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과학 천재들 -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과학자들의 이야기 한국의 천재들 시리즈
이종호 지음 / 북스타(Bookstar)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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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재, 조선 시대를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 5명만 꼽으라면 상당히 고민에 빠질 것이다. 만약 10명만 꼽으라면 질문이 잘못되었다고 할지도 모른다. 과거의 선현들이 과학과 동떨어져 살았다고 생각하므로 선현들 중에 정말로 과학자가 있었느냐고 오히려 반문할 수도 있다. 한국인 중에서 선두 과학자, 즉 과학 분야의 천재를 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 '머리말' 중에서

 

 

8인의 위대한 한국 과학자들

 

한국의 과학자들의 면모를 알려주는 자료가 있는데 바로 국립과천과학관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된 사람들로 2016년 현재까지 모두 31명의 과학 천재들이 헌정되어 있다.

 
최무선(崔茂宣), 이천(李 ), 장영실(蔣英實), 세종대왕(世宗), 이순지(李純之), 허준(許浚), 최석정(崔錫鼎), 홍대용(洪大容), 서호수(徐浩修), 정약전(丁若銓), 김정호(金正浩), 김점동(金點童), 이원철(李源喆), 윤일선(尹日善), 우장춘(禹長春), 조백현(趙伯顯), 이태규(李泰圭), 안동혁(安東赫), 김동일(金東一), 석주명(石宙明), 장기려(張起呂), 현신규(玄信圭), 최형섭(崔亨燮), 김순경(金舜敬), 김재근(金在瑾), 한만춘(韓萬春), 이임학(李林學), 조순탁(趙淳卓), 허문회(許文會), 이호왕(李鎬汪), 이휘소(李輝昭)

 

이곳에 헌정될 수 있는 기본 자격은 우선 역사적 정통성을 지닌 우리나라 과학기술 선현 또는 대한민국 국적을 보유한 과학기술인으로 한정된다. 또한, 탁월한 과학기술 업적으로 국가 발전 및 국민복지 향상에 기여한 사람들로 모든 과학기술인들의 귀감이 되고 국민들의 존경을 받을 만한 훌륭한 인품을 갖춘 인물을 대상으로 한다.

 

이들을 선정할 때 고려되는 업적 기준도 구체적이다. 우선 과학기술 분야로 한정하되 원칙적으로 국내에서 이룩한 업적을 대상으로 하며 역사적으로 검증되었거나 국제적으로 공인되어야 한다. 더불어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이런 기본 자격과 업적 기준을 통과하여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있다는 것은 이들이 상당한 과학적 업적을 쌓았다는 것을 인정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며 현대적인 기준으로 보면 천재의 반열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학 자체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것으로 수많은 과학자에게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아내거나 발견하고 이를 토대로 이론을 만들거나 입증하여 그동안 알지 못했던 미지의 영역을 알려주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이란 의미를 정확하게 모르던 조선시대의 인물임에도 과학자들로 분류하여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한 것은 이들 모두 시대를 초월하여 남다른 것을 추구했다는 뜻이다.

 

 


이 책의 기본은 현재까지 수많은 과학자가 명멸하였지만 그중에서도 남다른 재주를 가진 천재들의 일생을 찾아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누구보다도 다른 능력을 갖춘 과학자들을 의미하는데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있는 사람 중에서 20세기를 살았던 사람 중에서 과학의 각 분야로 구분하여 선정했다.

 

이원철(李源喆, 1896~1963) - 천문학
우장춘(禹長春, 1898~1959) - 농학
이태규(李泰圭, 1902~1992) - 화학
리승기(李升基, 1905~1996) - 화학
이임학(李林學, 1922~2005) - 수학
조순탁(趙淳卓, 1925~1996) - 이론물리학
이호왕(李鎬汪, 1928~) - 의학
이휘소(李輝昭, 1935~1977) - 이론물리학

 

 

같은 아시아 국가인 일본은 이미 여러 명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들을 배출했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배출되지 않았지만 후보자로 거론되거나 충분한 자격을 갖춘 과학자들이 있다. 바로 우장춘禹長春, 이태규李泰圭, 이호왕李鎬汪, 이휘소李輝昭 박사가 그들인데 이들 중에서 이호왕 박사는 아직도 생존해 있다.

 
반면에 리승기李升基 박사는 일제강점기 시대에 일본에서 연구한 후 북한에서 서구의 노벨상에 버금가는 공산권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을 수상함으로써 노벨상 반열에 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정되어 있지 않다. 나일론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합성섬유인 비닐론을 개발하여 세계적인 학자로 우뚝 솟았지만 한국에서는 거론되지 않는 비운의 학자이다. 그러나 마땅히 이곳에 포함되어야 과학자임에 틀림없다. 

 

 

이휘소 박사(1935~1977년)

 

한국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는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에서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부서진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와 참charm입자의 예견은 소립자 물리학 발전에 큰 획을 긋는 공헌을 했다. 사실 이 연구 업적을 토대로 나중에 7명의 과학자들이 노벨상을 수상했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 아쉽다. 왜냐하면 40세 초반에 교통사고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비운의 아이콘인 셈이다.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는 자동차 사고로 위장되어 살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이는 한국 내의 핵폭탄 제조와 관련하여 한국과 미국 간의 정치 역학에 의한 희생양이었다는 의문이 지금까지도 제기되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던 과학자였지만 사망한 사람에겐 수여하지 않는다는 노벨상의 규정으로 인해 한국 최초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되지 못했다. 연구에 몰드하느라 팬티가 썩은 줄도 몰랐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리승기 박사(1905~1996년)

 

전라남도 담양 출신인 그는 세계 최초의 합성섬유인 나일론에 이어 합성섬유로는 두 번째로 비닐론을 실용화했다. 서울에서 4년간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다닌 후 일본의 마츠야마 고등학교를 거쳐 교토제국대학(현, 교토대학) 공업화학과에 입학했다. 1931년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일본에서 직장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지도 교수가 아스팔트를 연구하는 회사의 연구원으로 추천했다. 이곳에서 일본 특허를 취득하는 등의 성과를 올린 후 교토제국대학 부설 일본 화학섬유연구소가 설립되자 읿본 섬유의 권위자인 사쿠라다 이치로 교수의 연구 강사로 임용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합성섬유 연구를 시작했다. 당시 교토제국대학에는 이태규 화학박사가 화학과의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1937년 교토제국대학의 조교수가 되었다. 이를 감안할 때 리승기와 이태규는 여러 해 동안 교토제국대학에서 친교를 맺었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비단과 면직물 수출국이었는데, 미국의 듀퐁사가 1935년 나일론의 합성에 성공함으로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미국의 나일론은 폴리아미드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인데 반해 일본의 비날론은 폴리비닐알코올 계열의 고분자 화합물이다. 폴리아미드 계열의 화합물은 원유를 원료로 합성하므로 석유가 나지 않는 일본에서 산업화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에선 비닐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1939년 10월, 교토제국대학 연구팀인 리승기는 두 명의 일본인과 함께 '합성 1호' 또는 '폴리비닐 알코올계의 합성섬유'를 개발했다. 이것이 바로 본격적인 합성섬유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후일 북한에서 대량 생산되는 비날론의 전신이 된다. 그의 연구가 공업화의 가능성을 열어주긴 했지만 완전한 실용화를 위해선 넘어야 할 산들이 많앗다. 우선 합성섬유 1호는 뜨거운 물에 닿으면 쉽게 수축되었고, 이를 개선하려고 열처리를 하는 경우 착색이 되는 문제점이 잇엇다. 그는 제조 공정 중에 포르말린 대신 아세트알데히드를 넣는 방법을 고안, 1942년 무렵 거의 모든 문제점을 해결했다.

 

그럼에도 그는 패망하는 일본에 군수용품을 만들어 줄 수 없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1944년 말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오사카 군 형무소에 투옥되고 말았다.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한 그는 1945년 11월 대학에서 함께 연구하던 동료 및 학생들과 함께 귀국, 경성대학 교수에 취임해 자신의 전공을 강의했다. 공과대학 학장을 역임했던 그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월북하고 말았다. 당시로는 북한의 연구 여건이 남한보다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에 월북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한에서 비날론 공장 준공과 함께 그는 '노력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고, 1962년 공산주의권에서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레닌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1960년 이후 1990년까지 과학계 대표로서 최고인민회의 대위원도 역임했으며, 탈북 망명자의 증언에 따르면 1967년 영변 원자력 연구소의 초대 원장을 맡았다고 알려졌다. 1996년 2월, 9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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