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와 셀린은 둘도 없는 친구로 남편에 아들도 한 명씩 비슷한 구석이 많다. 아들들은 등교도 같이하고 하교도 같이 한다. 축하할 일이 있으면 두 집이 함께 축하를 할 정도로 가족 같은 사이다.

그러던 중 셀린의 아들 맥스가 2층 베란다에서 새(🦅) 집을 만지다가 그만 떨어진다. 건너편에서 앨리스가 보고 소리를 지르며 셀린의 집으로 뛰쳐 가지만 셀린은 청소기를 돌리느라 듣지 못한다. 그렇게 맥스는 죽고 만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기기묘묘한 기류가 흐른다. 아들을 잃은 셀린은 앨리스의 아들에게 접근하고, 앨리스의 남편의 어머니가 심장마비로 죽는 등 알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난다. 앨리스는 셀린을 의심하고 점점 광기를 부린다.

그러나 아무런 증거가 없고 과거 병력 때문에 오히려 남편에게 의심만 사게 된다. 아들을 잃은 셀린과 친구를 잃은 테오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앨리스는 엄마인 자신과는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다고 느낀다.

앨리스 주위에서 계속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이 전부 셀린이 꾸민 짓이라 생각하는 앨리스는 급기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저지르는데. 이 영화는 시간도 짧고 앤 해서웨이와 제시카 차스테인의 점점 미쳐가는 연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

마지막은 생각지도 못한 결말로 치닫는다. 아마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걸. 아니지 원작이 있으니 소설을 읽은 사람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두 명의 주인공 말고도 아들인 테오의 연기를 보는 것 역시 재미있다. 앤 해서웨이는 나아가 든 티가 난다. 그런데 제시카 차스테인은 이전보다 더 아름답고 예뻐졌다. 60년대 자리 잡은 중산층이 입는 의상을 보는 재미도 있다.

광기와 집착에 매몰된 인간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보여주는 영화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가장 무서운 존재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한 영화, 두 주인공의 무시무시한 인간 광기의 영화 ‘마더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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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판타지다. 주인공 태석은 고도자본주의가 만개한 이 세계에서 히어로적인 캐릭터다. 말수가 적고, 손으로 뭐든 만들고, 운동신경이 뛰어나고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집과 인간의 관계를 적립한다.

태석은 오토바이로 전단지를 돌리는 일을 하는데 전단지가 문에 며칠씩 있으면 그 집에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문을 따고 들어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생활한다. 빈 집에서 목욕도 하고, 책도 읽고, 티브이도 보고 잠도 잔다. 요즘 일본 드라마 히루도 이 같은 방식이다.

그렇지만 태석은 빈집에서 돈을 가져 나온다거나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러운 곳은 치우고, 닦고, 화초에 물도 주며 망가진 물건은 고쳐 놓는다. 마치 살아있는 집으로 바꾸어 놓고 집을 나온다.

그러던 중 평창동의 부잣집에 들어간다. 태석은 그 집에서 자기만의 고요를 즐기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내는데 그 집은 빈집이 아니었다. 그 집의 어두운 구석에 선화라는 멍투성이의 힘없는 여자가 쭈그리고 앉아서 태석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화는 태석의 행동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간다. 비뚤어진 걸 바로잡고, 안정되지 않은 걸 안정되게 하는 태석의 손에서 선화는 마음의 안정울 찾아간다. 선화는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는데 사과와 폭행의 반복이 이루어진다.

태석은 자신의 손재주로 골프채 3번 아이언을 휘둘러 골프공을 날려 남편을 쓰러트리고 선화를 데리고 집을 나와 오토바이를 타고 둘이서 빈집을 돌며 생활을 한다. 빈집에서 망가진 티브이를 고치고 흐트러진 물건을 바로 잡는 태석의 모습에서 선화는 웃음을 찾아간다.

그러다가 북촌의 한옥 집에 가게 되는데 그 집에서는 두 사람이 할 것이 없었다. 문도 잠겨있지 않고, 정리할 물건도 없고, 안타까운 화초의 모습도 없었다. 그 집의 가족들이 끈끈한 정으로 집을 따스하게 잘 이끌어 왔다는 걸 알게 된다. 그 집에서 두 사람은 잠만 자다가 나온다.

한 낡은 연립주택에 들어가는데 노인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정성스레 염을 하고 묻어준다. 하지만 노인의 가족이 태석을 무단칩입과 살해의 죄를 물어 태석은 교도소로, 선화는 남편에게 가게 된다.

태석은 교도소에서 선화에게 가기 위해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훈련을 한다. 그건 인간의 시야각 180도를 벗어나는 훈련이다. 어둠과 공간을 이용해 교도관의 시야각에서 벗어나 선화를 찾아간다.

태석은 선화의 집에서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채 생활을 한다. 남편은 아내와 단 둘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세 명이 그 집에 있었다. 선화는 남편에게 미소를 지으며 밥 맛있게 먹으라는 대사를 한다. 그 대사는 남편의 시야각에서 벗어난 남편 뒤의 태석에게 하는 말이었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 형태를 띠고 있다. 태석의 대사가 한 마디도 없다. 집이라는 공간은 인간이 편안한 유대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아니라 점점 소유욕의 대명사로 변질해 가는 모습을 영화는 꼬집는다.

해외버전의 제목은 쓰리 아이언이다. 태석이 휘둘렀던 골프채를 말한다. 김기덕은 재능은 있었으나 삐뚤어진 욕망이 자신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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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도 나치 이야기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촉망받는 재즈 가수를 꿈꾸는 스텔라라는 여성이 나치에게 잡혀 폭행에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나치에게 유태인이 숨어 있는 장소를 일러바치는 배신자가 되는 이야기다.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되는 스텔라는 나치에게 유태인의 장소를 일러바침으로 해서 너무나 많은 유태인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한다.

아직 나치가 점령하기 직전 재즈 가수를 꿈꾸며 친구들과 신나게 연습 중인 스텔라는 유태인을 잡아간다는 소식에도 코웃음친다. 색소폰을 연주하며 같이 연습하는 동료의 아버지가 끌려가서 슬픔에 빠져있는데도 연습하라며 짜증을 낸다. 다른 동료들은 위로를 건네는데 스텔라는 그렇게 할 거면 자신은 안 하겠다며 엄청난 짜증력을 낸다.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고 스텔라라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나치에게 결국 잡혀 피해자가 되었다가 가해자가 되는데 보고 있으면 정말 짜증 난다. 결혼한 남편도, 그렇게 사랑하는 부모님도 자신 때문에 다 엉망진창이 된다.

그럼에도 남자들을 만날 때 터져 나오는 묘한 눈빛이 이 와중에도 육체적 탐미는,,, 그러니까 남자들을 밀어내는 것 같으면서도 다 받아들인다. 이 영화는 15세인데 붕가붕가 장면이 많다. 어째서 15세일까.

결국 동포를 팔아먹었다고 사람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그럼에도 부모는 스텔라를 원망하지 않지만 스텔라는 오히려 부모를 원망한다. 대충 어떤 캐릭터인지 알겠지. 스텔라는 나치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도 브로드웨이에 가고픈 꿈을 포기 못 한다. 스텔라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 동료고 뭐고 다 팔아먹는다.

전쟁이 끝나고 스텔라는 유태인 법정에 선다. 스텔라가 앞잡이가 되어 잡혀가서 죽은 수많은 유대인 가족들이 스텔라를 몰아세우지만 변호사는 스텔라를 요리조리 잘 빼낸다. 그때 스텔라의 표정이 너무나 신나있어서 아주 밉게 보인다. 결국 법정에서 모든 사람들의 염원인 구속을 피하고 스텔라는 무죄를 선고받는다.

모두가 오열하는데 혼자 신난 스텔라. 스텔라는 70세 정도까지 살다가 자살을 한다. 자막으로 자살 충동에 늘 시달렸다고 나오지만 영화를 보면 스텔라에게 동정이 가기 보다 고구마 백 개에 아주 밉게 보인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는데 그냥 실화를 실제로 옮기지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런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아우슈비츠에 끌려가면 두 군데로 나뉜다. 강제수용소와 샤워실. 샤워실에 끌려가는 어린이, 노인, 여자 할 것 없이 그냥 가스로 마시고 죽는다.

이미 일어난 일은 당신 책임이 아니지만 그 일이 반복되지 않게 노력하는 건 당신 책임입니다 - 막스 만하이머 다하우 강제수용소 생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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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꾼을 다시 한번 봤다. 여학생들의 성장 이야기는 꽤 많이 있는데 남학생들의 성장물은 많이 없었는데.

여자들의 성장 영화로 고양이를 부탁해가 있다면 남학생들의 성장은 바로 파수꾼이라고 생각한다.

삐딱한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기태를 이해한다. 기태는 시종일관 욕을 하면서도 천진난만한 미소를 짓는다.

예전에 보면서 제목이 왜 파수꾼일까 생각했다. 기태는 좋아하는 친구에게 삐딱하게 말하고 폭력도 행사한다. 이상하게 보이지만 그게 기태의 다가가는 법이다.

기태는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하며 자랐다. 제목이 왜 파수꾼일까 하며 보다 보니 기태는 홀든 콜필드의 모습을 닮았다.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든 콜필드 녀석의 모습이다.

영화 이야기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하지만 남학생들만의 재미를 보여주는 테이크로 이루어져 있다. 밝은 어둠이다. 마치 백야에 떨어진 듯한 느낌이다.

절친인 희준을 괴롭히는 기태도, 이를 악물고 괴롭힘을 당하는 희준도,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 결국 터지고 마는 동윤도 모두가 백야에 서 있는 것 같다. 위태위태하다.

홀든 콜필드 녀석도 위태위태했다. 선생님은 뭐가 다른데요? 선생님 눈에도 전 그냥 유령이잖아요. 한 번도 저한테 말 걸어 주신 적 없잖아요.라고 홀든 녀석이 소리를 질렀다.

홀든 녀석은 모든 일을 불평으로 일관해버리는 말투와 늘 삐딱한 태도와 시선으로 욕을 뱉어낸다. 어른들은 홀든을 늘 불만에 가득한 문제아라고 낙인찍어버린다. 그리고 홀든은 퇴학까지 당한다.

홀든 녀석은 모든 과목에서 낙제점을 받지만 작문에는 재능을 보였다. 어른들의 세계에는 혐오를 드러내지만 세상을 떠난 어린 동생에게는 여리고 여린 마음을 드러낸다. 벽처럼 단단한 마음의 틈으로 동생을 향한 추억 어린 그리운 마음이 뚫고 나온다.

홀든의 이야기는 당시 추악한 위선으로 얼룩진 세상을 바라보는 상처 받은 청소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이 영화 파수꾼이 그렇다. 세 명은 상처를 주는 동시에 상처를 받았다. 주인공 녀석들에게 몰입이 안 될 수가 없다. 기태도, 희준도, 동윤도 좀 더 행복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영화 ‘파수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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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를 다시 보는데 찌발 이 장면이 왜 뭉클하냐. 내가 뭐 애국자도 아니고 태극기 다는 날에 빠트리기도 하는데.

영화 속 대통령의 모습이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 어떤 이익이 오지 않더라도 저런 대통령을 둔다면 국민으로 얼마나 뿌듯하고 기분 좋게 다닐까.

강대국 일본에 독도는 우리 땅이다, 그러니 나가라, 우리나라의 주권은 우리나라 국민에게 있다, 그러니 일본 너네가 와서 이러쿵저러쿵 하지 마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우리 대통령은 그저 영화 속에서나 있다니.

현실의 대통령이 영화 속 국민을, 아니 국민만을 생각하는 대통령의 모습과 정 반대의 모습이라 영화를 보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이 알 수 없는 이 개똥 같은 마음을 어쩌란 말일까.

게다가 일본 해상 자위대가 독도 근처로 쳐들어오자 우리 해군 제독은 일본 해상 자위대의 전투력의 30%밖에 안 되지만 막아야 한다면 반드시 막아 내겠다고 할 때도 뭉클하다.

채 상병 죽음에 임성근 이 개객끼를 우리나라 장군이라 할 수 있을까. 전쟁 나면 뒤에서 병들만 죽음으로 내몰다가 나중에는 도망갈 것이 분명한 인물이다. 임성근 같은 놈은 아직 전쟁도 한 번도 치러보지 않았잖아.

영화가 현실이고 이 현실이 영화라면 얼마나 좋을까. 국민보다 지 와이프를 너무나 생각하는 이상한 대통령을 앞으로 얼마나 더 봐야 하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네.


https://youtu.be/WTbfr6cx5qA?si=3gDhJq8Un9fnhbn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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