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철학, 기쁨을 길들이다 - 존재의 가장 강력한 경험, 기쁨으로 성장하는 지혜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이세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기쁨은 우리 생명력의 발현으로, 존재하고 생을
음미하는 힘에 맞닿는 수단이다. 기쁨을 만끽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경험은 없다. 그렇다면, 우리? 의지와 노력으로 기쁨이
떠오르게 할 수 있을까? 기쁨을 길들일 수 있을까? 기쁨을 길러낼 수 있을까? 기쁨의 역량에 바탕을 둔 지혜를 제대로 구축할 수 있을까? -
'서문' 중에서
어떻게 완전하고 순수한
기쁨에 이를 수 있을까?
저자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이자 세계적인 종교사학자, 철학자이다. 스위스 프리부르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도미니크회
수사인 마리 도미니크 필립과 세계적인 철학자인 에마뉘엘 레비나스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정신적인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인도와 이스라엘에 체류하고
프랑스의 수행 암자와 수도원에서 지내다가 파야르 출판사에서 총서 책임자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직접 저자로 나서 피에르 신부, 움베르토 에코
등과 나눈 철학과 영성에 관한 다수의 대담집과 심층 연구서를 펴냈고, 생태 문제에 관심을 두고 '국경 없는 환경'이라는
단체를 창립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1994년에는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의 연구원으로 활동하면서 학문적 스승인 에드가 모랭의 뒤를 이어 철학, 사회학, 역사학을 한데 엮은 학제간 연구에서 종교
문제를 다뤘다. 공영방송 프랑스5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시리즈 <사이비 종파, 그 거짓말과 이상>을 공동 연출하고 여러 편의 TV
다큐멘터리 시나리오를 집필했으며, 공동 집필한 희곡 <신의 선의>는 2009년에 초연한 뒤 5개국에서 각색되어 상연되고
있다.
현재 철학자이자 소설가,
라디오 진행자, 프랑스 최고의 종교 간행물 <종교의 세계> 편집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며 대중과 만나고 있다. 두 편의 역사소설
<천사의 약속>과 <루나의 신탁>은 20개국에서 1백만 부가 판매되는 등 '프레데릭 르누아르 신드롬'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저서로는 <오직 사랑>, <네오르네상스가 온다>, <불교와 서양의 만남>,
<이중설계>, <신이 된 예수>, <그리스도 철학자>, <젊은 날, 아픔을 철학하다> 등이
있다.
그가 제시하는 기쁨의 지혜는 생의
모든 고뇌까지 포용하면서도 생을 사랑할 수 있는 완전한 기쁨, 순수한 기쁨에 이르는 길에 대한 철학적 대답이자 실천적 해결책이다. 이 책은
2015년 파리 테러 이후 슬픔에 잠긴 프랑스 국민들에게 '기쁨'이란 어느 누구도 앗아갈 수 없는 존재의 본질이자, 역량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은 책으로 각인되며, 출간 즉시 프랑스 아마존 종합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쾌락 없이는 행복도
없다
하지만 여기서의 쾌락은 스스로 선택한 절제된 것이어야
한다. 스토아학파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일과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우리들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일을 바꾸려고 노력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알코올의존증 환자나 게임 중독자라면 본인 스스로 결단력 있게 이런 중독과 싸우며
벗어나야 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인생이 불시의
사고, 사별, 재앙으로 시련에 빠뜨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토아주의자들은 우리가 어찌 할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 지혜라고 말한다. 그들은 수레에 묶여 끌려가는 개의 비유를 들었다. 개가 끌려가지 않으려고 힘으로 버텨봤자 결국
가야 할 곳까지 끌려가게 마련이다. 버텨봤자 괜히 힘만 빼고 몸만 다친다. 개가 헛되이 몸부림치지 않고 수레의 진행 방향을 순순히 따라간다면
어차피 도착하는 곳은 같아도 가는 도중의 고생은 한결 줄어든다.
니체가 생각한 기쁨의 원리는
역량이다
니체는
그리스도교가 삶의 비극적 차원을 수용한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이 종교의 병적인 시각, 구원받으려면 고행을 겪어야 한다는 시각은 거부했다. 또한
불교를 공부한 후에는 이 종교가 번민을 거부했지만 욕망의 소멸을 주장했다고 비판했다. 니체는 이 두 갈래 길 사이에서 제3의 길, 즉 생을
고통까지 포함해서 긍정하는 길을 제시했다.
우리를 옭아매고, 상처 입히고,
두렵게 하는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생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성한 긍정, 이 절대적 동의를 니체는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다. 운명애는 바로 우리들에게 닥치는 모든 것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절대적 기쁨의 조건이다.
"기쁨은 역량이다. 그 역량을 잘 키우고 건사하라"
- 달라이
라마
기쁨을 제대로 느끼기 위해 우리는
보는 법, 접촉하는 법, 눈여겨 바라보는 법, 냄새 맡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나아가 마음으로 느끼는 법을 다시 배워 자신의 감정과 따로
노는 일이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매시에 시간을 들일 줄 알아야 한다. 단순한 충격, 단 세개의 음표에서 기쁨이 솟아나는 일을 드물다.
기쁨이 태어나게
하려면 우리 몸과 정신을 온전히 감각에 맡겨야 한다. 이렇듯 우리 감각에 접속하는 것은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부정적 감정들에도 그만큼
여지를 내주는 일이다.
도교는 유교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상이다
공자는
행복하기 위해 인간은 덕을 갖춰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덕을 갖추려면 우주의 질서를 본받아 살아야 한다. 반면
도교 사상가들은 우리 인간은 천상이 아닌 지상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았다. 향후 300년간 해가 몇 시 몇 분에 뜰지는 예측할 수
있어도 내일이 어떤 날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도교 사상은 때를 아는 철학이다. 도교가 그토록 강조하는
'무위無爲'는 아무 행동도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인생의 흐름을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기 목표, 자기 의도를 시야에서
놓치지 않되, 무슨 수를 동원해서든 빨리 실현하고 말겠다는 생각은 버려라. 생이 내 시도에 맞서거든 힘으로 버티지 말고 생이 이끄는 방향으로
가라. 그 목표는 나중에 이뤄질 수도 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해방의 길
스피노자 자신은 욕망을 "인간의 본질 자체"라고 했다. 인간은 자기 욕망의 방향을 잘못 설정할 때 예속되어버리고
만다. 욕망이 자기 존재 역량을 증진하기는커녕 위축시키는 대상들에게로 향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슬프고 불행해진다. 슬픔과 수동적 기쁨에서 능동적
기쁨으로 나아가는 해방의 과정은 욕망을 억압하거나 제거하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알아보고 욕망이 좋은 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는 의지의 힘만으로 변화를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감정을 이성과 의지의 힘으로 길들일 수 없는 일종의 악악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각은 '집착이
ㅜ불행을 낳으니 집착의 원인인 욕망을 버려야 한다'는 불교적 시각과도 차별화된다. 오히려 그는 욕망은 인간의 본질인만큼 그 감정을 위축시킬 게
아니라 더 풍부히게 고양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이글기 위해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다면 그 관계가 정말로 나에게 좋은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반복적으로 슬픔을 느낀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그런 감정은 대부분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못할 때 찾아온다. 관계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분별이라는 작업이 필요하다.
자아를 초월해야 진정
능동적 기쁨을 접할 수 있다
통찰, 개성화 과정, 생에 대한
동의로 내공을 쌓을수록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아와 완전히 동일한 존재가 아님을 깨닫는다. 나라는 존재가 나의 감정, 신념, 생각, 마음으로
구성된 프레데릭으로만 요약되지 않는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다고 해서 내 존재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 안에 프레데릭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그 무엇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나의 정신에 속하는 훨씬 더 심오한 정체성으로서의 자기Soi 말이다.
자기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자아와 동일시된 자기의 해방으로 이어진다. 실제로 진정한 자기성취는 자기상실의 경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래야만 자아Moi에서
자기Soi로 넘어갈 수 있다. 더욱 깊이 내려가 진정한 나 자신이 될수록 어린 시절부터 마음과 감정이 형성해온 자아의 거짓 정체성에서 벗어나게
된다.
단순한 삶의
기쁨
저자의 직접 체험이다. 나환자촌에는
아기,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400여 명이 한데 어울려 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의료팀이 와서 더 이상 치료할 방법이 없을 정도로
괴사된 손이나 발을 절단하는 수술을 하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무엇보다도 인상적이었던 것은 마을곳곳에서 기쁨이 샘솟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던 어느 독일인 의사가 기억난다. "저 사람들은
뭐가 저리 좋을까요? 다들 저렇게 흉측한 꼴을 당했는데, 팔을 잃고 다리를 잃고 사람 몰골조차 아닌데 말입니다" 그 의사는 이해할 수 없어 화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데 빈자 중의 빈자요, 병자 중의 병자인 나환자들은 아직도 사랑하고, 먹고, 말하고,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 기뻐했다. 그들은
생을 사랑하기에 기뻐했다.