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놓다 - 길 위의 러브 레터
전여옥 지음 / 독서광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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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아닌데, 여기는 아닌데. 너, 전여옥. 남의 인생을 사는 거 아니니?" 지난 십여 년 남짓 여의도에 있을 때 내가 끊임없이 했던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 <사랑을, 놓다>이다. 그 아버지처럼, 이제 나는 모든 사사로운 세상의 고정 관념을 편하게 놓을 수 있다. 그 과정은 나의 여행이었다. 길을 떠난 여행이기도 했고 삶 자체의 긴 여행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여행은 많이 걷는 것이다. 그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니었다. 그리고 동행도, 즉 사람도 아니었다. 오로지 '편한 신발' 한 켤레면 족했다. - '길 위의 당신께 보내는 러브 레터' 중에서

 

 

전여옥이 띄우는 러브 레터

 

이 책은 정치계를 자발적으로 은퇴한 전여옥이 만난 사람과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로 마치 그녀의 인생 지도를 보는 것과도 같다. 도쿄의 아카사카에서 긴자, 아오모리까지, 중국 리장에서 홍콩, 방콕, 앙코르와트, 미국 뉴욕에서 뉴저지, 그리고 터키 이스탄불에서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에 이르는 여정에 함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녀는 2012년 6월, 여의도, 즉 정치판을 떠났다. 과거 역사를 돌이켜 보면 섬은 유배지였다. 비로소 그녀는 '여의도'라는 유배지에서의 참으로 고되고 힘든 생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이 됨으로써 여의도 시절을 회상하며 다시는 귀양살이를 하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이젠 '개인의 삶'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에 그녀를 오래 봐왔다는 한 시인이 이렇게 말했다.

 
"나뭇가지에 긁히고 돌부리에 넘어지고 상처투성이가 되어 마침내 돌아왔어요. 댓돌 위에 놓인 하얀 고무신-아, 내가 진짜 집에 왔구나 하고 안도할 거예요"

 

그녀의 에세이는 '여행은 첫사랑이다', '긴자에서 작업당하다', '일단 꽂히면 "렛츠 고"', '그 남자의 키친', '사랑을, 잡다' 등 총 다섯 파트로 구성되었는데, 살면서 놓아버린 사람과 놓고 온 풍경 사이에서 '사랑', '자유', '용기', '꿈', '선택', '열정' 등의 자기 실험을 완성해 가는 그 여정은 오히려 편안해 보인다.

 

 

 

 

 

여행은 첫사랑

 

하나뿐인 아들의 사춘기는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기엔 버거웠다. 서재 구석에 있던 여행 가방이 그녀에게 '데려가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마침 그때 지인으로부터 카톡이 날라왔다. 홍콩에 출장가서 리츠 칼튼에 묵고 있다는 거다. 이에 그녀는 즉답을 날렸다. "가도 됨?", 바로 답장이 도달햇다. "물론이죠"

 

닭 쫓던 개 같은 표정을 짓는 열아홉 살의 아들에게 멋진 복수를 한 셈이다. 비행기 티켓도 십 분만에 확보, 짐 챙기의 달인답게 평소 지고 다니는 백 팩에 짐을 다 꾸리고 갑자기 일이 생겨 홍콩으로 출장가니 아들도 이젠 어른이니 알아서 잘 하라고 회심의 일타를 날리며 집을 나선다. 약이 바짝 오른 아들의 표정의 그녀의 기쁨을 배가시킨다.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출국까진 아직 여유가 있길래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켜놓고 홍콩의 먹거리를 머리에 떠올리며 비로소 여행 간다는 실감을 느낀다. '우선 취화翠華(홍콩 센트럴 맛집)에 가서 밀크티와 파인 애플 번을 먹고, 룽킨힌龍景軒(포시즌스 호텔에 있는 광둥식 레스토랑)에 가서 딤섬을 먹고, 저녁에는 완차이灣仔 골목에 있는 그 국숫집에서 비둘기 경단이 들어 있는 국수를 먹어야지'

 

여행은 새로운 곳이다. 때론 '처음'의 흥분도 있다. 처음 본 남자, 처음 걷는 거리, 처음 가본 호텔, 처음 맛보는 음식 등등, 이 모든 것은 다 첫사랑이다. 뇌과학자는 여행자의 뇌는 치매를 모른다고 말한다. 왜 그럴까? 새로움을 찾아 떠나는 여행은 우리들의 뇌를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훗날 아들이 그녀에게 왜 그렇게 여행을 많이 다녔다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치매에 걸리지 않으려고, 엄마가 그렇게 되면 네가 고생이잖니?

널 위해서 여행을 많이 다닌 거란다" 

 

 

사랑을, 놓다

 

스트로베리, 즉 새빨간 딸기를 떠올리면 예전에 그녀가 자주 가던 아카사카에 있는 술집이 생각난다. 이곳은 당시 그녀가 도쿄 특파원으로 재직할 때 일본 라디오 방송의 친구가 소개한 장소였다. 일본의 아카사카는 고급 술집이나 요정이 몰려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틈새도 있다. 서서 먹는 우동집과 가기 만만한 술집 등도 있다.

 

그녀가 도쿄에 살던 무렵엔 TBS를 비롯한 몇몇 방송과 신문 통신사들이 아카사카 언저리에 위치했는데, 호주머니가 가벼운 언론인들이 편하게 자주 들릴 수 있는 작은 술집들이 골목 모퉁이에 숨어 있었다. 스트로베리도 바로 그런 술집이었다. 이 가게엔 다른 곳에 다 있는 가라오케가 없었다. 말수가 적은 술집 여주인은 손님들이 이갸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원했기에 그리 한 것이다.

 

이 가게의 음식은 맛있었다. 전형적인 일본의 가정식이 나왔다. 특히, '토마토 샐러드'는 정말 맛있었다. 가금 소금에 절인 오이와 삶은 당근이 들어간 감자 샐러드도 나왔고, 우엉이나 연근 등 건강에 좋은 뿌리채소를 삶은 채소조림도 특별했다. 또 일본의 대표적 집반찬인 니쿠자가(소고기 감자조림)도 딱 간이 맞아 밥 한 그릇 곁들이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평소 인사만 나누는 사이였을 뿐인데, 어느 날 여주인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왔다. 지금 가게가 너무 조용하니 놀러 오겠냐?는 것이었다. 마침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나 홀로지내기가 다소 익숙하지 않던 때라서 오히려 즐거운 마음에 냉큼 가방을 챙겨 들고 사무실을 나서 술집 스트로베리로 향했다.

 

도착했더니 여주인은 아예 가게 문에 '클로즈'라는 팻말을 붙이고 맥주를 권했다. 바싹 튀긴 일본식 닭고기 튀김, 우엉과 마카로니를 마요네즈에 무친 샐러드를 안주로 내놓았다. 전번에 가게에 들렀을 때 맛있게 먹던 모습을 봤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두 사람 간에 진지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여주인은 글 쓰는 남자와 연애를 했는데, 남자는 작가 지망생인 대학생이었고 갓 고교를 졸업한 여주인은 당시 집이 너무 가난해 대학교 앞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책을 좋아하던 두 사람의 만남이 사랑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헤어진후 여주인은 평범한 남자를 만나 결혼했는데, 박복한 탓에 남편의 병사로 과부가 되고 말았다.

 

하루는 십오년 만에 우연히 옛 애인 그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대학교수로 재직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과거의 풋풋하고 뜨거웠던 사랑이 이젠 은은하고 따뜻한 사랑으로 변했지만 결국엔 다시 헤어져야만 했다. 그 남자도 괴로웠는지 유럽에 교환교수로 떠나게 되자 이후 서로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는 사연이었다.

 

왜 오늘 전화했냐는 질문에 여주인은 '전상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며, 이 도쿄로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기에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고 얘기 해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라고 솔직히 대답했다. 그날 술자리와 대화는 자정을 넘겨 마지막 지하철이 끊길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금은 이 가게가 문을 닫았다. 여주인은 어디에 있을까? 지금도 아카사카에 가면 그 때가 생각난다.

 

 

여행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작업이다

 

여행이란 지금 당장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내려놓게 만든다. 더구나 여행자로 살아가는 순간이야말로 익명성이 보장되는 절정의 순간인 셈이다. 그리고 덩달아 나 자신조차도 내려놓을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다. 마침내 삶의 존재 이유인 자유, 호기심, 도전 등의 단어가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찬바람이 불어오기 전에, 찜해 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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