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다닐 때 있던 일이다. 여자 회사원이 하나 입사했을 때, 그녀에게 관심을 갖는 남자는 별로 없었다. 아주 밉상은 아니라해도 솔직히 미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애가 너무 말라서 글래머스러운 매력이 없었기 때문. 이효리처럼 허리는 가는데 가슴은 큰 그런 스타일이면 외모가 처져도 섹스어필할 수 있을테고, 다리도 마르기만 한 게 아니라 육감적인 모양을 갖춘다면 청치마 정도를 입고다니며 남자들 혼을 빼놓았을 텐데, 빼빼 마르기만 한 그녀는 그저 나무토막에 불과했다. 하지만 오래 보다보면 정을 붙이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 스캔들 한번 내지 않았던 그녀의 학교 선배 K는 어느날 그녀와 결혼한다는 청천벽력같은 발표를 했다. 발표 내내 그녀는 알듯 모를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 발표가 사실임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그러자 난리가 났다. “어떻게 몇 살이나 더 어린 후배를 유혹할 수가 있냐”느니 “남자가 봉잡았다”느니. 아니, 그렇게 괜찮은 여자라면 지들이 접근할 일, 남의 떡은 커보인다는 진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꼭 이와 같은 경우라고 하긴 뭐하지만, 최근 몇 년간 최희섭을 보면서 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1. 에릭 캐로스

박찬호가 다저스에 있던 시절, 캐로스를 좋아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거다. 결정적 챤스에서 맨날 병살타만 치지, 수비도 못하지, 그러다 점수차가 커져 승패가 확연히 갈리면 그제서야 홈런을 펑펑 치는 그런 선수였으니까. 그의 기록은 외형상으로는 화려하다. 92년도, 타율은 .257에 불과했지만 20홈런에 88타점을 기록하며 신인왕에 올랐던 캐로스는 95년 .298에 홈런 32개를 치며 전성기를 맞는다. 박찬호가 풀타임 메이져리거가 되던 96년부터 2000년까지도 한해를 제외하고는 서른개 이상의 홈런과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는 저력을 보이는데, 아까도 말했듯이 이 홈런들은 대개가 별 영양가 없는 거라는 게 문제다. 무사 2루에서 삼진, 주자가 1, 2루에 있으면 병살타. 앞날을 예언하는 데 별 소질이 없던 나지만 캐로스가 타석에 들어섰을 때는 용한 점쟁이였다. 다저스가 예나 지금이나 FC(football club, 즉 축구 스코어만큼 득점력이 약하다는 뜻) 다저스로 불리우는 데는 중심타자였던 캐로스의 닭질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스윙 크기로는 타이거 우즈 못지 않던 몬데시도 한 축을 담당했지만 말이다. 99년 유일하게 3할을 넘기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그는 2000년 2할5푼, 2001년 .235를 기록하며 본격적인 쇠락 기미를 보이는데, 그때 찬호 경기를 보면서 얼마나 캐로스를 미워했는지 모른다.


박찬호가 텍사스로 이적했을 때, 난 다저스의 물방망이가 뿜어내는 답답함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특히 캐로스같은 1루수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마냥 기뻤다. 하지만.


최희섭이 2003년 풀타임 메이져리거로 자리잡으면서 캐로스와의 악연은 시작된다. 최희섭이 신통치 못한 활약을 보이자 포스트시즌 진출을 노렸던 시카코가 캐로스를 데려온 것. 전성기가 지나도 한참 지난 캐로스는 하지만 시카코에서 펄펄 날았다. 초창기만 해도 안타 대비 타점이 극히 낮은 그다운 모습을 보이다가 후반기 들어서, 특히 최희섭이 캐리우드랑 부딪혀 머리를 다친 뒤부터는 쳤다 하면 결승홈런이고, 적시타였다. 300승을 노리던 클레맨스의 꿈을 좌절시키는 역전 홈런을 비롯해서 연일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친 그는 결국 최희섭에게 크나큰 심적 압박을 가했고, 머리부상에서 돌아왔을 때 그의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물론 최희섭이 그 후 잘했으면 모르겠지만, 심약하기 그지없어 챤스에도 속절없이 약했던 최희섭은 그 긴장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해 하마터면 우승까지 할뻔하는 등 커브스가 근래 들어 보기드문 성적을 올리는 순간, 최희섭은 벤치에서 그 광경을 봐야 했다. 캐로스가 기록한 성적은 타율 .286에 홈런 12개, 40타점. 시즌의 절반만 나와서 거둔 성적이다. 2001년과 2002년, 두배나 많은 타석에 들어서 각각 홈런 15-63타점, 홈런 13-73타점에 그친 선수 치고는 보기드문 활약이다. 그를 보면서 난 한탄했다. 찬호 던질 때는 그리도 못하더니, 왜 하필 지금이냐고.


2. 올메도 세인즈

플로리다에서 준수한 활약을 펼치다 다저스로 온 최희섭은 극심한 마음고생에 시달린다. 중량감 면에서 캐로스와 비교할 수 없는 숀 그린과 플래툰을 해야 했기 때문. 2001년 49홈런을 치기도 한 그린은 최희섭보다는 분명 한수 위의 타자였다. 천만 다행으로 숀 그린이 애리조나로 가면서 최희섭은 주전 1루수로 자리잡을 기회를 얻었는데, 트레이시 감독은 최희섭의 좌투수 대처능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결국 최희섭은 올메도 세인즈와 플래툰을 해야 하는 신세에 놓였다. 세인즈는 통산타율이 270이 안되고, 홈런을 가장 많이 친 게 99년의 11개라는 데서 보듯, 숀 그린은 물론 캐로스보다도 못한 타자, 최희섭이 주전 1루수를 따내는 건 시간문제인 듯 보였다. 하지만 최희섭은 초반에 너무도 못했다. 3-4게임마다 하나씩 안타를 쳤다. 타율은 1할대를 넘나들었다. 최희섭을 플래툰으로 계속 기용해 주는 게 고마웠을 정도. 반면에 세인즈는 지나치게 잘했다. 타수가 좀 적긴 해도 4월을 마친 그의 타율은 .355, 4월 막판에 4안타를 치며 2할을 겨우 넘긴 최희섭과 여러 모로 비교가 되었다.


딱 한번 2할대로 내려간 걸 제외하면 세인즈는 시즌 내내 3할대를 지키고 있고, 영양가 있는 홈런도 곧잘 쳐냈다. 그가 중요한 챤스에서 홈런이나 안타를 칠 때마다 내 한숨은 늘어만 갔다. 그의 타율은 현재 .303, 최희섭보다 6푼 이상 높다. 또한 최희섭보다 타석 수가 40개나 적음에도 타점은 더 많다는 점(세인즈 32, 최희섭 31), 그리고 자신의 역대 최다 홈런이 11개인 선수가 지금까지 7개의 홈런을 쳤다는 것은 올해 그의 페이스가 심상치 않음을 보여준다. 오늘 기사에도 나왔지만 클러치 상황에서 최희섭의 타율이 .161에 불과하며, 3연타석 홈런을 치던 날에도 경기 막판 찾아온 1사 1, 2루 찬스에서 특급좌완도 아닌 멀홀랜드에게 삼진을 당하는 장면은 세인즈와의 플래툰이 시즌내내 계속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심어준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거다. 세인즈가 진작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줬다면 다른 팀에 가서 주전 자리를 차지했지 않았겠느냐. 좌완 전문이라 해도 3할타자를 썩혀둘 팀은 별로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평소 못하다가 최희섭이랑 경쟁하는 상황이 되니까 갑자기 잘하는 건가. 제발 인간이 되자. 평소에 잘해야지, 남이 잘되는 꼴을 못봐주겠어서 젖먹던 힘까지 내는 건 옳은 길이 아니다. 천천히 가려다 막상 추월하려면 갑자기 악셀레이터를 밟는 운전자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캐로스나 세인즈를 난 이해할 수 없다.


* 참고로 난 벨트레가 FA 계약을 앞둔 작년에 48개의 홈런을 친 것에 대해 비난하지 않는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고, 더 중요한 건 그게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지 남에게 딴지를 거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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