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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예술을 사랑한 위대한 어머니 ㅣ 역사를 바꾼 인물들 11
황혜진 지음, 원유미 그림 / 보물창고 / 2017년 2월
평점 :
신사임당은 여성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던 조선시대에 태어나,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숨긴 채 집 안에 갇려 살아야 했습니다. 높은 벼슬에 오를수도 없었고, 남편과 자식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자신의 삶을 마음껏 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가지 전해지는 신사임당의 그림과 시와 글씨에는 진한 감동과 울림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 '글쓴이의 말' 중에서
이 시대의 우리들이 배워야 할 신사임당의 열정
신사임당, 그녀는 남성 중심의 조선 시대에 태어나 어릴
적부터 글공부와 그림 그리기에 소질을 보였지만, 서당에서의 정식 교육 대신 집안에서 살림에 필요한 것들만 배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만의 방법으로 꾸준히 그림과 글을 훈련하며 재능을 갈고 닦았다. 나아가 그녀의 재능과 열정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까지 물려져서 역사상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위대한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 이씨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난 인선(신사임당)은 일찌기 생원이었던 외할아버지 이사온의 글지도로 <천자문千字文>을 모두 깨우치고
<사자소학四字小學>마저 쉽게 독파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이런 영특함을 보면서 외할아버지는 아들이 아닌 점이 못내 아쉬워 했다고
한다.
흔히 결혼한 여성을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결혼한 여인은 친정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풍습이 흔했다. 이 풍습은 조선
때에도 어느 정도 영향이 남아 있었다. 사임당이 어린 시절을 와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결혼 풍습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남편 이원수와 결혼한 사임당이 결혼한
이후에도 친정에 머물 수 있었기에 그녀의 뛰어난 예술적 감각을 펼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에 시댁에서 시부모를 모셔야 하는 그런
평범한 아낙네였다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그런 창작 활동이 아마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남편이 아내 사임당의 그런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펼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이 신사임당의 탄생 이유가 아닐까 싶다.
외할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다
인선은 글공부, 그림 그리기,
바느질하기 등도 좋았지만, 밖에 나가서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다. 산과 들로 놀러 나가고도 싶었고, 사내아이들처럼 글공부를 하러 서당에
가고도 싶었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여자가 집 밖에 함부로 나갈 수 없었고, 바깥에 나갈 일이 있을 때는 장옷이나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려야
했다. 또 '남녀칠세부동석'이라고 하여 남성과 여성을 어렸을 때부터 구별함으로써 함께 어울려 놀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여자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교육을 받는 대신 집 안에서 살림에 필요한 것들을 배워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관습이 오히려 그녀의
재능을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녀의 서당은 외할아버지가 거처하는 방이었고, 그녀가 뛰어놀 수 있는 바깥 세상은
오죽烏竹, 즉 검은 대나무가 숲을 이룬 뒤뜰이었다. 여기서 만나는 꽃, 나무, 풀, 새, 곤충 등은 그녀의 훌륭한
벗이었다. 신사임당의 유명한 조충도鳥蟲圖도 이런 배경 하에 탄생할 수 있었다.
안견의
<몽유도원도>, 사임당의 그림 선생이 되다
어릴 적 사임당의 아버지 신명화는
한양에서 살았다. 사임당의 어머니 이씨 부인은 친정어머니의 병환을 치료할 목적으로 시댁을 떠나 친정인 강릉에 거주했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두 번
정도 신명화는 아내와 아이들을 보기 위해 강릉을 찾았다. 한번은 그림 그리기에 온통 정신이 팔려 아버지가 오는 줄로 모르는 사임당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땅바닥에 그린 그림은 사마귀였다. 정말 잘 그렸다. 딸의 뛰어난 재주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양으로 다시 올라가야 할 날이
다가오자 신명화는 사임당에게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그려보도록 했다. 이는 외할아버지 방에 걸려 있던 것인데, 안평 대군이 신선이
사는 아름답고 신비한 도원을 여행하는 꿈을 꾸고 나서, 최고의 산수화가인 안견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어 그리게 한 그림이었다. 딸 사임당에게
붓과 종이를 건네주고 그는 곁에서 조용히 먹을 갈았다.
"아, 아버지. 역시 대가의 그림이라 그런지 따라 그리는 것조차
어렵습니다"
"아니다, 아니야.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하구나.
허허허! 아주 잘 그렸다"
치마폭에 포도를
그리다
사임당은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먹을
갈고 붓을 들었다. 사임당의 붓이 치마폭 위를 지날 때마다 사람들은 감탄을 쏟아 냈다. 사람들은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이 광경을 입을 쩍
벌리고 서서 구경했다. 어느새 음식 자국이 남아 지저분하던 치마폭 위에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탱글탱글한 포도송이가 달린 포도 덩굴이 뻗어
있었다.
시어머니를 봉양하다
현룡(율곡 이이)이 여섯 살 때, 한양의 시어머니 홍씨 부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나이가 들어 살림하기가 어려우니 돌아와서 며느리 노릇을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그녀는 여전히 병환 중인 친정어머니를 떠나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간의 시어머니 배려를 생각하면 바로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대관령을 넘어 한양으로 향했다. 이때 남긴 시 한
수를 살펴보자.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 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이후 사임당은 상경한 다음 해에 막내아들 우를 낳았다. 서른아홉의 노산 탓에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한양 생활이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가난한 형편이라 하인 한 명 없이 집안의 대소사를 홀로 처리해야만 했다. 남편 이원수는
다정다감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며 음주를 즐기는 사람이라 집안은 아예 돌보지 않았다. 그녀의 건강은 더욱 나빠져갔다. 남편은 아침에 나가 저녁이
다 되어서야 귀가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나름대로 벼슬을 구걸하려고 당시 우의정인 당숙집을 뻔질나게 들락거렸다. 이에 남편의 행동이 몹시 걱정이
되어 한 마디 한다. 착한 심성의 남편도 이를 감사하게 수용한다.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권력을
얻는다면 그 힘은 결코 오래가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눈앞의 벼슬에 눈이 멀어 큰
실수를 할 뻔 했소. 부인의 말이 맞소"
율곡의 장원급제, 남편의 벼슬
현룡이 열세 살이 되던 해, 아이로는 유일하게 과거장에 들어섰다. 정성껏 쓴 답안은 장원 급제자로 발표되었다. 소문이
삽시간에 온 마을로 전해졌다. 한편, 과거에서 번번히 낙방해 벼술자리에 오르지도 못한 남편 이원수는 어린 아들의 급제가 기특하고도
뿌듯했다. 2년 후, 이런 남편에게도 희소식이 생겼다.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된 것이다. 이는 지방에서 한양으로 세곡을 실어 오는
일이었다. 이때가 사임당은 마흔일곱, 이원수는 쉰살이었다.
두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남편과 아들이 함께 떠나자 집은 너무나도 적막했다. 그녀의 건강은 날로 안좋아졌다.
그녀는 자리에 누워 꼼짝 못하고 앓은 지 사흘리 지났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그녀는 딸을 불렀다. 곁에는 매창이 간호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모두 호출하라고 일렀다.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기고 그녀는 어두운 밤으로 빠져들었다. 마른여덟의 나이였다. 일곱 명의 아이들을 모두
어질고 똑똑하게 키움으로써 그녀는 후세 어머니의 롤모델이 되었다.
"항상 겸손하고, 옳지 않은 길은 쳐다보지도 말고 가지도 말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