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일찍 나와 버려 카페가 문을 열기 전에 바닷가에 앉아서 책을 좀 읽었다. '19세기의 정치가 21세기의 우주과학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인문학 책을 읽었다는 말은 새빨간 거짓말이고 소설을 좀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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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가 문을 열기 전 발코니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니 눈물이 나올 만큼 날이 따뜻하고 좋아서 그만 조부렀다. 조불다는 졸다의 방언이다. 조부렀다는 졸았다의 방언이 되겠다. 책을 땅에 떨어트려가며 고개를 병든 닭처럼 까닥거리며 잘도 조부렀다. 마치 드뷔시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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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음악은 뭔가 밑으로 푸욱 꺼져 내려가는 기분을 들게 한다. 물의 반영도 그렇고 아라베스크도 그렇고, 멍하게 듣고 있으면 천공의 성 라퓨타로 가는 느낌. 릴리슈슈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음악도 아라베스크였고, 내내 깊고 깊은 곳으로 한없이 꺼져가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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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비포 유에서 루가 윌이 데리고 간 연주회에서 접하지 못했던 선율에 마음과 영혼을 몽땅 빼앗겨 버리는 장면에서도 클래식의 선율이 때로는 사람의 마음을 멸망케하고 부활시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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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대학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친구가 있는데, 그녀가 퀼른 음대 시절 간간이 한국에 오면 그녀의 연주를 들었다. 그것은 대단히 경이로운 것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고 들어보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울보로 새벽이면 전화가 와서 독일에서의 언어장벽과 생존을 위해 공부와 생활을 해야 하는 것과 피아노를 손톱이 빠져라 두드리는 것과 무엇보다 외로움에 대해서 수화기 너머로 늘어놓곤 했다. 생각해보면 졸음 때문에 제대로 들어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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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편력이 심한 드뷔시는 몇 년을 같이 산 여자 몰래 바람을 피우다 들켜 여자가 권총으로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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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졸고 있으니 마치 ‘목신의 오후에의 전주곡’이 떠올랐다. 말라메르의 ‘목신의 오후’에서 영감을 받아서 만든 곡이다. 목신이라는 것은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의 ‘판[포느]의 미로’에 나오는 판이 목신이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목신은 얼굴과 몸통은 사람의 형상인데 밑으로는 다르게 생겨먹은 것이 목신, 판이다. 드뷔시의 오후에의 전주곡의 내용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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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느는 여름의 나른한 오후에 시칠리아 섬 해변의 숲속 그늘에서 졸고 있었다. 

그때 포느는 졸음이 쏟아지는 눈으로 목욕을 하는 요정을 발견한다. 

포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환상인지 분간도 할 수 없고 현실과 이계의 임계점에서 가물거리는 눈으로 요정에게 손을 뻗어 본다.

달콤한과 나른함.

고통이라고는 느낄 수 없는 요정의 이 감촉.

포느는 모호하고 뿌옇게 보이는 요정을 껴안는다.

요정은 비너스요, 관능의 상징이다.

포느의 입은 벌어지고 황홀경에 접어들려는 찰나.

요정은 없어지고 포느는 짊어지고 있던 권태가 엄습해 온다.

포느는 다시 여름날의 오후에 고요함 속으로 빠지려 풀밭에서 잠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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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는 포느가 풀밭에 졸다 깨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광경이 떠오르게 작곡했다. 전주곡에서 들리는 플루트의 소리는 목신의 움직임을 잘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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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정을 끌어안았을 때 느껴지는 관능의 기분 좋음이 피어오르다가 그 모든 것이 환상이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힘겨운 졸음으로 이어지는 연주가 펼쳐진다. 눈을 떠 보니 직원이 늘 마시던 걸로,라며 텀블러를 들고 가 커피를 담아줬다. 나른한 11일월의 오전. 정신을 차려보니 말도 잘 못하던 울보 그녀는 외로움을 극복하고 아이의 엄마가 되었고 수십 명의 학생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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