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 감정
원재훈 지음 / 박하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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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엽이 불에 잘 타는 이유는 물기가 메말라버렸기 때문이다. 신록과 녹음의 시절이 지나 이젠 나도 건조해져서 어디서건 떨어져버릴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 하지만 불을 지피는 마음은 예민한 감정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니 달팽이가 지나간 촉촉한 자리 같기도 하다. 땀과 눈물의 세월 탓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사유를 확장해 나가니 밤하늘에 별이 빛나거나 파도가 바위에 포말 치는 이유도 다 하늘의 어둠과 바다의 고통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누구라도 청춘의 상처는 있다

 

작가 원재훈은 1988년 가을 <세계의 문학>에서 시詩 <공룡 시대>로 등단하여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론 <낙타의 사랑>, <그리운102>,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하네>, <딸기> 등을, 소설로는 <만남, 은어와 보낸 하루>, <미트라>, <모닝커피>, <바다와 커피>, <망치> 등을, 산문집으론 <나무들은 그리움의 간격으로 서 있다>, <꿈길까지도 함께 가는 가족>, <내 인생의 밥상>,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는 여행>, <

 

'상처 없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는 프랑스 시인 아르튀르 랭보의 말처럼, 누구라도 청춘의 상처는 있을 것이다. 젊은이나 늙은이나 연애 감정을 잘 간직하고 산다면 인생이 덜 비참할 것이라는 게 작가가 생각한 연애 감정의 속살이다. 피부와 달리 속살은 만지면 아프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다고 추억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피부가 벗겨진 살처럼 추하고 더럽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때 품었던 감정은 더 어려운 인생을 살면서 용기를 주는 순수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 청춘의 피부 위에 우리는 미당 서정주 시인의 푸른 꽃과 붉은 꽃을 문지르면서 살아온 것이다.

 

붉은 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붉은 피가 돌아오고,
푸른 꽃으로 가슴을 문지르면 푸른 숨이 돌아오는 그런 세상을
이제 우리는 볼 수 있을까요?

 

 

 

 

 

80년대 대학 시절, 여학생 후배들은 남학생 선배들에게 오빠라고 부르는 대신 주로 '형'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서문의 대학 후배 황보나영은 그에게 '오빠'라고 불렀다. 이 둘의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비록 만나는 기간이 짧았지만 둘의 '연애 감정'은 오히려 매우 길었다. 소설은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주인공 앞으로 걸려온 나영의 전화 한 통으로 시작된다.

 

글 쓰는 솜씨가 탁월했던 서문은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이미 신춘문예에 당선할 정도였다. 고교 시절 문예반이었던 그는 문예반 선배의 연인이자 3살 연상인 원소미에게 연정을 품는다. 그래서 대학 선택도 그녀가 다니는 대학을 택했다. 교정에서 만나기 위해. 이처럼 그에겐 사랑에 관한 한 바람기가 있었다. 1979년 3월, 대학 신문사에서 신입생인 그를 인터뷰하면서 앞으로 대학 생활을 어떻게 보내겠냐고 묻자, 그는 거침없이 이렇게 답했다.

 

"한 여자를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의 첫사랑인 소미 선배에 이끌려 찾아간 학교 앞 미미 카페는 주간 다방, 야간 주점이라는 영업 방식으로 운영 중인 곳이었다. 따라 들어간 다방은 담배인지 대마초인지 분간할 수 없는 연기로 자욱했다. 주인장 미미는 예술 전문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배우를 준비 중인 소미의 친구였다. 턴테이블은 이정선의 '섬소년'과 김정미의 '봄'을 뱉어내고, 이곳에서 섬 소년으로 불린 그는 대마초를 처음 경험한다.

 

책상 위엔 러시아 인형 마트료시카가 있다. 이 인형은 그 속에 또 다른 작은 인형들이 숨어 있다. 나영의 전화를 받은 서문은 마치 작은 인형을 꺼내는 것처럼 지나간 사랑의 발자취들을 더듬어 간다. 그의 사무실은 천보 플라자 빌딩 502호다. 한번은 사무실에 찍힌 발자국을 보고 무단침입자가 있다고 관리인과 대판 싸움을 벌인 후 그의 이름은 502호가 되어 버렸다. 사실 그 발자국은 자신의 발자국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발자국을 남긴다.

 

나영은 두 여자 사이에 있었다. 그녀는 마치 육지와 바다의 가운데 위치한 섬과 같았다. 이렇게 작가는 연애 감정을 청춘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으로 비유한다. 나영에게서 오랫만에 전화가 걸려온 사실을 가장 친한 대학 친구 종혁에게 전했더니 현재의 나영은 초기 암 환자라고 말해주었다.

 

나영은 서문의 대학 동창 남궁민과 결혼했지만 이혼했으며 둘 사이에 낳은 딸은 현재 의사이고, 전 남편은 대학 재단이사장의 딸과 재혼해 그 학교 교수이자 평론가로 잘 나가는 편이었다. 한편 민과 대학 시절 앙숙 사이였던 종혁은 현재 신문사 논설위원으로 종교 분야 기사를 쓰는 기자로 활동 중이다.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 나영은 백사장에 찍힌 새 발자국을 늑대 발자국이라고 우겼던 그 섬의 이름을 전화로 물어왔던 것이다. 사실 이 섬의 이름을 그녀는 알고 있었지만 과연 선배 서문도 이를 알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이 섬은 군산에서 배를 타고 한참 들어간 격렬비열도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섬이자 철새들의 천국인 '어청도'였다.

 

다시 서문의 첫 사랑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사실 소미는 그의 문예반 선배 고도찬의 애인이었다. 고교 시절 선배는 '고도'라는 필명을 가진 재능이 뛰어난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문예반 후배들은 모두 그를 마치 교주처럼 추종했다. 서문이 문예반장을 맡고 있을 때 그는 소미를 데리고 학교에 오곤 했다. 당시 서문은 소미를 통해 대학 생활에 대한 이야기와 불교 사상에 관심을 가지라는 조언을 들었다.

 

그 선배는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기웃거리는 바람둥이 스타일로 서문을 좋아하는 경자를 취하고 말았다. 경자는 고교 때 문학의 밤 행사를 준비하면서 만난 여자 친구였는데, 당시 그 선배는 경자를 눈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는 선배에게서 빌린 이상 시집을 돌려주려고 선배 방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깜짝 놀라 당황해하는 경자를 보고 말았다. 이런 얘기를 들은 소미는 "에이. 나쁜 개새끼"라고 혼잣말을 했다.

 

이후 몇 달이 지나 경자의 자살 소식을 같은 교회에 다니던 고교 동창으로부터 들었다. 경자의 자살 사건 이후로 고도찬은 아예 행방을 감추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고도찬의 집안은 부유한 가문이었다. 당시 경찰은 사실상 고도찬에 의한 살인을 고의적으로 자살로 은폐햇던 사건이었다. 이 일이 발생한 이후 소미는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불가에 귀의하고 말았다.

 

 

"고향에서 올라온 오빠예요"

 

주인집 할머니가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자 그녀는 이렇게 대처했다. 나영은 이집에 자취방을 얻어 살고 있었다. 하지만 산전수전 다 겪은 노인은 이 말을 전적으로 믿지 않는 듯했다. 칠순을 넘긴 이 할머니는 같은 고향 분으로 그녀의 집안을 훤히 알고 있었고, 그녀의 부모들과도 안부를 묻고 있는 사이였다. 그녀는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나 춘천에서 성장했다.

 

"이 방에 남학생을 데리고 온 거 처음이거든요"

"그래,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기를 바란다"

 

그녀의 아버지는 평생 시골 고둥학교 국어 선생님으로 재직하면서 검소하게 살았던 분이다. 가끔 그녀를 데리고 갔던 강원도 홍천의 두타산에서 실족사했다. 그녀의 손을 늘 따뜻하게 잡아주던 아버지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지만 이젠 대신 손을 잡아줄 사람이 생긴 것이다. 이에 대해 그녀는 자신의 에세이에 '아버지의 산에 함께 가고 싶은 사람이 생겼다"고 글을 남겼다.  

 

주인공 서문은 첫사랑 소미 누나가 생각치도 않았던 승려가 되고, 여자 친구의 죽음이 가져온 혼란스러움을 잊고자 하필 광주로의 여행을 떠났다. 5월의 광주, 그는 그곳에서 지옥을 보았다. 그의 다리에는 깊게 길게 패인 상처가 있다. 대학생활의 휴학과 스스로에게 절필을 선언하고 다른 분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선택은 동물 생태학이었다. 마음을 추수려 복학하고 새로 신입한 후배로 나영을 만나 호감을 갖게 되어 어느 봄날 섬 여행을 함께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둘은 서로의 연애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문학도인 나영은 에세이를 쓰고 싶어 했다. 이에 서문은 그녀에게 수필의 제목('연애 감정'인 듯 함)을 하나 주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라고 권했다. 이후 그녀는 봄 날이 가기 전에 한 편의 에세이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그녀가 그토록 사랑했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둘의 사랑은 그렇게 깊어 갔다.

 

청춘을 새를 닮았다. 한 곳에 갇혀 머무르기 보다는 자유롭게 날기를 원한다. 어청도를 함께 여행다녀 온 후 서문의 태도가 급변했다. 그 섬에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연상의 여화가와 눈이 맞았기 때문이다. 여화가는 그 섬의 등대지기로 근무하는 그의 삼촌이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영이 풋사과라면 화가는 농염한 붉은 사과였다. 비가 몹시 내리던 저녁 그는 여화가의 나신을 우연히 보게 되었고 이후 둘은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되었다. 결국 둘은 결혼했지만 임신한 아내는 교통사고로 죽고 만다. 멀어지는 서문으로 인한 그 공허한 마음을 채워준 이는 바로 전 남편 낭궁민이었다.

 

 

 어청도의 등대

 

 

섬은 연애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주인공 서문이 후배인 나영과 사랑의 꽃을 피운 곳도, 한순간에 타오른 욕정으로 화가였던 아내를 만난 곳도 모두 '어청도'라는 섬이다. 육지의 끝인 섬은 언제나 그 자리에서 육지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 마치 선뜻 마주하기는 어려운 연애의 상대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스스로의 발자국을 되짚어간 사람들만이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옛사랑의 추억을 떠올리고 싶은 사람들에게 여기에 모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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