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사회 - 타인의 공간에서 통제되는 행동과 언어들
김민섭 지음 / 와이즈베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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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다. 은밀하게 자리를 잡고 앉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 누구도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서 행동하고, 발화하고, 사유하지 못하게 한다. 모두를 자신의 욕망을 대리 수행하는 '대리인간'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주체라는 환상을 덧입힌다. 자신의 차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운전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것이다. - '프롤로그' 중에서

 

 

대리인간으로 살아오다

 

책의 저자 김민섭은 2015년 말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라는 첫 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이 대학에서 보낸 8년을 '유령의 시간'으로 규정지었다. 스스로를 대학의 구성원이자 주체로서 믿었지만 그 환상은 강요된 것이었고, 그는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면서 강의실과 연구실에만 존재했다. 강의하고 연구하고 행정 노동을 하는 동안 그는 사회적 안전망을 보장 받을 수 없었고 재직증명서 발급 대상조차 아니었다. 이후 대학에서 나온 그는 그 시간이 '대리의 시간'이었음을 알았다. 그리고 '대리운전'이라는 노동을 통해서 대학뿐만 아니라 이 사회가 하나의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임을 다시 확인했다.

 

이 책은 타인의 운전석이라는 가장 좁은 공간에서 바라본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마치 서로를 축소 내지는 확대해 놓은 것처럼 닮아 있는 공간이다. 저자는 이 운전석에서 세 가지의 '통제'를 경험했다. 그것은 바로 '행위', '말', '사유'의 통제를 말한다. 먼저 액셀과 브레이크를 밟고 깜빡이를 켜는 그런 단순한 조작 외엔 그 무엇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행위의 통제, 다음으로 차의 주인이 화제를 정하고 말을 건네면 그제서야 이에 화답하지만 대체로 묵묵히 운전만 하는 말의 통제, 마지막으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운전만 하는 사유의 통제 등을 가르킨다.

 

타인의 운전석은 한 개인의 주체성을 완벽하게 검열하고 통제한다. 비단 몸덩어리뿐 아니라 언어와 사유까지도 빼앗는다. 그렇다면 이 운전석을 벗어나면 자유로워지는 게 아닐까?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렇지 않다. 운전을 마치고 운전석에서 내려왔음에도 신체는 온전히 돌아오지 않고, 여전히 '대리'라는 단어에 함몰되어 있을 뿐이다. 한 마디로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나아가 이와같은 대리사회의 괴물은 그러한 통제에 익숙해진 대리인간을 원한다. 이에 익숙해진 우리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질문하는 법을 점치 잊어간다. 물론 우리들은 이런 통제에서 벗어나야 한다. 스스로의 틀을 만들고, 또한 스스로 자발적으로 사유해야 한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불편해하고, 의심하고, 질문해애 한다. 그래야만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순응하는 몸

 

타인의 운전석에서 내리며, 자기 자신의 신체를 되찾는다. 무엇보다 사유하고 행동할 자유를 되찾아 온다. 더 이상 상대방의 눈치를 보며 기계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이 반복되면서스스로는 조금씩 주체의 자리에서 이탈하는 데 익숙해져 갔다. 상대방이 말하는 대로 수용하고 긍정하는 간편한 대화의 방식, 말하자면 '순응'이 어느새 자연스럽게 몸에 각인된 것이다. 누군가 나를 주체로서 대우한다고 해도 익숙해진 몸을 되돌리기는 쉽지 않다. 그러면 어디에서든 주체로서 발화할 수 없게 된다. '순응하는 몸'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타인의 운전석과 다름없는 '을의 공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차의 주인과 대리기사와 같은 역설의 관계 역시 우리 주변 어디에나 있다. 직장에서, 학교에서, 가정에서, 그 어디에서, 주체의 욕망은 쉽게도 타인을 잡아먹는다. 예컨대 의사 결정권자는 언제나 자유롭게 회의 안건을 내고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 누구도 화답하기는 쉽지 않다. 이미 상상과 수용 가능한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모두가 안다.

 

거기에서 벗어나거나 반론을 내기라도 하면 곧 따가운 눈총이 쏟아진다. 소통은 주체가 된 이들의 논리를 확인하고 강요하는 수단이 된 지 오래다. 부하 직원은 직장 상사에게 아이디어를 내지 않고, 학생은 교사의 의도에서 벗어난 답을 제출하지 않는다. 아이 역시 부모 앞에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털어놓지 않는다. 자신이 주체가 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어린 시절 부모와의 관계부터 시작해 교사, 직장 상사와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을의 공간'에서 순응하는 방법을 주로 배워왔다. 그렇게 이 사회는 거대한 타인의 운전석이 되었다.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대리운전을 하던 시절, 한번은 밤 12시가 넘어 중년의 남녀를 태우고 치악산 언저리까지 갔다. 주변엔 몇 개의 모텔밖에 없었다. 그들이 함께 모텔로 들어가자 혼자서 산자락을 따라 하산하는 동안 두려움에 휩싸였다. 멧돼지라도 출현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도저히 불안해서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렀다. 배보다 배꼽이 컸다. 대리운전비보다 콜택시비가 더 많이 나온 것이다. 비싼 수업료를 납부한 셈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책상 앞에 앉았다. 자신을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그때 그는 고작 대리운전인데 그냥 몸으로 부딪히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는 가벼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거리에는 저마다의 문법이 있다.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어느 생태계에서든 살아남을 수 없다. 작년까지 논문을 쓰던 책상에서, 이제는 대리운전을 위한 공부를 시작했다. 논문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생존의 문제였다. '길을 잘 모르니까' 하는 것이 삶의 핑계가 될 수는 없었다.

 

새롭게 거리의 문법을 배우는 일은 즐겁다. 각각의 점이 선으로 연결되어 간다. 그것은 인접한 도시이기도 하고, 대중교통의 노선이기도 하고, 거기에는 어떠한 사람들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기도 하다. 그 점과 선을 다시 면으로 구성하고 나면 나름 대리기사로서의 기초문법을 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명을 외우고 막차 시간을 계산하는 데서 나아가 그 안의 '사람'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그들은 언제 어떻게 나가고 들어오는지, 그들의 도시는 어떻게 외부와 소통하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투쟁은 그러한 사유로도 확장된다. 그렇게 경험한 삶의 문법이 잠시 스쳐 지나가는 대리가 아닌 온전한 주체로서 내 몸에 남을 것을 믿는다.

 

 

 

가족은 서로를 위해 대리로 살아간다

 

어느 날 새벽 아내는 저자를 픽업하러 왔다. 당시 그는 1시간 정도 걸을 작정을 하고 있었는데, 와 줘서 정말 고마웠다. 아내의 말로는 아이는 잠들었고 남편이 늦게까지 귀가하지 않아 걱정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대리운전을 그만두면 안 되느냐고 물어왔다. 이에 어디서나 대리인생임을 자각했기에 이를 주제로 글을 쓰겠다고 말하며 그간 번 돈을 보여주었다. 아내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번 달에 받은 생활비가 이 돈이냐고 말했다. 귀가 후 맥주 한잔을 하면서 그날 번 돈을 모두 주었다. 차비가 너무 비싸다고 했더니 아내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날 이후 아내에게는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아이의 장난감을 사왔기에 저건 얼마야, 하고 묻자 "응 저건 대리를 두 번 뛰면 살 수 있어"라고 했다. 모든 물건을 살 때마다 1대리, 2대리, 하고 화폐의 단위처럼 생각한다고 했다. 그러면 정말 사야 할 물건만 사게 된다는 반응에 그는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를 고민했다. 하긴, 그러면 무엇도 쉽게 살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쩌면 가족은 끊임없이 서로를 위한 '대리'로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위해, 너는 나를 위해, 우리는 너를 위해, 그렇게 끊임없이 주체와 대리의 경계를 넘나든다. 저자는 아직 모든 가족을 주체로 두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하지만 아내하고든 아이하고든, 조금은 더 많이 대화하려고 한다. 기꺼이 그들을 위한 대리의 삶을 살며, 그렇게 조금은 더 주체적인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다.

 

 

대리전쟁에 동원되다 

대학이라는 '갑'은 전쟁의 주체로 나서지 않았다. 대신 자신을 주체로 믿는 대리인들이 자연스럽게 그 전쟁을 수행하게 했다. 그런데 자신의 앞을 막아선 그들을 미워할 수가 없다. 저자 역시 갑을 위한 '대리전쟁'에 수차례 동원되어 왔기 때문이다. 을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또 다른 을이다.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전쟁의 수행자가 된다. 주변의 목소리를 외면하거나 그와 자기 자신 사이에 선을 긋는 것 역시, 갑의 욕망을 대리하는 행위인 것이다.


분노는 주변의 을이 아닌 저 너머의 갑을 향해야 하고, 공고하게 구축된 시스템에 닿아야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을은 계속해서 동원되고 희생될 것이다. 갑과 갑의 싸움이 시작된 대리운전 업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20퍼센트가 넘는 수수료에 더해 보험비, 프로그램 사용비, 출근비, 입금 수수료 등의 추가금을 부담해야 하고, 유니폼을 따로 구매하거나 핸드폰까지 개통해야 하는 왜곡된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모두가 알고 있다. 이를 바꾸기 위한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대리기사들의 네트워크는 의외로 단단하다. 모두가 하루쯤 출근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밤은 절반쯤 멈춘다. 그렇게 전국적인 파업을 하는 것도 정말로 멋진 일이 될 것이다. 그렇게 갑의 욕망을 위한 '대리인'으로서가 아니라 우리 모두는 스스로를 위한 주체로 함께 싸워나가야 한다. 

 

 

거리에는 사람이 있다 


대리운전 기사들은 기계와 한 몸이 되어 기다리고, 걷고, 뛴다. 기계가 신체에 종속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지문이 없어진 그들의 신체는 이미 기계화되었다. 막차가 끊긴 시간부터 첫차가 움직이기 전까지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그렇게 기계가 된 이들을 다시 사람으로 호출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기사와 손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거기에는 사람만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을 여전히 기계로 두는 이들이 있다. 그저 핸드폰에서 간단한 클릭 몇 번을 하는 것으로 자신이 해야 할 그 무엇을 타인에게 대리시키면서, 그 기계 너머에 사람이 있음을 잊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이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고로움을 상상하지 못한다. 쉽게 호출을 취소하기도 하고, 아니면 기계를 대하듯 타인의 감정을 고려하지 않고 발화하기도 한다.

 
그러나 간편함에 이끌려 사람을 상상하는 법을 잊게 되면, 그 역시 기계가 되어버린다. 타인의 처지에서 사유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고, "여기에 사람이 있어요"라는 누군가의 절망에도 무뎌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도 기계들의 밤이 열린다. 하지만 그 누구도 기계가 아니다. 나는 '지문'이 있는 한 인간으로서 그 밤을 걷는다. 이 거리에, 사람이 있다.

 

 

 

우리 모두 경계에 있다

 

어느 조직에나 관리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현장 노동자도 아닌, 중간자가 존재한다. 그것은 중심부와 주변부의 경계에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저자는 대학에서 '중간자'이자 '경계인'이었다. 대학원생 조교로 학과사무실과 연구소에 있으면서, 시간강사로 강단에 서면서, 계속해서 경계를 넘나들었다.

 

우리 모두는 경계에 있다. 다만, 한 걸음만 물러설 용기를 가지면 된다. 대리인간으로 밀려날 것인지, 스스로 물러서고 다시 나아오는 주체가 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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