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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박스 - 컨테이너는 어떻게 세계 경제를 바꾸었는가
마크 레빈슨 지음, 이경식 옮김 / 청림출판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한국도 배에 싣는 컨테이너 덕분에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되었다. 첫째, 컨테이너화는 한국이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 무역하는 시간과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주었다.
컨테이너화가 한국 경제에 기여한 두 번째 부분은, 컨테이너화 덕분에 한국의 산업은 컨테이너선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제품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국이 가난에서 벗어나 세계의 무역 강국으로 우뚝 선 것도 이 '박스'가 빚어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수많은 결과 중의 하나이다.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
컨테이너 박스가 한국 경제를
변화시키다
책의 저자 마크
레빈슨은 경제학자 겸 저널리스트로, <뉴스위크> 경제 및 비즈니스 분야 선임기자, <이코노미스트> 금융 및
경제학 담당 편집자, <저널 오브 커머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 <포린
어페어스>, <포린 폴리시> 등 저명한 저널에 경영 전략, 경제학, 경제사에 관한 글을 기고해 격찬을 받았다.
또한 한국에서 국제무역을 주제로
강연과 집필 활동을 하기도 했다. 경제학 및 금융 분야의 저서로는 <자유시장을 넘어>, <로널드 레이건 이후>,
<이코노미스트 가이드: 금융시장> 등이 있다. 컨테이너를 받아들이면서
수출 강국이 된 한국 경제에도 관심이 많으며, 대표 저서인 이 책은 컨테이너가 세계 경제를 어떻게 바꾸고 세계화를 앞당겼는지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책은 우리들이 박스의 역사를 따라가게 만든다. 부두노동자, 항구, 기업, 도시, 국가,
전 세계에 영향을 주며 종횡무진 일주하는 박스, 즉 컨테이너를 통해 세계 경제사를 관통하며 혁신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는다. 지금은 너무나
흔한, 단순한 운송 도구인 컨테이너는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컨테이너의 도입은 운송 시간의 단축은 물론이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운송비를 절감했다.
좋은 기능이 있는 반면 부두의 수많은 노동자의 일자리를 없애기도 했다.
당연히 부두노동자들은 가장 먼저 투쟁에 나섰다. 그들은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때로는 파업을, 때로는 협상에 나서며 컨테이너화를 상대로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럼에도 항구들은 컨테이너선 유치에 열을 올리며 점점 더 많은 자본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갈수록 낮아지는 운송비 때문에
해운사와 선적인들 사이의 다툼도 치열해졌다. 해운사들은 담합으로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 했고, 선적인들 역시 협회 소속이 아닌 해운사와 거래하는
방식으로 이에 맞섰다.
우리들은 컨테이너 박스를
둘러싼 일자리 경쟁, 기업과 시장의 변화, 그리고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히는 모습을 통해, 혁신이 세상에 영향을 주는 과정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다. 또한 이미 눈앞에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이라는 엄청난 혁신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컨테이너 박스가 새로운
세상을 만들다
1956년 4월 26일, 크레인이
뉴저지주 뉴어크항에 정박한 낡은 유조선 아이디얼엑스호에 알루미늄 소재로 된 트럭 바디 58개를 실었다. 5일 후 배는 휴스턴항에 도착햇다.
그곳에서 대기하던 58대의 트럭은 금속 상자를 하나씩 나눠 싣고 목적지로 향했다. 마침내 운송 혁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금속 상자를 실은 거대한 트레일러트럭이 고속도로를 점령했다.
1956년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아니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기지만 그때는 캔자스의 소비자가 동네 가게에서 브라질산 신발을 사거나 멕시코산 진공청소기를 사는 것은 전혀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일본인 가족은 미국 와이오밍의 축산업자가 기른 소에서 나온 쇠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프랑스의 패션 디자이너들은 자기가 디자인한 옷을
터키나 베트남에서 생산하지도 않았다. 컨테이너가 나타나기 전에는 운송비용이 비쌌다. 지구의 절반을 도는 비용은 고사하고 미국 땅의 절반을
운송하는 비용도 엄두를 내지 못했다.
컨테이너는 알루미늄이나 강철을 용접하고 굵은 못인 리벳으로 이어 바닥을 나무로 깔고 한
면에 문 두 개를 단 직육면체 상자에 불과했다. 컨테이너는 적은 비용을 들이면서 동시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해 상품을 어디에서든,
그리고 어디까지든 운송하는 고도로 자동화된 시스템의 핵심이다.
트럭운송업자 말콤
맥린
트럭 기사 말콤 맥린은
45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페이엣빌역에서 주유소까지 기름을 운송하고 5달러를 받겠다고 나섰다. 그러자 주유소 사장은 그에게 녹슨 채 마당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트레일러를 사용하라고 내주었다. 1934년 3월, 비로소 맥린트럭이 만들어졌던 것이다. 그는 트럭의 사장이면서 주유소 운영을
맡아서 일했다.
운송비 절감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던 그는 1953년
말 트럭이 진입해 트레일러를 배에 실을 수 있더럭 특수하게 설계된 해상운송 터미널을 짓자고 제안했다. 꽉 막힌 연안 고속도로로 트럭이 운행하기
보다는 배에다 트럭 트레일러를 싣고 대서양 연안을 왕복하면 되겠다는 창의적인 발상을 한 것이다.
말콤 맥린의 통찰은 현대사회에서는 상식이지만 1950년대에는 매우 급진적이었다. 이
통찰은 운송 산업의 본질은 배를 항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물을 이동시키는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덕분에 맥린은 예전과 전혀 다른 컨테이너화라는
발상을 할 수 있었다. 상품의 운송비용을 줄이려면 단지 금속으로 만든 상자만 필요한 게 아니라 화물 처리 전반을 새롭게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뉴욕항에서 벌어진
전쟁
1955년 기준으로 뉴욕항의 뉴저지 쪽 부두와 뉴욕 쪽 부두를 오가는 바지선은 950만
톤 조금 못 미치는 ㅁ화물을 운송하고 있었다. 그러나 뉴욕시가 1천만 달러를 들여 새로운 바지선 터미널을 만든 후인 1960년에는 그 화물량의
1/3이 감소했고, 하향 추세가 지속되고 있었다. 부두를 새로 짓는 일만으로는 뉴욕시를 예전과 같은 상업의 중심지로 돌릴 수 없음은 이미
분명해졌다. 그리고 뉴욕시의 공무원들이 인식하지 못했던 컨테이너가 드디어 뉴욕시가 누운 관 뚜껑에 마지막 못질을 할
참이었다.
컨테이너화에 따른 운송비 감소 요인은 제조업에 영향을 미쳤다. 공장들이 뉴욕시를
빠져나오는 바람에 공장 근로자뿐만 아니라 관련 운송 분야의 일자리까지 사라졌다. 사실 컨테이너가 널리 사용되기 전인 1950년대 중반부터
뉴욕시의 공장 근로자 수는 감소하기 시작했만 여전히 1960년때가지는 공장이 대세였다. 그런데, 공장의 수가 1967년까지 정체하더니 감소하기
시작했다. 컨테이너가 직접적인 원인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제조업에 영향을 준 것만은 틀림없다.
컨테이너화가 뉴욕시 안에서 공장을 운영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유들 중 하나를 없애버렸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컨테이너화로 상품 운송 과정이 쉬워졌기 때문이다. 뉴욕시의 지리적 입지는 해외시장은 물론, 국내의 먼 곳에 있는
시장에 팔 상품을 만드는 공장들에게 싼 운송비라는 매력을 오랫동안 보여줬다. 항구에 가까이 있는 공장은 내륙에 있는 공장보다 제품을 훨씬 쉽게
그리고 값싸게 배에 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컨테이너화가 이런 지정학적 이점을 뒤엎었다.
노동조합의
투쟁
"지난 세월 우리는 산업 자동화라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대부분 우리가 기울인 노력은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이는 식이었으며 새로운 작업장을 장악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습니다"
ILWU는 태평양 연안의 거의 모든 항구를 장악했다. 이 지역의 부도노동자는 ILWU의
조합원이었다. 그리고 각 배의 화물 처리를 감독하는 이동반장 역시 ILWU의 조합원이었다. 부두노동자 조합들이 자동화를 상대로 끈질기게
저항함으로써 비록 노동자의 일자리가 없어질지라도 노동자도 마땅히 인간적인 처우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이
세워졌다.
컨테이너의 국제적 표준
확정
1965년만 하더라도 컨테이너의 형태와 크기가 지나칠 정도로 다양했다. 결국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는 표준 사이즈가 확정되었다. 컨테이너 임대업체들은 확신을 가지고 컨테이너에 대규모 투자를 하며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이내 전체
해운사들이 소유한 것보다 더 많은 컨테이너를 보유했다. 여전히 35피트 컨테이너를 사용하던 시랜드서비스와 24피트 컨테이너를 조금씩 줄여가던
맷슨내비게이션을 제외하면 전 세계의 거의 모든 해운사가 호환되는 컨테이너를 사용하고 있었다.
미국의 캔자스시티에서 화물을 담은 컨테이너가 그 어떤 트럭이나 기차에 실려서 항구까지
가고 또 여기에서 그 어떤 배에 실려서 말레이시아의 쿠알라룸푸르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운송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바야흐로
국제적인 컨테이너 운송이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세계 경제를
연결하다
컨테이너 운송이 도입되기 전에는 사람이 일일이 짐을 옮겼기 때문에 엄청난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커다란 박스에 많은 물건을 넣어 옮기는 방법이 시간과 노동력을 줄여준 건 당연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만으로 세계시장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을까? 박스가 세계를 바꾼 핵심은 바로 '표준화'에
있다.
결국, 표준화를 통해 국제무역은 발전하고 세계시장은 넓어졌다. 혁신의 도구도 방법도
너무나 단순했다. 그러나 이러한 단순함이 쌓여 세계 경제를 연결하는 거대한 변화가 만들어졌다. 이처럼 세계 경제를 연결한 건 인터넷도, 정치도
아닌 '박스'였다. 4차 산업혁명이 도래하면 어떻게 변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