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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라시 한국사 - 아는 역사도 다시 보는 한국사 반전 야사
김재완 지음 / 쌤앤파커스 / 2018년 2월
평점 :
남녀노소, 상하좌우, 친문반문까지 생생하게 즐길 수 있는 맛깔난 '진퉁' 한국사 이야기. 승리자, 지배자, 남자 중심의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난 비범하고 유쾌한 역사 이야기 한 마당이 펼쳐진다. 실력으로 기득권 사회를 이끌었던 여성들, 패배자로 기록되었지만 정의로써 시대정신을 이끌었던 영웅들, 모두가 외면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시대를 헌신한 의인들, 그리고 한낱 '백성'이라고 표현하지만, 오늘날의 우리를 지탱할 수 있게 만든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 - '책 소개글' 중에서
관점을 바꾸면 '다른' 역사가 보이고,
관심을 가지면 '진짜' 역사가 보인다!
흔히 역사는 승자勝者의 기록이라고 말한다.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던 인조가 폐위를 당한 광해군에 관해 좋은 이야기를 쓸 수 있도록 허許했을까, 백제 사직의 마지막을 장식한 의자왕은 어린 시절 '해동의 증자曾子'로 불리었고, 신라에 속해 있던 30여 성을 탈취할 정도로 국력을 자랑하며 성군聖君으로 칭송받았지만 백마강에 뛰어든 낙화암의 삼천궁녀들의 이미지로 인해 음란과 향락의 아이콘으로 비춰진다. 이처럼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생생하게 이를 목격하지 않은 이상 역사에 기록된 내용들을 온전히 팩트로 믿어도 될까?
책의 저자 김재완은 '회사에 다니기 싫어서' 생전처음 써본 역사 이야기가 〈딴지일보〉에 인기리에 연재되면서 '덕후몰이' 중이다. 2016년 1월, 새해 첫 출근 날부터 회사에서 좌천통보를 받고 강제로 새 인생 출발선에 놓이자 그해 5월 제주 자전거 일주 여행기를 시작으로 겁도 없이 역사 글을 쓰기로 결심해, 우연히 가입한 재테크 카페에 역사 이야기를 올리며 독자의 반응을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이 글을 본 독자가 올린 "온라인 판 설민석의 재림"이라는 칭찬에 도취되어 '오늘의 유머'에 글을 투척했으며, 올리는 족족 '베오베(베스트 오브 베스트 게시글)'로 선정되었다. 이듬해 2월 용기를 얻는 그는 책 출간을 결심했다. 아이폰 하나로 '집구석'에서 녹음한 '찌라시 한국사'도 비슷한 시점에 시작해, 팟빵 역사 분야 베스트에 오르는 등 청취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이에 힘입어 16년 차 회사원의 퇴사 프로젝트를 본격 가동 중이다.
그는 역사 이면에 감춰진 수많은 흔적들, 이에 대한 진면목을 과거가 아닌 '내일의 관점'에서 흥미진진한 필체로 풀어낸다. <딴지일보>, <오마이뉴스> 등을 통한 인기에 힘입어 양반 사회를 조롱했던 마당놀이의 이야기꾼 초랭이가 되어 '한국사'라는 맛깔난 마당극을 펼친다. 자부심 가득한 역동의 고구려에서 슬픈 망국의 구한말까지,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고 너무 어렵게만 바라봤던 '역사'를 마치 한 편의 드라마로 엮어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
18살의 어린 나이에 고구려 19대 왕으로 취임한 광개토대왕은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한 정복 군주였다. 대부분 수성守城, 즉 지키는 기록이 주류인 우리의 역사에 이처럼 강력한 공격적인 경영을 감행한 군주가 있어서 통쾌하기도 하다.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대왕이란 칭호를 부여받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그는 대왕이라 불리게 되었을까?
이는 바로 그가 민생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즉 정복전쟁이 고구려 백성들의 윤택한 삶을 위해서 취해진 조치였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염鹽, 백百, 쇠鐵'이라는 세 가지 공적을 내세운다. 첫째, 염鹽은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염수鹽水'라는 두 글자에서 역사적 의미를 찾는다. 대왕의 정복전쟁은 소금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의 소금값은 가히 금값에 견줄 정도였으며, 기근에 시달리는 고구려 백성들의 민생을 위해선 경제 활성화가 가장 시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소금을 채취한다는 요하강 상류에 위치한 시라무렌강江은 내몽고 자치구를 따라 380킬로미터 정도 이어져 흐른다. 이곳은 거란족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광개토대왕은 철갑으로 중무장한 기병을 앞세워 소위 '소금전쟁'에서 승리하고 만다. 요하강을 기점으로 동쪽을 요동, 서쪽을 요서로 구분하는데, 우리 역사에 요동 정벌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이 시대에는 이곳이 중국 등과 고구려가 요동 쟁탈을 위해 자주 부딪혔던 전략적 요충지였던 셈이다.
둘째, 백百, 즉 백제와의 전쟁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백제는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면 형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왕 주몽의 아들 비류와 온조가 세운 나라가 백제이기 때문에. 아무튼 지금의 임진강을 경계로 삼아 두 나라는 대치하고 있었는데, 자주 전투를 벌였다. 저자는 광개토대왕비에 새겨진 '백잔百殘'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긴다. 고구려인들이 백제인을 낮춰 부르는 말이 백잔이다.
광개토대왕의 즉위 2년째 되던 해(393년 음력 8월)에 백제 17대왕 아신왕(재위 392~405년)이 1만 명의 군사로 고구려를 공격하자 전황 보고를 받은 대왕은 수군을 이끌고 육해상으로 백제를 공격해 아신왕의 무릎을 꿇렸다. 고구려의 신하가 되겠다고 항복의 예를 갖추었지만 아신왕은 왜倭에 밀사를 파견해 '차도살인借刀殺人' 작전을 펼쳤다. 왜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약소국인 신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신라 내물왕은 광개토대왕에게 지원을 요청, 이에 대왕은 5만여 명의 군사를 파견해 백제, 왜 연합군을 소탕하고 말았다. 이 역사적 사실이 바로 광개토왕비에 44자의 한자어로 새겨져 있는데, 이중 세 글자가 지워져 있다. 학계에선 일제가 고의적으로 이를 훼손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백제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감추려고 편리하게 일본사를 조작했을 정도였으니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겠다. 그래서 지금도 위안부는 자발적인 행동이었다고 주장하는 작가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난 더 이상 읽지 않는다. 역사를 부인하는 작가는 작가가 아니기 때문에.
셋째, 철鐵은 무기를 만드는데 가장 필요한 금속이었다. 당시 요동지방은 철광석의 보고였다. 지금도 노천에 철광석 덩어리가 있다고 한다. 이곳을 장악하고 있던 후연後淵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대왕은 이참에 무기를 만드는데 꼭 필요한 철광석을 손에 넣기 위해 아예 연나라를 공격해 요동을 탈환하기로 결정, 마침내 후연을 제압했다.
이괄의 난
1623년, 광해군을 왕위에서 끌어내라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인조다. 이를 인조반정이라고 한다. 통상 반정이 성공하려면 여기에 동참하는 인물들이 많아야 한다. 당연히 군부의 핵심 세력이 예외일리 없다. 1622년, 이괄은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발령받아 송별 모임을 할 때 자신보다 여섯 살 연상인 신경유 장군으로부터 반정 참여를 권유받는다. 반정이 성공하면 출세길이 보장된다는 말에 결국 뒤늦게 반정에 합류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인조반정 당일인 1623년 4월 11일 밤 10시에 반정군은 홍제원에 모두 집결해 있었다. 그런데, 총지휘를 맡은 김유가 도착을 하지 않고 눈치를 살피고 있자 반정 내부에선 전격적으로 이괄을 공격 대장으로 추대했다. 이에 재정비를 마치고 이괄이 궁으로 공격을 감행하려는 순간, 김유가 갑자기 나타나 설사 증세 때문에 지각했다고 변명했다. 이괄은 김유의 목을 베려했지만 오랫동안 반정에 참여했던 이귀의 중재로 병력 통솔권을 다시 김유에게 넘겼다. 우여곡절 끝에 반정은 성공했다.
이후 반정공신들이 모두 모여 파티를 벌였는데, 김유와 이귀는 상석上席에 자리잡고 이괄은 그 아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공신도 등급이 있기 마련이므로 직감적으로 1등 공신이 어렵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의 인조반정 당일 기록에 따르면 "어제의 공적은 이괄의 힘이 많았으니 마땅히 그를 병조판서로 삼아야 한다"라고 적혀있음에도 말이다.
예감은 적중했다. 이괄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지방으로 발령을 받았다. 이괄이 화가 날 것이 뻔하지라 인조는 이괄이 부임지로 떠나는 날 직접 배웅했다고 기록에 나온다. 그것도 명나라 사신을 대접하는 모화관에서 말이다. 후금後金이 지금 기세 충천인지라 국방의 막중한 책임을 맡을 사람이기에 그리 한 것이지 절대 좌천 발령이 아니라고 달랬을 것이다. 빠른 시일에 다시 불러 들이겠다는 첨언과 함께.
1624년 3월 6일(음력 1월 17일), 충격적인 소식이 조정으로부터 전해졌다. 한양에서 금부도사가 이괄의 외동아들을 압송하기 위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괄이 역모를 도모하고 있다는 고변이 있어서라는 거다. 이처럼 이괄 스스로 난을 일으키려고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게 아니라 반정에 참여했던 정치적 정적들이 이괄에게 난을 일으키도록 부추긴 꼴이었다. 한양에서 명을 받고 내려온 자들은 모두 목이 달아나고 이괄 수하의 군사들은 한양으로 말을 몰았다. 이들의 목적은 오직 한양의 궁을 공격하는 것이기에 도중에서 관군과의 충돌을 최대한 피하고 길을 재촉했다.
마침내 이괄의 쿠데타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고, 이에 대비한 대책회의가 열렸다. 정적들은 괜히 벌집을 쑤신 꼴이 되었지만 이괄의 병력만으로는 개성을 통과하기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하지만 이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괄의 군은 1월 24일(음력) 영변에서 출발하여 산악 오솔길 등을 따라 진군했기에 2월 9일에 한양에 입성했다. 물론 인조는 이미 피난을 가고 한양엔 없었다.
한편, 인조는 피난을 떠나면서 명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거대한 군사 병력이 일으킨 쿠데타도 아니고, 이괄을 제거하려고 자신들이 판 무덤에 들어왔음에도 명명에 진압 지원군을 요청한 셈이다. 정말 별꼴이다. 심지어 임진왜란이 끝난 지 30년이 채 안 됐는데 왜관에 거주하고 있던 왜병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고 한다. 능력이 안 되면 오르지 말아야 할 자리가 바로 왕위인데, 왜놈들에게 우리 땅이 유린된 지 얼마나 지났다고 군사를 요청하는지 무뇌無腦의 군주가 아닌가 말이다!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
조선 선조 4년(1571년),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이라는 시詩가 조선 문단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시의 주인공이 여덟 살밖에 안 되는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허엽의 딸 허초희,즉 허난설헌이 쓴 시로 밝혀지면서 이 천재 시인에게 혀를 내둘렀다. 더구나 조선은 남자 위주의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어린 여자아이의 작품이라고 하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오명제라는 학자가 신라부터 조선까지 100여 편의 아름다운 한국 시를 엮어 중국에서 출판을 했다. 당연히 여기에 오늘의 주인공인 허초희의 시도 포함되었다. 이 책이 중국 대륙에 허난설헌 한류 열풍의 기폭제가 될 줄을 누가 알았겠어. 허초희는 허난설헌의 본명이다. 허균은 대륙의 사신을 접대하던 중 누이 허난설헌의 폭발적 인기를 실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기, 허균님아! 우리 사람 당신 누나 시 너무 사랑한다 해! 제발 당신 누나 글 좀 더 구해달라 해. 금은보화 필요 없다 해. 돈과 미인은 우리나라가 더 많다 해.” “아? 그러하오?” “지금 우리 사신단 완전 피곤하다 해. 중국 문단에서 억만금을 주고라도 당신 누나 책 구해오라 해서 완전 피곤하다 해. 지금 출간된 책들이나 미발표작도 다 구해달라 해"
이렇게 허균은 <난설헌집蘭雪軒集>을 중국 사신들에게 전해주었고, 이는 곧 대륙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것이다. 중국 대륙의 베스트셀러인데 일본도 그 영향을 비켜갈 리가 있겠는가? 일본 열도 역시 허초희 아니, 허난설헌의 시라는 쓰나미를 당연히 맞게 되었다.
기록의 이면을 읽어야 진정한 역사 공부가 된다
책은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에서 시작해서 정정화 애국지사의 이야기까지 총 35편이 이어진다. 역사 시험에서 고득점을 노리려면 당연히 임진왜란이 일어난 연도나 조선 왕의 계보를 달달 외워야 한다. 하지만 왜 임진왜란이 발생했는지, 당파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등을 파악해야 진짜 역사 공부를 한 것이다. 이 책이 바로 이런 점을 우리들에게 여실히 보여준다. 마치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재미있게 펼쳐낸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정치에 무관심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룬 자들에게 지배받는 것이다"
- 플라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