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를 위한 사기 - 미래를 준비하는 당신에게 권하는 인간학의 고전
사마천 지음, 김원중 엮음 / 휴머니스트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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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역사가이자 탁월한 문장가인 사마천이 궁형宮刑의 치욕을 견뎌 내고 자신의 혼을 담아 써낸 <사기史記>는 삶을 살아가는 지혜와 통찰이 깊이 밴 고전이다. '사기'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역사에 대한 기록을 뜻하는데 우리에게는 사기 가운데에서도 백미로 평가받는 <열전>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 '머리말' 중에서

 

 

73편의 명장면 이야기

 

동양의 명품 고전인 <사기>는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어 아들 사마천이 집필한 역사서다. 이 책은 중국 고대 전설상의 제왕 황제黃帝 시대부터 사마천 본인이 당시 살았던 한무제漢武帝 때까지 2천여 년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주나라의 붕괴 후 수많은 제후국 50개 중 마지막까지 존재했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진秦, 한韓, 위魏, 제齊, 초楚, 연燕, 조趙 등의 흥망성쇠 과정이 당시의 왕과 제후, 그리고 신하들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어서 한 편의 인간 파노라마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2천여 년 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당시의 문화, 제도, 가치관 등이 현대의 그것과는 분명 많은 차이가 있을텐데, 지금을 살고 있는 현대인들, 특히 새로운 세대들에게 과연 얼마나 중요할지 의심이 들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역사란 소위 '승자의 전유물'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더구나 저자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와 그 이전의 시기는 주로 전시戰時 상황이었다. 따라서 뭔가 혁혁한 전공을 세우지 않는 인물은 지배자의 눈 밖에 나기 일수였고, 심하면 죽음을 당하거나 사마천처럼 치욕적인 성기 절제라는 형벌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는 사관들에게 당연히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기록 자체가 승자를 위한 전시물이 되기 쉬웠다.

 

하지만 사마천은 달랐다. 그는 승자의 일만 기록하지 않았다. 즉 4천여 명의 등장인물들을 다루면서 성공과 실패 모두를 아우르고 양쪽 경계선을 넘나들면서 그 속에서 삶의 지혜를 발견해 후대인들에게 이를 전한다는 사실이 바로 보석처럼 빛나는 명품 고전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어, 타인의 가랑이 사이를 기어가는 치욕을 당하면서도 때를 기다린 한신, 화장실의 쥐와 곡간의 쥐가 행하는 행동을 보고서 삶의 이치를 깨달은 이사 등이 그러하다.

 

또한, 가문의 막강한 배경과 뛰어난 스펙을 갖춘 초나라의 항우는 얼마든지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인물임에도 실패의 순간을 뛰어넘지 못하고 자살로 젊은 나이를 마감하는 안타까운 장면은 수많은 실패자들에게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인지 그 길을 밝혀주는 지혜의 등불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인간사에 거듭 반복되는 희노애락의 상황을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야 하는지 교훈을 주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이겨내는 게 진정한 용기

 

이는 회음후 열전에 실린 내용이다. 회음후淮陰侯는 대장군 한신韓信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는 평민 시절 가난한 데다 방종한 인물이어서 타인의 추천만으로 관리가 될 수가 없었다. 또 장사를 해서 살아갈 능력도 없어서 항상 남을 따라다니며 먹고살았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 대부분 그를 싫어했다.

 

일찌기 그는 마을의 우두머리인 정장亭長의 집에서 수차례 얻어 먹은 일이 있었다. 여러 달이 지나자 정장의 아내는 새벽에 밥을 지어 이불 속에서 먹어 치우고는 한신이 식사 시간에 맞춰 와도 밥을 차려 주지 않았다. 이후 한신은 화가 나서 그 집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또 무명 빨래를 하던 한 아낙이 굶주린 한신이 하도 딱해서 빨래 작업이 끝날 때까지 수십 일 동안 밥을 준 일이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한신은 나중에 은혜에 보답하겠다고 하자, 그 아낙은 사내가 스스로 먹고살 능력이 없는 게 너무 가여워 그랬을 뿐 보답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했을 정도로 한심한 인물이었다.

 

이런 일화도 있다. 같은 마을에 사는 한 젊은이는 한신을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비록 키는 커서 칼을 잘도 차고 다니지만 마음속으로는 겁쟁이일 것이다"라고 말하며 "죽일 수 있으면 나를 찌르고, 죽일 수 없으면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 나가라"고 모욕적인 언사를 내뱉었다. 그럼에도 한신은 몸을 구부려 결국 가랑이 밑으로 기어 나왔다. 이 일을 목격한 시장 사람들은 모두 한신을 겁쟁이라고 비웃었다.

 

사실 이런 치욕을 견디는 자가 살아남을 기회를 잡는 법이다. 회사도 그렇다. 호기롭게 사직서를 던지는 사람이 처음엔 대단해 보일지 몰라도 나중을 보면 비록 진급이 늦더라도 끝까지 회사에서 버틴 사람이 더욱 성공하는 사례들이 더 많다. 한신도 그랬다. 묵묵히 자신의 실력을 길러 나중엔 크게 출세를 해서 가랑이 밑을 기도록 했던 자에게 벼슬을 주고, 빨래하던 아낙에게 보상도 했다. 이것으로 한신의 삶이 끝났다면 해피엔딩일 것이다. 그렇지 못했다.

 

대장군으로 임명된 한신은 대군을 이끌고 동북방을 원정,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평정했다. 한편, 유방은 동남쪽에 있던 제나라까지 군사력으로 정벌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어, 역이기를 사신으로 보내 투항을 권유하도록 했다. 마침내 역이기는 설득에 성공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신은 군대를 쉬게 하려 했다. 이때 모사 괴통이 한신을 부추겼다.

수만 대군을 이끌고 힘든 전투로 조나라 50여 성을 겨우 얻었는데 역이기가 세 치 혀로 제나라 70여 성을 얻는 알을 가만히 보고 앉았을 수 있냐고 말이다. 이에 한신은 제나라를 향해 '닥치고 공격'에 나섰다. 그러자 제나라 왕은 역이기를 솥에 삶아죽이고 도망쳐 항우의 원조를 청했다. 결과적으로는 한신의 대성공이었다. 항우가 보낸 20만 대군을 격파하고 제나라를 취했기 때문이다.

이후가 문제였다. 한신은 유방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을 제나라 왕에 책봉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이유는 제나라 영토는 항우와 직접 마주치는 곳이라 불안한 제나라 백성의 민심을 안정시키려면 임시로 왕假王으로 책봉해야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항우군의 포위에 둘러싸여 난처한 지경이었던 유방은 한신의 이런 요청에 화가 났지만 측근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진짜 왕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나중에 유방은 순시를 명목으로 한신의 땅에 도착해 영접나온 한신을 즉각 체포해 역모를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워 기름에 삶아 죽이라는 형벌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고사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토끼 사냥이 끝나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는다는 뜻인데, 자신의 분수를 넘은 한신이 이런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유방을 도와 큰 공을 세운 공신이지만 이를 두고 사마천은 "한신의 한계였고 비극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쥐 두 마리를 보고 인생 지혜를 터득하다

 

이는 이사 열전에 실린 내용이다. 초나라 사람인 이사는 진시황을 만나 진나라의 통일 대업을 이루는 데 큰 공을 세워 재상까지 지낸 인물이다. 그가 젊었을 때의 일이다. 하급 관리로 지내던 시절 관청의 화장실에 거주하는 쥐들은 더러운 것을 먹다가 사람이나 개가 가까이 가면 놀라서 무서워 하는 꼴을 목격했다. 반면에 곡식 창고에 사는 쥐들은 사람이나 개를 전혀 겁내지 않고 편안하게 곡식을 파먹고 있었다.

 

"사람이 어질다거나 못났가고 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이런 쥐와 같아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 달렸을 뿐이구나"

 

이런 깨달음을 얻는 그는 즉시 관직을 버리고 순자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제왕의 기술을 배웠다. 공부를 마친 그는 고국인 초나라의 왕은 섬길 만한 인물이 못 되고, 여섯 나라는 모두 약소국인지라 진나라로 향했다. 당시 진나라의 실력자 여불위에게 신임을 얻은 후 진나라 왕에게 유세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 게으름을 피우고 서둘러 이루지 않으면 제후들이 다시 강대해져서 서로 모여 합종하기로 약속할 테고, 그렇게 되면 황제黃帝 같은 현명한 왕이 있을지라도 천하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나라 왕은 곧 이사를 궁궐의 일을 총괄하는 우두머리 관리로 삼고 이사의 계책을 듣고 은밀히 황금과 주옥으로 제후들에게 유세하도록 했다. 뇌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에게는 많은 선물을 보내 결탁하고, 말을 고분히 듣지 않는 사람은 예리한 칼로 찔러 죽였다. 또 군주와 신하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략을 사용했다.

 

 

권토중래捲土重來

 

힘은 산을 뽑을 수 있고 기개는 세상을 덮을 만한데,

때가 불리하여 추가 나아가지 않는구나.

추가 나아가지 않으니 어찌해야 하는가!

우여, 우여, 그대를 어찌해야 하는가!

 

이는 항우 본기에 실린 내용으로, 밤에 한나라 군대가 사방을 포위해 초나라 노래를 부르자 크게 놀란 항우가 비분강개한 나머지 시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고 알려진 것이다. 여기서 란 항우가 타고 다니던 준마의 이름이요, 란 바로 늘 함께 있었던 절세미인 우 미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한 밤에 한나라의 군대가 초나라 진영으로 불렀다는 노래는 지루한 전쟁에 지친 초나라 군대에게 귀향 본능을 불러 일으킨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이를 '사면초가四面楚歌'라고 한다. 팔년 동안 칠십여 차례의 싸움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던 항우는 명문가의 후예로 실력 하나 만큼은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아무리 짓밟혀도 끈질긴 생명력을 보이는 잡초 같은 유방을 이겨내지 못했다.

 

생과 사라는 갈림길에 필연적으로 놓이는 전쟁에서 최선의 방책은 바로 '생의 추구'일 것이다. 하지만 명문가의 후손답게 정도正道만을 고집하던 항우에게 비겁한 항복과 도망이란 그에게 너무나도 큰 치욕이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부하들에게 장수란 이런 것임을 보여주는 최후의 죽음을 택했다. 사실 대장부란 때로는 치욕을 견뎌낼 수 있어야 빛나는 성공을 맛볼 수 있는 법이다. 항의 죽음은 정말 안타깝다. 시대가 진정한 영웅을 버리고 간교한 인물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후대의 시인들은 항우가 권토중래를 도모하지 않은 것을 너무나도 아쉬워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인데 말이다.

 

이기고 지는 것은 전쟁에서 기약할 수 없는데

치욕을 안고 견디는 것이 사나이다.

강동의 자제들 중에는 인재가 많으니

흙을 말아 올려 다시 오는 날을 알지 못한다.

 

-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제오강정題烏江亭>

 

 

<사기>는 인간학의 고전이다

 

중국사에 대한 기본 지식이 없는 초심자가 <사기>를 읽기란 결코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은 매 편마다 김원중 교수의 <해설〉을 덧붙였기에 큰 도움이 된다. 73편의 명장면 속에 등장하는 합종연횡合從連衡, 와신상담臥薪嘗膽, 사면초가四面楚歌, 권토중래捲土重來, 토사구팽兎死狗烹 등의 고사성어 유래를 배울 수 있는 덤까지 얻을 수 있다. 일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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