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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로 떠나는 힐링여행 ㅣ 인문여행 시리즈 11
이향우 글.그림, 황은열 사진 / 인문산책 / 2016년 11월
평점 :
종묘는 조선시대에 조상신께 제례를
올리고 나라의 안위를 부탁했던 조선왕조의 국가 사당입니다. 교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조상에 대한 효는 곧 국가의 사상적 이념을 대표햇던 근간이
되었습니다. 종묘는 바로 이 효를 실천하고 백성에서 본을 보였던 국가 사당입니다. 제가 처음 종묘를 보았을 때의 낌은 한 마디로 신선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말로는 표현하기 힘든 장엄함이 오래 전 보았던 종묘의 강렬한 인상이었습니다. 자, 여러분을 신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종묘로
초대합니다. - '저자의 말' 중에서
신들의 향연이 펼쳐지는 종묘宗廟
저자
이향우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했으며, 세 번의 개인전과 수차례의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조각가로 활동하고
있다. 23년 동안 교직에 재직했고, 2000년부터 시민 NGO 단체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소속 우리궁궐지킴이로 활동하면서
문화재청장 표창을 수상했다. 사단법인 <한국의 재발견> 부대표를 역임했으며, 현재 우리궁궐지킴이로 활동
중이다.
한국의 전통 궁궐문화에 대한 강의와
원고를 집필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경복궁>, <궁궐로 떠나는 힐링여행 : 창덕궁> 등이 있다.
종묘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진 저자가 오랜 기간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구해 집필된 이 책에는 종묘 건축의 엄숙한 무게와 제향의 감동뿐
아니라 종묘를 에워싼 우거진 숲이 주는 공기가 고즈넉하게 전해지고 있다.
종묘는 조선왕조의 국가사당이며, 그곳 건물에는 조선 역대 왕들의 신주를 봉안한 곳으로
저자는 알고 있었고, 대문을 들어서자 눈 앞에 펼쳐지는 삼도三道의 멀고 먼 느낌, 계속 주변을 에워싸고 따라오는 나무숲, 군데군데 보이는 집 몇
채 등 정말 조용한 곳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던 장소이다.
이제 저자가 방문했던 종묘에서 느꼈던 그 강렬한 인상을 우리들과 함께 나누려고 한다.
딱히 특정한 목적을 갖고서 찾아간 게 아니라 그냥 가서 보고 느낀 그런 감정을 말이다. 종묘의 건축물이 우리들에게 주는 엄숙한 무게는 물론이고
종묘를 둘러싸고 있는 오래된 숲이 풍기는 공기를 온몸으로 느껴보라는 것이다.
혼령이 다니는 길로
들어서다
종묘의 대문 격인 외대문 안으로 들어서면 우리들의 눈 앞에
직선으로 뻗은 긴 길이 펼쳐진다. 자세히 바라보면 세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 이를 삼도三道라고 한다.
이는 궁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궁궐에서의 삼도 중 가운데 길은 임금을 위한 길이라면 종묘에서의 삼도 중 가운데 길은 신神이
다니는 길이다. 오른쪽이 임금이 다니는 어로御路, 왼쪽이 세자가 다디는 세자로世子路이다.
우리나라의 종묘는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고자 종묘에는 유네스코 기념비도 세워져 있다. 원래 종묘宗廟 자체는 고대 중국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현재 중국의 자금성 앞에 위치한 명청明淸조의 태묘太廟는 중화인민공화국 출범 이후 '노동인민문화궁'으로 바뀌어 그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유교식 제향祭享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유지하는 곳이 바로 한국의
종묘이다.
조상신을 섬기는 종묘제도의 기원은 중국 우虞나라 때 시작하지만, 최초의 유교적 종묘
개념은 중국 주周나라 때 <예기禮記>에 나타난다. 종묘에 대한 한국사의 기록으로는 고구려 동천왕 때
중국 위나라의 공격으로 환도성이 파괴되자 평양성을 새로 쌓아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고 나타난다. 하지만 이때에는 기존에 존재하던 시조묘의 연장선
정도였다.
조선왕조의 종묘는 역대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주(神主- 죽은 사람의 위패)를 모신 국가 사당으로, 그 제례적 신성성과 함께 종묘 건축이 갖는 단아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세계에서 유일한 건축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가 광해군 원년(1608년)에 이전의 규모로 중건되었고, 그
후 다시 몇 번의 증축 및 보수補修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종묘는 처음 지어졌던 구조에서 점점 더 길어졌고,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위한
공간으로 특별한 위계를 지니게 되었다.
조선의 왕이
가장 중요하게 떠받든 것은 바로 종묘사직이다. 임진왜란으로 조정이 모든 것을 버리고 황급히 피난길에 올랐으나, 그
황망 중에도 종묘와 사직의 신주만은 안전하게 피신시켰다. 이는 종묘사직이 보존되어야 나라를 지킬 수 있다는 믿음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종묘사직은 국가의 존립 그 자체였다.
국상國喪
종묘 제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왕의
죽음으로부터 접근해야 한다. 왕의 죽음을 국상國喪이라고 말한다. 조선에선 유교식으로 상장례喪葬禮가 엄격하게 치러졌다. 이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수록되어 있다. 상례는 3년의 복상 기간 중 행하는 모든 의례를, 장례는
시신을 땅에 묻어 무덤을 조성하는 일체의 의례를 일컫는다.
유교의 사생관死生觀에서 사람의 죽음을
'돌아가셨다'고 표현한다. 혼魂은 하늘로 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부모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제례를 통해 효孝를 표현했다.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삼년상을 지나 종묘에 부묘되기까지를
흉례凶禮로 보고, 그 이후 제사의식은 조상을 다시 만난다는 의미의 길례吉禮로
여겼다.
예를 소중하게 여기다
<국조오례의>에 규정하기를 조선시대 예제禮制의
대상에는 오례(五禮 - 길례, 흉례, 군례, 빈례, 가례)가 있었고, 제사 의례인 길례吉禮는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로 나뉜다. 종묘대제는
사직대제와 함께 대사大祀에 속하여 임금이 친히 받들었던 가장 격식이 높은 의례였다. 종묘제례는 종묘에서 왕실의 조상들에게 지내는 제사로,
종묘대제宗廟大祭 또는 대향大享이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왕실의 후손으로서 왕이 친히
제향을 봉행하여 조상에 대한 효를 행하고 국가의 평안과 번영을 기원하는 조선왕조의 가장 큰 국가 의례로 임금을 비롯한 왕세자, 제관祭官,
문무백관, 악공, 일무원 등 700여 명이 참가하였다. 조선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나라에 공이 있는 공신의 신위가 봉안되어 있는
종묘에서 제향을 올리는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이 유교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의례 형식으로 보여준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인다.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종묘제례를 진행하는 동안 제사를
장엄하게 꾸미기 위해 기악과 노래 그리고 춤이 펼쳐지는데, 이를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이라고 한다. 종묘제례악은 세종 때 완성되었으며, 그 후
약간의 추가가 이루어졌을 뿐 큰 변화가 없다. 거의 500년 전의 기악과 노래와 춤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이렇듯 오래된 제례와 음악이 함께
전해오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드문 일로, 종묘제례악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무형유산에 선정되었다.
공자가
일찌기 예의 완성은 악樂이라고 말했듯이, 종묘제례는 종묘제례악으로 완성된다고 말할 수 있다. 제사 지낼 때
연주하는 기악과 노래, 그리고 일무원들이 추는 무용 등 이 세 가지가 종묘제례악을 구성하고 있다. 엄숙한 제례 절차에 따라 연주되는 경건하고
장엄한 곳이므로 그 음악성을 높게 평가받고 있다. 세종대에 정비, 세조 때 다시 다듬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어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자랑스런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