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건축과에 들어갔을 때, 우리 학교 정원 48명 중 여학생은 딱 하나 있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짧은 치마에 늘씬한 다리를 한껏 드러낸 여학생을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외모 또한 가물에 콩나듯 들어오는 공대 여학생의 그것을 훨씬 넘어섰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녀는 곧 우리 과의 여신이 되었다. MT나 단합대회 등 각종 모임에 그녀가 참가하느냐 마느냐는 모임의 재미와 참여도를 결정하는 핵심요인이었다. 다른 학생들도 그랬겠지만 나 역시 수업 중 무료할 때마다 그녀를 바라보며 가슴 설레곤 했었다. 우리 중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으며, 실제로 그녀에게 접선했던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대 다른 과 선배와 커플이 됨으로써 우리를 실망시켰다. 그것도 겨우 두달만에. 그렇다해도 그녀의 인기는 변함이 없었다. 우리도 어차피 그녀와 잘될 것은 아니었기에, 더 중요한 이유로 그녀가 우리 중 하나에게 갔다면 훨씬 더 배가 아팠을 것이기에.
공대 역사상 최고의 섹시가이라는 평을 들었던 그녀는 졸업할 때까지 남자를 두 번 바꿨고-그러니까 총 세명을 사귀었고, 그 세명 중 우리 과 사람은 없었다. 두학번 위의 법대생과 세 번째로 커플이 되었을 땐 솔직히 좀 짜증이 났지만, 여신의 지위는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는 그녀를 향해 서있는 해바라기였고, 수업 시간마다 그녀 옆에 앉으려고 다툼을 벌였다. 3학년이 되어 그 모든 게 시들해질 때까지.
그녀가 두 번째 남자를 사귈 무렵, 강의실에서 휴지로 책상을 닦던 내게 그녀가 다가왔다. “뭐해?” “채, 책상 닦아” “후훗, 진옥이 넌 언제나 책상만 닦고 있더라?” 내 이름도 모르지 않을까 했는데, 그녀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깨, 깨끗한 게 좋잖아” 그녀는 갑자기 돌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오늘 나 술 한잔만 사줄래?” 너무 당황해서 대답조차 할 수가 없었다. “시간 돼?” “어, 그야 당연하지” 그날 수업 내내 내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짐작할 거다. 다들 열심히 도면을 그릴 때, 난 멍하니 있는 적이 더 많았으니까. 물론 내가 특별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 나같이 평범하고 결벽증이 있고 돈도 없으면서 공부도 그저 그런 애가 뭘 어쩐다고?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으론 그녀와 잘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역시나 그녀는 그냥 마음 속에 쌓인 걸 풀고자 날 불러낸 거였다. 왜 하필 나를? 다음날 생각해보니 내가 과에서 친구도 별로 없고, 말도 거의 없는 애라서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얘기-그말을 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애인이 자기에게 잘해주지 않는다는 얘기-그놈을 패주고 싶었다-그리고 또 무슨 얘기를 했더라. 술이라도 취하면 업고 집까지 데려다주려 했는데, 술을 못마신다면서 소주 2잔만 마시고 안마시는 바람에 얼떨결에 내가 취해 버렸다 (소주 4잔에 헬렐레 해져버린 내가 부끄럽다). 그 후 그녀와 만날 때마다 아는 척을 하긴 했지만, 같이 술을 마실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았다.
그뒤 소개팅에서 만난 사람과 두달을 연애했고, 당연한 일이지만 채였고, 그러다 3학년이 되었고, 3학년을 마치고 군대를 갔고, 4학년에 복학했을 때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과 결혼한 뒤였다. “신랑은 뭐하는 사람이래?” “S 회사 다니나 하여간 그래. 잘생겼더라.”
술을 마시고 난 뒤 전혀 가깝게 대해주지 않는 그녀에게 약간은 서운했지만, 여신과 술을 마시는 특별한 경험은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고 유부녀가 되었어도 동창회만 나갔다 하면 언제나 화제는 그녀다(그녀는 한번을 제외하곤 나온 적이 없다). 그녀와 자본 적이 있는 사람 손들라, 없냐, 그럼 술이라도 마셔본 사람 손들라. 몇 명이 “나! 나!” 하고 손을 들 때, 난 아무도 모르게 손가락을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