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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대를 위한 롤모델 유일한 이야기 -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걸은 유일한의 도전하는 삶과 아름다운 나눔 ㅣ 꿈결 롤모델 시리즈 3
정혁준 지음 / 꿈결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무엇보다 유일한에게는 기업가 정신이 있었습니다. 기업가 정신으로 불리는 '앙트레프레너십'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은 '시도하다' 또는 '모험하다'는 뜻입니다. 기업가 정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나가는 것입니다. 창업정신의 다른 말이기도 합니다. -
정혁준
아름다운 나눔을 실천한 기업가
저자
정혁준은 <한겨레>기자로 디지털콘텐츠 팀장을 맡고 있다. <한겨레21>경제팀장,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수석연구원, 미국 조지아대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미국에서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글로벌 기업들이 신생 기업이었을 당시의
시장 진입 전략과 포지셔닝 전략을 분석했다. 이들이 찾은 셀링 포인트와 잠재 수요를 폭발시킨 마케팅 전략 역시
탐구했다.
그는 소설처럼 재미있고 술술 읽히는 경제경영 관련 책을 쓰고 싶어 한다. 기업에 관심이 많다. 기업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조직이라고 생각한다.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영 모델을 제시한 리더와 구성원의 자발적인 혁신으로 새로운 경영
모델을 만든 사례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그 기업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정신, 바로 기업가정신을 탐구하고 있다.
아홉 살에 떠난 미국
유학길
유일형의 인생은 아버지
유기연의 선택으로 완전히 달라졌다. 당시 사람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미국으로의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그것도
불과 아홉 살에 말이다. 오늘날에도 일가친척 없는 낯선 외국 땅에 어린 자식을 유학 보낸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백 년 전에
이런 일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당연히 아내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유기연이 어린 자식을 미국으로 보내려 한 까닭은
일형을 좀 더 큰 인물로 만들고 싶은 소망 때문이었다. 과거 통일신라시대에도 한 아버지는 천재 아들 최치원을 큰 사람으로 만들려고 머나 먼 중국
땅으로 유학을 보내지 않았던가. 당시 교회는 서구 문물을 전해주는 창구이자 개화파 지식인이 모이는 곳이었다. 이곳을 들락거리던 유기연은 조선보다
발전한 서양을 알게 되었고 세상의 변화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 가서 열심히 공부하거라.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돼 돌아와 나라를 위해 일해야
한다"
우렁찬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배는 바닷바람을 가르며 망망대해로 나아갔다. 손을 흔드는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작아져 간다. 소년 유일형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에서 공부하며 살아 나가야 한다. 미국은
어떤 나라일까? 나는 그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제물포항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유일형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조국의 마지막
공기가 그의 폐를 가득 채웠다.
탁월한 리더십을
키우다
일형은 네브라스카 주의 작은 마을 커니에 도착했다. 각각
이사벨과 엘리자베스라는 이름을 가진 푸른 눈의 터프트 자매가 그를 반겼다. 70세를 바라보는 터프트 부인은 과부로 마흔이 넘은 노처녀 셋과 함께
살고 있었다. 남자가 없는 집안이라 집 안팎의 잔일을 도맡아하고 자매 또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일형은 가족과 같은 유대감을
느끼며 자매의 가르침 덕분에 영어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되었다.
학교에서 미국 아이들은 일형의 이름을 'I will hang you(너를
죽여 버리겠어)'로 부르며 놀려 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이름을 모두
'한'자 돌림으로 바꿔 버렸다. 그가 고교 2학년을 마쳤을 때 터프트 가족은 텍사스로 이사갔지만 그 가족을
따라가지 않았다. 새로 머물게 된 곳은 이웃 도시인 헤어스팅스였다. 홀로서기를 시작한 덕분에 독립심과 리더십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 토론반에 들어간 유일한은 자신의 포부와
생각을 친구들에게 호소하는 데 탁월했다. 1914년 2월에는 헤이스팅스고등학교 토론반 대표로 다른 고등학교 팀과
경쟁하기도 했다. 게다가 육상 선수에 이어 미식축구 선수로 활동해 장학금도 받았다. 그는 "얼굴색이 노란 동양 출신 학생. 키는 작지만
날렵하고, 불같은 투지를 지닌 천재적인 선수. 앞으로 미국에서 최고의 선수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는 평을
받았다.
숙주나물 사업으로 백만장자가
되다
1916년, 21살의 유일한은 미시간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경영학을 공부하려고 상경대학을 선택했다. 당시 디트로이트에는 중국인이 많이 살고 있었다. 대륙횡단 철도 공사가 끝나자 일자리를 찾아 이곳으로 온
중국인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중국인의 마음을 읽은 그는 중국 향취가 나는 손수건이나 장식품을 구입해 판매하면서 짭잘한 수익을
거두었다.
대학에서 그는 중국인 여자 친구 호미리를 사귀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중국 광저우 출신으로 미국 서부철도 건설회사에서 간부직을 밑고 있었다. 그녀는 미시간대학 학부를 끝내고 의과대학에 진학하려고
아이비리그로 불리는 코넬대학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중앙철도회사에 회계사로
입사했다. 이때 그는 중국 음식과 관련한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찹수이라는 요리는 각종 야채와 고기를 한데 볶아 밥이나
국수 위에 앉어 먹는 음식이다. 중국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유일한은 중국인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찹수이를 지나쳐 보지
않았다. 그렇다고 찹수이를 만드는 요리 사업에 직접 뛰어들지는 않았다. 대신 그 요리에 들어가는 재료인 숙주나물을
눈여겨보았다. 중국인이 자주 먹는 만두를 만들 때도 숙주나물은 필수 재료였다.
캘리포니아에서 골드러쉬였을 때 가장 큰 돈을 번 사람은 금을 캐러 온 사람이 아니라
광부들에게 작업복을 만든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였다. 작업 환경 탓에 질긴 청바지를 선호했던 것이다. 마찬가지다. 찹수이의 경우에도 틈새 시장인
숙주나물 사업이 호황을 누리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숙주나물은 금방 쉰다. 신선해야 하고 적은 양으로는 요리에 사용할 수도 없다. 그는 연구 끝에
숙주나물 통조림을 개발해 대박을 터트렸다.
조국에서 사업을
시작하다
1925년, 유일한은 21년 만에 가족을 찾았다. 아버지가 환갑을
맞는 해였다. 그의 가족은 여전히 북간도에 살고 있었다. 현재 교제 중인 호미리와의 결혼을 승락받고 싶었다. 일본 나카사키에서 경성으로
오는 배를 탈 때부터 주위를 맴돌던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계 형사에게 반강제로 이끌려 취조까지 당하기도 했다.
20여 년 동안 영어를 사용해 온 유일한 더듬거리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아버지는 콩나물 장사를 한다는 아들이 못마땅했다. 숙주나물 통조림 사업이라고 설명을 해도 그게 그것 아니냐는 반응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던 긴 시간이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와 생각의 차이까지 크게 만들었다. 나이 서른의 아들에게 어머니가 결혼 얘기를 떠나자 이때다 싶어 호미리의
사진을 부모님 앞에 내밀었다.
"호미리라는 여자입니다. 미국에서 동양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소아과 의사가 될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동양인 여성이라는 말에 크게 반대하지 않고 결혼을 허락해
주었다. 미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결혼식을 올렸다. 그는 서른, 호미리는 스물아홉이었다. 유일한은 사업을 정리해 조극에서 일하고 싶다는 뜻을
아내에게 전했고 처음엔 충격을 받은 듯했으나 며칠 동안 고민한 끝에 그녀도 남편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는 교육보다 국민 건강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건강한 민족만이
나라를 되찾고 번영시킬 수 있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고 나라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국민이 건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좋은
의약품을 공급해야 한다'
'기업은 사회의
것'이다
"진통 효과를 내려면 어느 정도 마약
성분이 들어가야 하는데, 다른 회사에 비해 우리 제품은 너무 약한 편입니다. 우리 회사도 진통 효과를 높일 마약 성분을 넣는
게......."
"마약 장사를 하자고? 고작 한다는
말이 마약 장사라니 실망스럽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 회사를 시작했나? 병으로 고생하는 동포를 돕고 사회에 기여하기 위해 사업을 시작한 게
아닌가. 창업 정신을 저버리는 직원이라면 더는 같이 일할 수 없네. 사표를 쓰게"
그는 유한양행을 설립한 지 10여 년 만에 77 명의 사원을 거느린
회사로 성장시켜 만주, 중국, 일본 지역으로 판매망을 넓히고 대만과 베트남까지 시장을 확대해 나갔다. 그런데, 만주 출장에서 돌아온
전항섭 전무가 이렇게 만주 상황을 보고하자 그는 불같이 화를 냈다. 여기서 그의 철저한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즉 '기업은 사회의 것' 이라는 가치관을 가진 것이다.
대한상의 초대 회장을
맡다
맹호군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대일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미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이 전선에 참여하기 위해 설립한 비정규 군사 조직이었다.
1942년 8월 29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이들은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시내 한복판을 가로질러 시청으로 행진햇다. 유일한은 열병식에서 임정
요인이 보내온 축사를 낭독하는 등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해방 후 한국 정치 상황이 좌익과 우익으로 갈라져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기에 그는 홀로 귀국길에 올랐다. 1946년 7월이었다. 사장직에 복귀하며 유한양행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주변에선 미국
유학파라서 미군정 간부들과도 가까워 곧 정치에 나설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하지만 그는 결코흔들림 없이 기업 경영에만 몰두할
생각이었다.
한창 사업에 박차를 가할 무렵, 그는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대한상의에서
회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이 단체는 상공업 발전에 기여하고 상공인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일제강점기부터
경영을 해 론 인물은 대부분 친일 이력이 있어서 국민들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가 없으므로 그에게 부탁한 것이다. 거절했지만 끈질긴 부탁에 그는
결국 이를 수락했다.
그러자
누가 유한양행의 새로운 사장이 되는지에 관심이 쏠렸다. 그가 미국에 나가 있는 동안 동생 유명한이 회사를 이끌었으므로 가장 유력하다는
전망이었다. 하지만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유일한과 헤이스팅스 한인소년병학교 동기인 구영숙이 사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소아과 의사였다.
당시로서는 창업자와 친인척 관계가 아닌 사람에게 사장직을 맡긴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구영숙은 미국 에모리대학을 졸업한 의학박사로 경영 이력이 없었다. 유일한이 구영숙을 선택한 것은 그의 역량과 민족정신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이미 유일한은 오래전부터 구영숙을 지켜본 결과 성품이 곧고 강직하며 패기와 능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다
유일한의 유품은 일상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 몇 가지와 구두 두 켤레, 양복 세 벌이
전부였다. 유일한이 세상을 떠나고 한 달 뒤인 1971년 4월 8일, 그의 유언장이 세상에 공개됐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은 교육과
사회를 위해 써 달라. 딸 유재라에게는 묘지 주변 땅 5천 평을 주어 유한동산을 꾸미되 학생들이 마음대로 드나드도록 울타리를 치지 마라. 우리
학생들의 티 없이 맑은 정신에 깃든 젊은 의지를 죽어서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