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의 시선 - 우리 산문 다시 읽고 새로 쓰다
송혁기 지음 / 와이즈베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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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각 꼭지는 짤막한 '새 글'과 그 글의 모태가 된 '옛글', 그리고 그에 대한 보충설명 및 원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새 글이 옛글에 기댄 모양은 일률적이지 않다. 옛글을 요약하거나 풀어 쓰며 오늘의 문제에 적용해본 글도 있고, 옛글의 특정 부분을 확장하거나 초점을 달리해서 쓴 글도 있다. 새 글과 옛글 사이의 겹침과 균열 혹은 긴장을 발견하고 나름의 해석에 이르는 길은 독자의 몫으로 열려 있다. - '머리말' 중에서

 

 

고전 읽기를 통해 새로운 시선을 갖자

 

저자 송혁기는 고려대학교에서 한문학을 전공, 동교 대학원에서 17세기 말 18세기 초의 산문 이론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문학비평 및 산문 작품을 주로 연구하고 있으며, 한문 고전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오늘의 언어로 나누는 영역으로 글쓰기를 확장하고 있다.


그는 <송혁기의 책상물림〉이라는 칼럼을 3년째 <경향신문>에 연재하고 있고,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고전 강의를 통해 인문학의 사회적 확산에 작은 힘을 보태고 있다. 저서 또는 역서로 <조선 후기 한문 산문의 이론과 비평>, <나를 찾아가는 길: 혜환 이용휴 산문선>, <농암집: 조선의 학술과 문화를 평하다> 등이 있다. 이밖에도 <한국 한문학의 이론: 산문>, <깊고 넓게 읽는 고전문학교육론>, <한국 고전문학 작품론> 등 고전문학을 소개하는 여러 기획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이 책은 총 4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장(새로운 시야)에서는 기존의 익숙한 것도 다르게 바라봄으로써 새로운 통찰과 시각을 얻을 수 있는 내용을 담았다. 느리게 사는 즐거움과 묘미, 아름다움을 보는 새로운 시각, 근심과 즐거움에 관한 선조들의 번뜩이는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2장(성찰과 배움)에서는 참된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데 필요한 반성과 자녀 교육, 삶의 이치를 꿰뚫는 지혜를 맛볼 수 있다.

 

이어서 3장(삶, 사람, 사랑)에서는 삶의 희로애락을 대하는 옛사람들의 인간적인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작품들을 한데 묶었다.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는 대신 오히려 즐기는 모습에 미소를 짓다가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아버지와 남편의 애절한 절규 대목에는 코끝이 찡하다. 마지막으로 4장(세상을 향해)에서는 과거를 통해 오늘의 거울로 삼을 수 있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주제의 글을 담았다. 인재를 널리 구하지 않는 세태를 한탄한 허균의 '유재론遺才論', 조선의 사회적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 '있을 수 없는 나라'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의 문제가 비단 오늘의 문제만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느림의 즐거움

 

누구나 그렇다.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빠르게만 보려한다면 세심하게 관찰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쉽다. 그래서 오히려 천천히 감상해야 이것이 갖고 있는 미묘함까지 다 볼 수 있는 법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호시우행虎視牛行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해서 이를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비록 말馬은 빠르고 소牛는 느리게 걷지만 말이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말馬을 타고 넓은 초원을 내달리는 인디언 체로키족은 한참을 달리다가 왔던 길을 되돌아간다고 한다. 이는 너무 빨리 달리면 자신의 혼魂이 미처 몸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정신과 육체가 보조를 맞출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우리 선인先人들의 일상을 담은 풍경화 속에도 소 등에 비스듬히 누워 풀피리를 부는 그런 목가적인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왜 그럴까? 이는 뭔가를 천천히 음미하기 위함이다. 밝은 달이 하늘에 있으면 높은 산 너른 물이 위아래로 하나의 빛깔로 보여, 올려보아도 굽어보아도 끝이 없을 것이다. 만사를 뜬구름같이 여기고 휘파람을 청풍淸風에 날리며 소걸음에 그냥 내맡겨두고 혼자 술병 기울이면 가슴이 툭 트여 그 즐거움에 절로 취할 것이다. 사사로운 일에 얽매인 사람이 어찌 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근심과 즐거움

 

조선 영조 때 홍계희란 인물이 있었다. 62살을 맞은 어느 해 봄에 그는 이조판서로 발령받았지만 이를 사양, 여러 번에 걸친 왕의 부름에도 결코 응하지 않았기에 결국 영조는 인사발령을 취소했다고 한다. 지금은 고위 공직자의 인사청문회 때 온갖 결함이 있음에도 벼슬이 좋아서 이를 변명하거나 심지어 문제가 되는 일을 조작까지 서슴치 않는다. 과거와 현재의 사람은 왜 이렇게 처신이 다를까?   

 

우리의 기쁨은 대개 무언가 바라던 것을 손에 얻었을 때 주어지지만, 문제는 그 기쁨이 지속되지 못하는 데 있다. 얻기 전에는 없어서는 안 될 것처럼 노심초사 근심하던 대상임에도, 막상 내 것이 되고 보면 그 기쁨도 잠시뿐, 마치 원래부터 나에게 있던 것처럼 당연시한다. 그러고는 점차 그것이 없는 삶이란 애초에 불가능하기라도 한 것처럼 잃어버릴까봐 전전긍긍 근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즐거워하며 뜻을 펼칠 수 있는 경지에 오른다면 벼슬의 유무에 따라 기쁨과 근심이 바뀔 일도 없겠지만, 이런 경지에 오르기란 쉽지 않다. 앞서 소개한 홍계희란 인물은 소인들과는 다른 제3의 길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좋아하는 글을 읽으며 거문고, 바둑판, 술 병을 자신의 곁에 두고서 늙어가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가진 것의 기쁨을 모르는 소인들이 배워야 할 삶의 자세이다.

 

 

크고 작음에 대하여

 

18세기의 대표적 작가 심익운(1734~1782?)은 그의 집안이 당쟁에 연루되어 평생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래서 일찌기 그는 올곧은 성격과 몰락한 집안 환경이 오버랩되면서 스스로를 두더지에 비유하며 지속적으로 자신의 문장을 갈고닦아 그만의 독특한 작품 세계를 형성했다. 그의 대소설大小說에는 뱀이 등장한다.

 

역사적으로 뱀은 사악한 동물이다. 이브를 유혹해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써 에덴 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만든 악惡의 상징이 바로 뱀이다. 사실 인간은 인류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DNA 때문에 뱀을 만나면 두려움에 저절로 몸을 움추리게 된다고 한다. 그 정도로 뱀은 악한 짐승인데, 큰 뱀은 악함도 크고 작은 뱀은 악함도 작을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큰 것은 크다는 이유로 죽임을 면하고 작은 것은 작다는 이유로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고 심익운은 장탄식을 한다.

 

이런 일이 어찌 뱀에게만 해당될까? 사람도 엄청나게 악한 자는 그 큼으로 인해 힘을 지니게 되니, 작게 악한 자만 죽임을 당한다. 지금 이 사회에 몰아치고 있는 '미투' 운동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지도자급의 악한 인물에게 속절없이 치욕을 당했던 사람은 그동안 이를 고백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치부를 감추려고만 했다. 이 사실이 외부로 밝혀지는 순간 자신에게만 해가 되는 그런 사회 분위기 탓이었을 것이다.

 

반면에 선善에 관해서는 이와는 반대다. 정말로 엄청 크게 선한 자는 알려지지 않고 오히려 작게 선한 자만 알려진다. 그러니 크게 충성스러운 자는 상을 받지 못하고 작게 충성스러운 자만 상을 받으며, 크게 현명한 자는 등용되지 못하고 작게 현명한 자만 등용된다. 이것이 선과 악, 크고 작음의 행복과 불행이 아니겠는가?

 

 

 

 

다양한 삶을 음미한다

 

시공간을 뛰어넘어 우리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는 24편의 고전(한문 산문)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온다. 옛날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어떠하냐고 말이다. 그 옛날의 산문을 읽고 또 읽다보면 우리들의 삶이 과거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느낌이 든다. 나만 그런걸까? 여러 사람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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