일을 한다. 동남아시아인들의 재미있는 일화는 대체로 더운 나라에서 와서 그런지 한 5월 달 정도 되면 아, 이제는 내복을 좀 벗지, 하며 그때서야 내복을 벗어던진다. 그들과 낚시를 하면 꽤 재미있지만 이 일은 다음에 하기로 하자.


좐 아저씨의 퍼브는 밤 9시가 되면 이전에 가능하던 요리는 나오지 않는다. 음식은 일절 주문받지 않는다. 오로지 술만 판다. 아주 좋은 현상이다. 누군가 와서 배가 고프다며 음식 먹기를 바란다고 해도 넉살 좋게 생긴 얼굴로 “오우, 이 시간 이후로 주방은 모두 퇴근이에요”라고 돌려보낸다. 미련도 갖지 않는다. 그래서 퍼브 안으로 주방의 음식 냄새가 나지 않는다.


좐 아저씨 퍼브의 재미있는 점은 주말이 되면, 금요일이 되면 외국인 가족들도 모두 퍼브로 와서 주말을 즐긴다. 좐의 퍼브에는 당구대도 있는데 모두가 한 손에 와인 한 잔씩 들고 당구대 주위에 서서 흐르는 음악에 따라 몸을 흔든다. 한 손에 와인을 들고 몸을 흔드는 외국인들은 기술자들의 가족들로 주로 아내나 딸들이다. 이브닝드레스 비슷한 옷을 갖춰 입고 금요일에는 좐의 퍼브에서 밤을 즐긴다.


그런 시간, 그런 날, 좐의 퍼브에 있게 되면 모두와 친해져서 같이 떠들고 마시며 논다. 한 번은 경찰이 떴다. 퍼브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오아시스의 ‘스탠 바이 미’를 따라 열창을 했기에 옆집에서 주민 신고가 들어온 것이다. 시끄럽게 해서 경찰이 온 건 예전 고등학교 때 친구 집에서 모두 모여서 소주를 마시며 옛날 노래를 부르다 신고당해서 경찰이 오고서는 또 처음 겪는 일이었다.


좐 아저씨와 조금 더 친하게 된 계기는 나오는 음악 때문이었다. 좐 아저씨는 브루스 스프링스턴을 좋아했는데 그의 노래와, 그리고 하루키라는 소설가가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노래를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하며 친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영국 음악의 계보 같은 것들을 죽 이야기해 주었다. 비틀스를 시작으로 해서 버브, 라디오헤드, 오아시스, 뮤즈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죽 했다. 글래스톤베리 축제는 음악의 꽃이라는 것과 함께, 아일랜드 그룹 크렌베리스의 ‘좀비’라는 노래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을 때를 꼬집는 노래라는 것도 주절주절 이야기를 해버렸다.


좐 아저씨는 웨일스 출신으로 영국을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크렌베리스의 노래 '좀비'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더욱 좐 아저씨는 나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어쩐지 그 뒤로부터 인가 기네스를 주문해서 반 정도 마시고 나면 반 잔 정도 남은 내 잔에 에이펙이라는 맥주를 섞어 주었다. 근데 그게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좐 아저씨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노트북으로 나는 자신의 가족에게 인사도 시켜주었다. 노트북으로 영상통화를 하는 가족은 저 이역만리에 떨어져 있는 전 부인과 딸들이었고 여기 퍼브에서는 지금 같이 살고 있는 아내(한국인)와 아들이 같이 있다. 노트북으로 영상통화를 하는데 지금의 아내가 반갑게 예전의 아내에게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묻고 마치 친 자매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런 문화는 아주 기분이 좋았다.


좐 아저씨에게는 아들이 하나 있는데 같이 지내고 있어서 퍼브에도 종종 놀러 왔다. 좐 아저씨에게 소개를 받아서 같이 사진도 찍고 맥주를 마시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좐 아저씨와 아들을 보면 홍콩인들처럼 담배를 같이 피운다. 야외에 앉아서 같이 담배를 피우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이지도 않으며 자연스럽게 보인다. 해운대에 가면 대만인지 홍콩의 한 가족이-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아들, 딸들이 다 같이 테이블에 앉아서 담배를 피울 사람은 그 자리에서 피운다. 어른 앞에서 담배를 피우니 담배를 피우고 카악 퉷 하면서 침이나 가래를 뱉는 행위는 없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면서 계절도 바뀌었다. 여름 동안 떠들썩하게 주말만 되면 축제 분위기가 매주 이어졌다. 별 것 아닌 것에도 모두가 다 같이 웃고 즐겁게 시간에 충실했다. 그들은 주말은 칼 같이 지켰다. 금, 토, 일에는 그저 쉬는 것이다. 주말에 일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회사에 다니는 외국인들의 가족들도 주말 저녁에는 모두가 나와서 와인이나 맥주잔을 들고 주말을 즐긴다. 또 크리스마스가 끼는 주말에는 보통 2주 정도가 휴가를 받는다. 쓰지 않고 모아둔 휴가까지 이어 붙이면 거의 한 달 가까이 휴가를 보낼 수 있다. 우리와는 아주 다르다. 그 기간에 가족을 보러 외국의 자신들의 집으로 가는 외국인들이 있고, 아예 2주 동안 느긋하게 이 곳 바닷가를 어슬렁 거리며 저녁에는 퍼브에 나와 간단한 조리음식과 맥주를 즐기는 외국인들도 있다.


좐 아저씨의 퍼브에는 일단 외국인들이 많다. 하지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굴지의 제조업 한국인 회사원들도 퇴근 후에 해물탕에 소주를 한 잔 걸리고 2차로 들리기도 한다. 한 번은 내가 앉아서 맥주를 홀짝이며 책을 읽고 있었다. 아마 그때 읽었던 책이 이충걸의 ‘완전히 불완전한’이었다. 이충걸 하면 잡지 지큐의 편집장으로 그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기쁨이 된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그런 작가가 몇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황경신이라든가 씨네 21의 김혜리 기자의 글이 그렇다.


이충걸의 그 책은 첫 소설이라 아주 푹 빠져서 보고 있었는데 바의 옆에 앉아서 술이 거하게 된 회사원(굴지의 대기업 회사원들이 입는 회사 점퍼를 그들은 늘 입고 있다) 두 명중 한 명이 내쪽으로 쓱 오는 것이다. 그러더니 나의 얼굴을 아래위로 조금 훑어보더니 혀가 꼬부라진 소리로 “아 유 제페니즈?"라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읽고 있던 책을 보여줬다. 눈을 한 일자로 가늘게 뜨고 한 참을 보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일행에게 그런 말을 했다. “야야, 저 일본인 한국 책 읽고 있더라, 제길.”


그렇게 좐 아저씨의 바를 들락거리다가 스산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었다. 나는 늘 비슷한 모습으로, 그러니까 조깅을 하면서 입고 있던 그런 체육복 차림으로 가방을 들고 아이패드나 책을 꺼내서 바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한 번 앉았던 자리에 늘 앉게 된다. 하루는 좌 아저씨가 새벽 2시까지 하는 장사를 자정에 접었다.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손님들에게 미안하다며 자정에 다 내보내고 셔터 문을 닫았다. 그리고는 둘이서 술을 마시자는 것이다.


좐 아저씨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한국에 와서 한국인 아내 빼고는 그렇게 마음을 열 수 있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는데 꽤나 말이 통한다는 것이다. 좐 아저씨는 숨겨둔 위스키를 들고 와서 맥주와 함께 어떤 식으로 섞어 마시면 맛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래서 둘이서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셨다. 좐 아저씨 퍼브의 맥주가 왜 맛있냐 하면은 편의점에 들어가는 맥주와는 다른 기법의 기네스와 에이팩 종류의 맥주를 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게 중에는 본토에서 가져오는 맥주도 있었다. 이런 부분은 나는 잘 모르는데 나의 사촌동생이 한 번은 집에 놀러를 왔다. 사촌동생 가족이 온 것이다. 이모의 가족이다. 나의 어머니 동생과 그의 남편인 이모부, 그리고 딸인 사촌동생과 가의 남편이 온 것이다. 사촌동생과 남편은 맥주 킬러로 포틀랜드에 살다가 와서 맥주에 관해서는 꽤나 맛을 아는 사람들인데 좐 아저씨의 퍼브에서 맥주를 마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여기 맥주는 보통 다른 곳의 맥주와 확실히 다르다고. 나는 다 먹고 난 후 술값을 계산하지 않고 한 잔씩 시킬 때마다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계산을 했는데 사촌동생 내외는 그것도 꽤나 재미있어했다.


아무튼 좐 아저씨와 새벽 4시까지 술을 마시며 둘 다 술이 많이 취했다. 좐 아저씨는 웨일스 해군 출신으로 그 약자를 퍼브의 상호명으로 했다. 덩치도 좋고 키도 엄청 커서 특수훈련을 받으며 군생활을 한 탓에 그다지 겁이 나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고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와는 정 반대의 나와 알게 되고 매일 책을 조금 읽고 하는 모습이 새로웠던 것이다. 물론 이야기를 술술 하며 대화가 통한 건 아니다. 내가 영어가 안 되니 대화 사이에는 이런저런 몸짓과 폰의 도움도 받고 술이 정신을 때린 다음이라 서로 다른 말을 해도 그저 알아듣게 된다.


좐 아저씨와는 언어는 안 통하지만 말은 잘 통했다. 좐 아저씨를 비롯해서 나의 친구와 결혼을 한 영국인 죠나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러니까 호구조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버지 뭐 하시노, 같은 질문은 전혀 없다. 그저 지금 하는 대화에 충실하고 그 시간을 즐겁게 보낸다. 습관적으로 상대방의 나이, 상대방의 어머니, 상대방의 동생의 나이는 뭐야?라고 묻는 한국인들은 마치 그렇게 모든 것이 생각하는 틀에 끼워 맞춰져야 상대방이 대화를 할 수 있는 자격을 갖췄다고 생각하는 인상을 풍긴다. 언어는 통하는데 말이 통하지 않는 한국 사람도 많다. 어떻든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고 사람들은 전부 제각각이다.  


그러다가 굴지의 조선업 회사는 타격을 맞게 되었다. 그러면서 시나브로 외국인들이 각자 자기의 나라로 돌아갔다. 결국 그 여파에 좐 아저씨의 퍼브도 문을 닫고 말았다. 어디서든 잘 지내시겠지. 브루스 스프링스턴의 노래를 들으며. 



차례대로

셔터를 내리고 4시까지 마실 때

좐 아저씨도 술이 됐음

바닷가 퍼브의 여름은 늘 이렇게 북적인다

퍼브에서 책 읽는 사람이 늘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늘 파티다

문에는 내가 찍은 사진들이 즐비하게 붙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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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


‘격이 없는 사이’라는 건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가 없는 사이다.


보통 격이 없는 사이를 아주 좋은 사이, 무엇이든지 격이 없이 이야기하는 사이라고 어른들은 말했고 아이들에게 주입식으로 그 사실이 진실이라고 교육을 했다. 그리하여 요즘도 여러 곳에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는 격이 없는 사이라는 말을 한다.


격이 없는 사이끼리 왜 그래?라고 말을 해버리면 상대방이 그 말 때문에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제대로 못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격이 없는 사이는 과연 좋은 사이이며, 격이 없는 사이가 정말 올바른 관계일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존중하고, 지킬 건 지키고,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격이 없는 사이에 좀 더 부합된 사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에세이 중에도 ‘좁은 일본, 밝은 가정’이라는 글이 있는데 이런 비슷한 문제를 꼬집고 있다. 살짝 꼬집는 것이 아니라 아주 세게 피멍이 들도록 꼬집는다.

 

격이 없는 사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나오는 곳이 가정이다. 부모는 자신이 낳은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착각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완전히 독립된 하나의 자아로서 아이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룰 때까지 돌봐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지만 어떤 부모는 그저 자신의 아이는 자신의 소유물이니까 집착을 보이기도 한다.


부모 자식 간에 격이 없는 사이가 바람직하다고 부모 입장에서는 생각을 한다. 모든 걸 종알종알 고주알미주알 이야기를 하던 애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비밀을 간직하게 되면 어떤 부모는 불안해진다. 말 그대로 '격이 없는 사이'에 금이 갔다고 생각을 한다.  

 

부모 자식 간에는 격이 없는 사이가 이상적이고 올바른 관계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술렁술렁 그저 허허 웃고 넘길 에세이를 많이 쓴 하루키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표정을 싹 지우고 굳은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아무튼 부모와 자식이 뭐든 얘기하는 가정은 과연 정말로 즐거운 가정일까? 나는 그 표어 앞에 서서 근본적인 의문에 빠졌다. 이런 표어는 때로 근본적인 사고의 확인을 요구한다. 나는 가정이란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제도라고 생각한다. 절대적인 것도 아니고 확정적인 것도 아니다. 분명히 말해서, 그것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옮겨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잠정성의 위태로움을 인식함으로써 가정은 구성원 각자의 자아를 유연하게 흡수해갈 수 있다. 그러지 못한다면 가정은 그저 무의미하고 경직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가정이란 이른바 유연하게 만들어진 자아의 제로섬 사회다. 이게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따라서 부모와 자식이 무엇이든 솔직하게 숨김없이 얘기하고, 그렇게 해야 비로소 가정이 건전해진다는 건 너무도 단순하고 단편적인 발상이다]


그래서 내식으로 말하자면 격이 없는 사이는 엉망진창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이에서는 힘이 있는 자가 그 격을 결정짓고 상대방이 따라오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관계를 격이 없는 사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을 여럿 보았다. 


친구지간에 격이 없는 사이라는 말을 가장 많이 쓴다. 격이 없다고 느끼는 사이일수록 격을 차리고 존중해줘야 한다. 너무 친한 친구라서 함부로 막 대하다간 옳지 못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물며 직장에서 격이 없는 사이가 존재할 수 없는데 며칠 전에는 상사가 신입직원을 나에게 우리는 격이 없는 사이라고 말을 할 때 신입직원의 표정을 봤어야 했다. 


하루키는 '가정이란 이른바 유연하게 만들어진 자아의 제로섬 사회다'라고 했다. 부모 자식 간에 무엇이든 숨김없이 솔직하게 나누는 것이 가정을 건전하게 만든다는 것은 정말 너무 단순하고 단편적인 말이다. 인간은 본디 복잡하고 단편적이지 않은데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사람을 맞추려고 하면 탈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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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즈코 디오라마 완성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단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는 귀멸의 칼날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줬던 극장판 ‘무한 열차’ 편이었다. 영원한 오니의 삶보다 유한한 인간이 아름답다는 이유를 알려준 쿄쥬로 때문에 극장 안이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던 귀멸의 칼날: 무한 열차 편에서 귀칼 빠들은 또 한 번 온몸이 불타오르는 격렬한 감동을 느꼈다.


사람들은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을 영화나 장면에서 뜨거운 돌을 삼킨 것 같은 뜨거움이 속에서 올라와서 그대로 눈물샘을 터뜨려 펑펑 울게 되면 당황하면서도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수순을 밟는다. 쿄쥬로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은 등에서 거대한 송충이 한 마리가 지나간 듯한 느낌을 받았다.


슈퍼히어로 영화였던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에서도 그런 장면이 몇 있었다. 요컨대 초반에 완다와 비전이 타노스 부하들에게 당할 때 기차역으로 떨어지고, 비전은 부상을 입고 완다는 비전을 부축하고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는 찰나, 기차 뒤에 사람의 실루엣이 나타나고 그쪽으로 타노스의 부하가 창을 던질 때 실루엣이 몸을 살짝 피하면서 그 창을 콰악 잡는다. 캡틴 아메리카가 등장한 것이다. 별것 아닌 그 장면에서도 울컥한다.


이번 귀칼 무한열차 편을 보고 온 사람은 끝없는 쿄쥬로 앓이를 하고 있다. 쿄쥬로의 잔상이 어디를 가나 따라다닌다. 처음 쿄쥬로가 등장했을 때 뭐 이런 올바른 말이나 쳐하는 정의감 쩌는 놈을 봤나, 우마이 우마이 할 때까지도 그랬는데 그만 마지막에서 사람들은 무너지고 만다.


십이귀월인 아카자에게 쿄쥬로는 체력으로나 기술로나 밀린다. 하지만 그 둘의 카운터 필살 공격을 펼치는 장면은 압도적이다. 힘 좋은 9세 남자아이가 줄로 몸을 꽁꽁 묶어서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것처럼 그 장면에서 몸이 꽉 조여드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아카자에게 밀리던 쿄쥬로는 급소인 가슴이 뚫리게 된다. 그래도 쿄쥬로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미칠 듯 터지는 투지로 급습하는 아카자의 왼팔을 꽉 부여잡는다. 해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때 쉽이귀월 아카자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자신을 팔을 자르고 도망가는 아카자를 뒤쫓는 탄지로에게 우리는 몰입 최강이 된다. 탄지로의 마음에 이입이 되었기에 탄지로가 울부짖는 절규를 우리는 알 수 있다. 우리 또한 탄지로처럼 일생을 보내면서 자신의 무력감과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이를 잃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쿄쥬로의 마지막을 지켜주는 탄지로에게 유언과 함께 히노카미 카구라의 단서를 알려주고 웃음을 보이며 최후를 맞이하는 장면에서 모두가 울음바다가 된다. 귀칼에서 가장 뭉클하고 뜨거운 장면이다. 탄지로 때문에 글썽이던 눈물이 쿄쥬로 때문에 터지고 만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극장에서 모두를 울게 만드는 영화는 실로 오랜만이다.


유곽 편에서 네즈코는 울트라 각성을 한다. 점점 기대되는 귀칼의 시리즈.


https://youtu.be/R5sTnuMODD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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