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천막 밖으로 나가서
물살을 봐야 한다. 멜러리는 자신이 봐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자신이 죽고 이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 앞선다, 그렇다고 보이(남자아이의
이름)에게 그 일을 맡 길 수 없다. 그때 자신이 앞을 보겠다고 하는걸(여자아이의 이름). 보이는 멜러리가 낳은 아이고 걸은 같이 지내던
임산부가 낳은 아이인데 걸을 낳고 밖을 보는 바람에 죽어 버렸다. 여기서 멜러리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산드라 블록은 엄마로써 아들은
살리고 싶고 자신이 이 종말의 세계에서 죽는 게 낫지만 그렇게는 할 수 없고 그렇다고 걸에게 그 가혹한 일을 시킨다는 것에서 오는 원죄의 조임을
견딜 수 없어 하는 모습을 표정으로 연기를 한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연민과 자기학대가 부딪히고 모성애와 인류애가
이기심과 부딪히는 모습을 표현한다. 그 장면은 보는 이들을 흡입한다
저 귀여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라는 이유로 종말의 세상에 내던져야 하는 이유를 갖다 붙이기에는 나는 너무 이기심이 많은 여자. 걸의 옆에는 내가 낳은 아이가 나를 보고
있다. 어떻게든 이 아이는 살아야 한다. 내가, 내가 죽는 게 낫지만 내가 죽으면 이 두 아이 모두 죽음에서 면치 못한다. 그렇다고 보이에게
밖을 내다보게 할 수는 없다. 그때 그 어린 꼬마 '걸'이 내가 볼게요,라고 한다
우리는 삶에서 이런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게 되고 그때 나의 입장, 내가 끌어안을 수 있는 내 새끼의 입장만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나와 그 너머의 내가 서로 마주하게 되는
것을 떠올린다. 이 한 장면만으로도 버드 박스는 꽤 해냈다고 생각이 든다
영화 버드 박스는 인류 종말,
퍼스트 아포칼립스가 도래한 세상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은 밖에서 다닐 때 눈을 감아야 한다는 것이다. 멜러리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어려운 방법을 감행하고 보이와 걸을 데리고 작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기로 한다
영화는 여러 영화가 겹쳐지나
간다. 영화 속 초현실 크리처는 인간을 무참히 자살로 몰고 간다. 그것에 ‘왜’라든가 ‘이유’같은 건 없다. 영화 밖에서도 가끔 이유를 묻지
못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경우를 당한다. 영화에서처럼 마찬가지로 자살을 택하는 이들도 있다. 영화를 보면 제목이 버드박스인지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