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소리도 없이’는 올해 내가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재미있었다. 아니, 제일 좋았다고 해야 맞을까. 암튼 개인적으로 최고였다. 이 영화는 클리셰를 온통 박살 낸다.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것이 다 허물어진다. 영화는 보는 내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휙 스친다. 그의 영화들이 스친다기보다 고 감독이 떠오른다. 고 감독이 고민하는 버려진 가족, 새로운 가족, 바뀐 가족, 헤어진 가족이 이 영화 속에는 라면 위의 치즈처럼 녹아있다.
예상을 박살 내는 장면으로 영화는 가득한데, 초희가 잡혀 온 태인의 집에 있는 거지 같은 아이 문주는 태인의 진짜 동생이며, 초반에 일을 떼주던 실장이 그 꼴을 당하고, 술 취한 자전거 아저씨는 진짜 경찰이고 심지어는 아이를 찾으라고 명령까지 내린다. 여경을 묻는 장면에서 경찰모를 덮어 줄 때에도 어? 했는데 나중에는 아니 이런, 하게 된다.
무엇보다 예상을 전부 깨트리는 인물은 초희다. 순수한 태인은 초희와 지내면서 자신의 동생, 문주와도 잘 지내고 빨래도 해주는 초희에게 점점 태인의 방식으로 마음을 연다. 그리고 태인은 자기도 모르는 새 그만 초희에게 기대게 된다. 초희가 자신의 가족이 되었다고,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 초희는 태인의 집에서 마치 식구처럼 잘 지낸다. 도대체 잡혀 온 인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초희가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초희 자신의 집에서도 3대 독자만 사랑하는 부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자신을 속이고 가면을 쓴 모습이었다. 그것의 그저 연장이었을 뿐이다. 마지막에 초희가 선생님에게 태인은 착하고 나에게 잘해준 오빠라 하지 않고 나를 인질로 삼은 나쁜 유괴범이다, 그동안 나는 무서워 죽는 줄 알았다고 선생님에게 말한다.
가끔 어른들은 딸아이의 재능을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고 싶어 한다. 우리 애는 물건을 제자리에 곧잘 갖다 놓고, 정리정돈을 무척 잘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아이에게 주위 어른들은 칭찬을 하고 예쁘다 하고 올바르다고 한다. 대체로 보면 멋대로 하려는 경향이 짙은 남자아이보다 여자아이들이 칭찬을 많이 듣는다. 강신주 박사는 이런 여자아이들은 똑똑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것은 눈치가 빨라서 그런 것이라 말한다. 눈치가 남자아이보다 빠르기 때문에 어떻게 행동하면 엄마의 마음에 든다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다. 어른들의 강요는 아이에게 눈치라는 또 다른 자아를 생성시킨다. 초희에게는 이미 그런 페르소나가 생긴 것이다. 어른들에게 잘 맞는 아이로 생활하는 방법을 깨우쳤다. 영화 속 인물 중에서 가장 불행하고 착하면서 나쁜 인물이 초희다.
이 영화는 철저하게 계산해서 클리셰를 전부 비틀어 버림으로 보는 이들을 갈팡질팡하게 만들지만 결국 인간은 페르소나를 안고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도 속이고 남도 속이며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인물들은 온통 어둡고 아픈 과거를 안고 행복한 구석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가 밝기만 하다.
초희를 팔러 간 닭집에는 인질의 아이들이 이미 여럿 있다. 그 아이들의 목숨이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닭보다 못하지만 영화는 너무나 순수하고 재미있게 보여준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가장 악랄하고 끔찍한 범죄가 그들에게는 그저 일상인 것이다. 그걸 너무 유쾌하게 뒤집어서 보여준다.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인물들의 상황과 심리에 맞지 않게 색감이 정말 예쁘다. 그간 영화 속에서 본 색감들 중에서 가장 예쁘고 아름답게 나온다. 플로리다 프로젝트의 상반된 컬러 같기도 하다. 마치 초현실 풍경화, 쉬르 리얼리즘 수채화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컬러 속의 인물들은 온통 흑백이고 단색으로 얼룩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초희는 집으로 돌아가서 여전히 가면을 쓰고 지낼 것이다. 전혀 행복해하지도 않은데 행복한 척, 착한 척하며 지낼 것이다. 그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초희는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에 나오는 부모가 바라는 삶을 살아가는 언니 아사히 에리처럼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전부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며 끝이 나는데 그 장면이 아주 잔인하다.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행복하지 않다. 사람을 묻고, 유괴를 하고, 부당한 돈으로 불안하게 지금까지 삶을 살았고, 인질범들과 함께 있어서 겁이 나서 언제나 도망칠 궁리만 하고, 이제 친해진 언니가 또 도망갈까 봐 불안한 사람들이 불안하지 않은 채 행복한 모습으로 끝이 난다. 그게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오랜만에 생각과 고민과 사고를 하게 만든,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게 본 영화 ‘소리도 없이’였다.
https://youtu.be/y0tpQAbx0j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