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시간이나 되는 이 영화를 멍하게 그저 푹 빠져서 봐 버렸다. 이 영화는 진정 놀라운 영화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힐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복수극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가족 드라마이며, 어떤 사람에게는 공포 또는 코미디다.


아무튼 놀라운 영화였다. 아리 에스터의 전작들처럼 가족이라는 게 늘 평화롭게만 흘러가지 않는, 피로 이어져서 서로 행복하게만 보이지 않는다는 걸 이 영화에서도 여실히, 깡그리 보여주었다.


정신과 상담 의사가 보에게 엄마가 죽기를 바란 적이 있죠?라고 묻는다. 보는 깜짝 놀라서 그런 적인 없다고 한다. 여기서부터 이 영화는 경계가 무너진다.


사랑과 복수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편집증과 정상의 경계도 무너진다. 그놈의 거미는 눈앞에서 사라지나 없어지는 건 아니다. 모서리, 이 영화에서도 전작들처럼 모서리의 무서움을 보여주는데 인간 거미가 욕실의 모서리에 붙어서 나타난다.


세 시간이나 빠져서 보게 된 생각대로 흘러가는 장면이 1도 없어서다. 꿈에서 깨어났는데 다른 꿈인 거 같고. 만나는 사람들은 마치 각본에 의해 움직이는 거 같고. 진실이 알고 싶지만 진실이라는 게 너무 무서워서 기이한 형태로 앞에 나타나고.


나는 나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엄마를 사실 죽이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간이 단단하게 가질 정서가 연하디 연할 시기에 학대를 받게 되면 바로 이 영화의 보처럼 되는 것 같다.


보는 어른이 된 후 망가진 외모가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 다시 만난 일레인에게 나야 보. 그러나 일레인은 보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래 너야 보, 얼굴과 몸은 너 아닌 것 같지만. 어린 시절에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고 자라면 정신이 망가지는 것은 물론이고 보의 외모를 통해서 알 수 있듯 망가진다는 것이다.


정신과 몸이 망가진다.


보는 다행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행동에서도 이타성이 발효된다. 토니가 페인트를 마시려고 할 때 막으려고 한다거나. 그러나 결국 억눌러왔던 분노가 엄마의 목을 조른다. 이 분노라는 건 억제할 수가 없다.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사람들은 대체로 어린 시절에 정서적으로 학대를 받았을 가망성이 많다.


분노를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자신을 무섭게 보고 죽일 것 같다고 느낀다. 그래서 결국 칼을 들고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한다. 많은 정서적 학대를 받은 이들이 제대로 상담도 받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서 시동을 걸고 있었을 뿐이다. 한 명이 칼부림 난동을 시작하니 너도나도 여기저기서 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러나 이런 분노를 교묘하게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소위 잘 배운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무기인 머리와 돈, 지위를 가지고 글을 써서 인터넷에 올려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에 공격을 한다. 사회 구조에 대한 분노가 가득하지만 그 구조를 바꿀 수는 없으니 누군가 공격할 대상을 찾아서 공격을 하고 괴멸시킨다.


이 영화를 보면 요즘의 일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영화는 현실이 환상인지 또는 악몽을 꾸는 건지 경계가 알 수 없는 곳에서 헤매게 된다.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 단위는 엄마와 아빠다. 이 엄마와 아빠의 기본이 무너지고 정서에 타격을 받게 되면 어제오늘 끔찍하게 발생하는 사건의 결과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이 영화가 공포 영화에 가까운 이유는 영화가 가족 이야기라서 그렇다. 가족에게 학대를 받고 자라지만 가족이라 연을 끊을 수도 없다. 뫼비우스처럼 끝나지 않고 관계가 이어지는 공포. 그 공포를 끝내는 건 사라져야 하는 것. 정서적으로 받은 학대가 기묘한 꿈으로, 망상과 환상과 현실이 모호하지만 경계가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는 걸 말하는 영화 같다. 정신분석한 공부하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 ‘보 이즈 어프레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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